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전장
“…….”
샤사르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예상치 못한 경지의 상승까지.
“화이트 클리포트…….”
으득!
중얼거리며, 샤사르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큭.”
앞쪽에서부터 침음성이 들려왔다.
샤사르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아, 파……!”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왕, 에르샤가 제일 앞에 선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전신에는 푸른빛의 창들이 박혀 있는 상태였다.
샤사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에르샤가 공격을 그 자신 쪽으로 끌어들여 막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능력부터가 그런 종류로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위력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기에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샤사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에르샤의 전신에 파고든 푸른빛의 섬광들을 살폈다.
‘고유마법…….’
강력했다.
에르샤의 방어를 뚫어내고 저 정도의 상처를 입힐 정도라면, 그 자신에게도 통하는 수준의 공격이라는 의미였다.
휘오오오-
“…….”
바람이 불어왔다.
시야가 환하게 드러나며, 이내 샤사르는 한 소년의 모습을 잡아낼 수 있었다.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그 푸른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나며 그 자신들을 바라봐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바이올렛……! 분명 8서클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와중, 에르샤의 분노가 담긴 외침이 바이올렛에게 닿았다.
흔치 않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바이올렛이 식은땀을 흘렸다.
“부, 분명 8서클이었을 텐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샤사르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1년 전 당시 그녀와 함께 화이트 클리포트를 마주한 게 바로 그였으니까.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화이트 클리포트의 실력, 그 경지를.
……확실히 심상치 않은 힘을 갖추고 있는 소년이었다.
단순한 8서클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실력이었다.
지금껏 마왕들을 죽여올 수 있었던 게 이해가 갈 정도로.
‘그렇지만.’
그건 그렇다고 친다 해도, 작금의 상황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
9서클.
8서클과는 그 격이 아득히 다른 경지였다.
1년이란 시간이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리 간단히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대체 무슨 술수를 사용했기에, 저런 식의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고작해야 20대의 나이로 9서클에 오르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의문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샤사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식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물며 경지만 강제적으로 끌어올린, 반쪽짜리 9서클도 아니었다.
지금 현재, 눈앞의 저 소년은.
아홉 개의 마나의 고리와, 그 안에 담긴 힘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탓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샤사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다만.
쇄애애애액!
“……!”
상황은, 샤사르가 그렇게 상념을 이어나가게끔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시 한 차례, 섬광이 날아든다.
직전 에르샤의 몸을 관통했던 그 푸른빛의 섬광이었다.
우웅!
샤사르가 이를 악문 채 마나를 끌어올렸다.
붉은빛의 아지랑이가 그의 전신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잡념은 지운다.
경악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그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럴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후욱!
손날을 내리긋는다.
공간에 붉은빛의 균열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하나의 거대한 아가리가 튀어나왔다.
캬아아아악!
마치 괴수가 포효하는 것과 같은 괴성과 함께, 그렇게 나타난 아가리는 날아드는 섬광을 잡아챘다.
물어뜯고, 분쇄하며, 이어서 목구멍으로 삼킨다.
완벽하다고 표현할 만한 파훼.
아가리는 이내 다시금 공간의 틈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
그리고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두 세력으로 나뉜, 제도의 상공.
그곳에서부터 살벌한 마나의 폭풍이 일기 시작하며.
동시에,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었다.
*****
자연스레 진영이 갈라진다.
그와 함께 전장에 모인 모든 인물이 각자가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기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투는 다방면에서 시작되었으며,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전장이 나누어졌다.
테이칸 클리포트와 리이칸테르 후작은 같이 움직여 험악한 인상의 노인을 상대했다.
불길과 오러가 난무하며, 노인을 천천히 옥죄어가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그들은 점차적으로 중심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으로 나선 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하나의 리치였다.
[끝을 보도록 하지. 마왕들이여.]
칠흑의 마법진을 전개하며, 루시펠이 폭격을 개시했다.
뼈로 이루어진 섬뜩한 창날들이 마왕들을 향해 쏟아진다.
그것을 막아선 건 은색 머리칼의 사내와 에르샤였다.
각자 마나를 끌어올리며, 역으로 반격을 시작한다.
실버는 후방에서 마법으로 루시펠을 견제했으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에르샤가 근접전을 펼친다.
두 명의 마왕이 루시펠을 상대하는 형태의 전투가 벌어졌다.
명백하게 루시펠이 불리한 모양새였으나, 정작 당사자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크흐흐…….]
고요하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루시펠이 안광을 흐릿하게 번쩍였다.
그리고 내뱉는다.
[지금이다, 프리드리히.]
“……!”
지원군을 부르는 간결하고 짤막한 한마디를.
실버와 에르샤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떠지는 순간이었다.
우웅-
마나가 공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어딘가에서부터 거대하고 강렬하기 짝이 없는 마나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실버와 에르샤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 방향을 향해 틀어졌다.
제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구역.
온갖 화려한 색채로 물든 건축물들이 늘어선 공간에서, 한 노년의 사내가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황궁.
그리고 황실의 대마도사.
“프리드리히 에드발트……!”
실버가 발작하듯 소리쳤고, 그 직후 프리드리히가 움직임을 보였다.
대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황궁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다만, 그게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미는 아니었기에.
전장이 제도로 한정된다면, 그는 전방위에서의 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황실의 대마도사로서의 특권이었다.
번쩍!
광휘가 일었다.
콰가가가가각!
동시에, 무언가가 갈려나가는 듯한 불쾌한 소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실버와 에르샤가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이어서 마법을 전개한다.
방어를 위한 술식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커헉!”
직후, 먼지구름의 틈새 속에서 소녀의 신음성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에르샤의 것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마법에 정통으로 직격당하며, 작지만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실버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딜 보고 있나?]
그 틈을, 루시펠은 놓치지 않았다.
쇄애애애액!
“……!”
다시금 뼈의 창날이 날아들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많은 숫자의 창들.
하늘을 뒤덮으며, 그것들은 실버와 에르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폭격과도 같이, 혹은 빗줄기와도 같이.
*****
“…….”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쾅! 콰앙! 콰아아아앙!
사방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온다.
번쩍이는 섬광은 연신 시야를 밝게 물들였으며, 간간이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딱 한 곳.
그저 한 곳만큼은, 그저 조용하기 짝이 없었으니.
“아셰라…….”
샤사르가 가라앉은 눈동자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봤다.
아셰라 역시, 그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네 명의 인물이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를 직시하고 있었다.
한쪽은 아셰라와 화이트였으며, 나머지 한쪽은 샤사르와 바이올렛이었다.
전장은 나누어졌다.
노인의 모습을 한 마왕은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이 상대하고 있었고.
루시펠과 프리드리히는 실버와 에르샤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비등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도중이었으나, 후자는 조금 달랐다.
명백한 9서클의 대마도사 두 명.
루시펠과 프리드리히는, 연신 두 명의 마왕을 압도하는 도중이었다.
“……쯧.”
그런 광경을, 샤사르 역시 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 차례 혀를 차며, 그가 재차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익숙했던, 그러나 이제는 적이 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셰라.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어줄 특별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소녀.
……다 좋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