(EP.149)바이올렛
자색의 마왕, 바이올렛.
정신계 마법의 일인자.
그녀는 샤사르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청의 마왕 야라크가 무력 면에서의 이인자라면, 그녀는 조금 더 실질적인 부분에서 실권을 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전투에서 행한 가장 첫 번째 행동은 다른 게 아니었다.
우웅-
마나를 움직인다.
상대가 먼저 공격을 가해오기 전에, 먼저 술식을 그려낸다.
목표로 하는 것은 단 하나.
화이트 클리포트를 다른 장소로 끌어내는 것.
그뿐이었다.
“고유마법.”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뜩였다.
“매혹의 안개.”
화아아악!
연보랏빛 장막이 사방에 펼쳐진다.
“…….”
화이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위협적인 마법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는 건 분명할 텐데도, 구태여 움직이지는 않는다.
바이올렛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저 소년은.
이 마법이 어떤 형태로 그 자신을 가둘지는, 잠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설마, 한 번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오만에 차올라 있기라도 한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으득-
바이올렛이 거칠게 이를 갈았다.
……인정한다.
자신은 저 소년에게 졌다.
고작해야 20년밖에 살지 못한 어린 소년에게, 그야말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샤사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방심하지 않는다.
훨씬 제대로 된 준비를 갖추었다.
방심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게 곧 진 원인이라고 판단한 건 아니었다.
소년, 화이트 클리포트는 강했다.
하물며 그 당시에는 8서클에 불과했을진대, 자신을 압도했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소년은 8서클을 초월했으며, 9서클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닿았다.
명백한 최강자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의미였다.
상대하는 건, 더욱 버거워질 터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해야 했다.
해내야만 했다.
샤사르가 아셰라와의 전투에서 승기를 가져가기 위해, 화이트 클리포트를 끌어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으니까.
─안개가 퍼진다.
사방으로, 주변으로 흩어지며, 점차적으로 눈앞의 소년과 그녀 자신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오만하군요, 화이트 클리포트.”
우선은 대화를 시도한다.
당연,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 그가 돌발적인 행동을 벌인다면, 기껏 구축한 술식이 어떻게 흐트러질지 알 수 없었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소년, 화이트는 고개를 들어 올리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입매를 비틀며, 이죽이듯 조소를 흘릴 따름이었다.
“오만하다, 라. 그런 말은 내가 아니라, 네가 따르는 샤사르에게 해야 할 것이겠지.”
“……그 자신감도 거기까지입니다.”
“어째서?”
화이트의 반문에 바이올렛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당연한 되물음이었으나,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감정을 억누르며, 힘겹게 대꾸를 꺼내 든다.
“……그녀, 아셰라를 믿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계속 말해봐라.”
“……그녀는 샤사르를 이길 수 없습니다. 대륙 최강의 마왕은 그녀가 아니라, 샤사르이기 때문이죠.”
“…….”
확고한 신뢰가 담겨 있는 바이올렛의 말.
화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고요하게 바이올렛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읏.”
그 시선이, 그 눈빛이.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버겁고, 또 그 자신을 압박해 오는 것만 같아서.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시죠.”
바이올렛은 움츠러들면서도, 애써 말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당당한 태도를 갖추고자 하면서.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화이트가 툭 내뱉었다.
“샤사르는 스승님을 이기지 못해.”
믿음이 아니었다.
신뢰도 아니었다.
그 말은, 그 한마디에는.
그저 분명한 확신만이 담겨 있었다.
“……무슨 소리를.”
그렇기에 더더욱 의아했다.
어찌 아는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당장 샤사르를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는 그녀, 바이올렛마저도 명백한 승리를 확신할 수만은 없었는데.
어째서 저 소년은, 아셰라가 승리를 가져오리라고 무조건 확신하고 있는 걸까.
의아했다.
동시에 겁이 났다.
혹시나, 정말로.
그런 감정이, 그런 의구심이.
천천하지만 확실하게, 속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
그렇지만 그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입술을 더욱 거칠게 깨문다.
이를 악물고, 눈빛은 더 형형하게 번뜩인다.
서슬 퍼런 기세를 풍기며, 바이올렛이 양팔을 펼쳐 들었다.
“……어찌 되든 좋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말은 듣지 않겠어요.”
“먼저 말을 걸어온 주제에, 빠져나가는 꼴이 자못 우습네.”
“…….”
꽈악-
주먹을 거칠게 틀어쥔다.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기 힘들었다.
동시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당당한 태도도 여기까지입니다.”
안광을 빛내며, 바이올렛이 어느새 눈앞에 떠오른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쩌엉!
그리고, 직후.
“──.”
세상이 고요해지는 감각과 함께.
화이트와 바이올렛.
두 명은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
“…….”
눈을 뜬다.
갑작스레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예측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바이올렛이 어떤 마법을 써서, 어떤 형태로 자신을 아셰라와 분리해낼지를.
그러니 겁먹을 이유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대응하면 될 문제였다.
자욱한 연보랏빛 연기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흐릿한 형태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당연하게도, 바이올렛이었다.
화이트가 입매를 사납게 비틀었다.
“정신계 마법을 이용한 공간의 분리인가. 심상 세계로 끌고 들어가지 않은 건 칭찬해 주지.”
“……건방진 소리를.”
저벅, 저벅.
고요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한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흘러내렸다.
동시에 어둠을 뚫고, 자색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번쩍였다.
“…….”
그 자색의 눈을 시야에 담자, 화이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흠.’
다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바이올렛과 대치한 시점에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신계 마법의 일인자가 아니던가.
어느 정도, 비장의 수단은 갖추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정신이 흐릿해진다.
시야가 뒤틀리고, 동시에 속이 흔들린다.
마치 신체의 모든 기관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각.
그리고.
“─잊으세요.”
묘하게 간드러진, 고혹적인 기색을 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화이트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지근 거리까지 접근한 바이올렛이, 그 자신에게로 몸을 기대오고 있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아셰라에 관한 것도, 제국에 관한 것도. 하물며 세계에 관한 것도. 모든 것을 잊고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몽롱한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눈꼬리를 유려하게 휘게 하며, 바이올렛이 천천히 그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들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옷자락들이 서서히 흘러내린다.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나체가 된 상태로, 바이올렛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이 공간 내부에서만큼은 그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할 최고의 쾌락을 선사해 드릴게요.”
“…….”
여전히,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바이올렛의 나체가 온전히 담겼다.
그럼에도 바이올렛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그가 자신의 나체를 바라보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의도한 것이었으니까.
이 공간 자체가, 그걸 위한 것이었으니까.
바이올렛의 입꼬리가 끌어올려지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자, ‘화이트’. 이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도록 하세요.”
“…….”
“저만 바라보는 거예요. 이 공간 내부에서, 저라면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마치 남성을 매혹하는 몽마와도 같이,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라면, 그 어떤 고위 마법사라도 완벽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이.
이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였던가.
고작해야 한 번이다.
두 번 다시는 사용하지 못할 수법이었다.
그만큼, 방대한 마나를 잡아먹는 술식이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마나를 조금 잡아먹으면 어떠한가.
모든 게 끝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몸이 되면 어떠한가.
어차피 눈앞의 소년이 이 공간을 빠져나갈 즈음에는, 모든 상황이 샤사르의 의도대로 끝맺어져 있을 터인데.
그러니 괜찮았다.
자신은 그저 이 공간 내부에서 이 소년을 잡아두고 있기만 하면 된다.
저번과는 다를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술식이다.
그 어떤 마법사라 해도, 최소한 수십 시간은 잡아둘 자신이 있었다.
조건 따위도 없었다.
그게 남자더라도, 혹은 여자라고 하더라도.
‘매혹의 안개’는 그러한 것이었다.
상대방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상대의 몸과 마음을 앗을 수 있는 마법이었다.
“……자, 제게 몸을 맡기세요.”
싱그럽게 웃으며, 바이올렛이 손가락으로 화이트의 쇄골을 쓸었다.
사락-
조심스럽게 화이트의 의복에 손을 댄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화이트는 반응이 없었다.
그렇기에 바이올렛은 확신할 수 있었다.
‘걸렸군요.’
완벽하게, 정신에 마법을 거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을.
……자, 그럼 이제는 끝이다.
이 소년은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자신과 이 공간 안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자신도 마음을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모든 건 샤사르의 뜻대로.
그를 막을 수 있는 마법사는 이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바이올렛의 신뢰이자 믿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옳지, 착한 아이네요.”
눈앞의 소년, 화이트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어떻게 가지고 놀아줄까.
어떤 식의 쾌락을 안겨줄까.
그래, 망가질 때까지 천상의 쾌락을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신의 마법에 걸린 소년은, 괴로워하면서도 거부하지는 않겠지.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쾌락이란 것은, 감정이란 것은 그러한 것이었으니까.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감각이 아니었다.
바이올렛은 확신하고 있었다.
소년, 화이트 클리포트가 자신이 선사하는 쾌락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푸욱!
“──.”
그렇기에.
반응하는 게 늦었다.
“……어?”
당혹성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쿨럭!”
이어지는 건 각혈이었다.
검은색으로 물든 피가 입술에서부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공을 들인 것 같긴 하네.”
“무, 슨.”
순간 정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화이트가 보였다.
흐릿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선명한 안광을 번뜩이며, 그가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어, 떻게. 마법을. 풀, 었…….”
“어떻게, 라.”
뚝뚝 끊기는 목소리에 화이트가 이죽이며 대꾸했다.
“어리석은 질문이네. 단순한 문제일 뿐인데.”
“……무슨, 말을.”
“내가 네 정신계 마법을 힘으로 찢어버린 거다, 바이올렛.”
“……!”
그 말에 바이올렛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야말로 큼지막하게.
그런 바이올렛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화이트가 돌연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런데, 대체 내가 잠시 잠식된 동안 뭔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왜 헐벗고 있는 거냐.”
“……쿨럭.”
바이올렛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배를 파고든 청백색의 창이, 그 서늘한 감각이.
입을 열지 못하게끔 이끌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처럼.
“쯧.”
그러나 화이트는 그저 혀를 한 차례 찰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불쾌하네.”
바이올렛의 몸이 닿았던 부분을 대충 손으로 털어내며, 화이트가 청백색의 창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끅! 잠, 깐……!”
당연하게도 바이올렛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으나.
“닥쳐라.”
화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더욱 마나를 끌어올린다.
거세게, 격랑과도 같은 기세로 분노를 드러낸다.
“하고 싶은 말은 조금 있다만…….”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마치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흘겨봤다.
그리고 툭 하니 내뱉는다.
“그냥, 죽어라.”
“……!”
바이올렛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한마디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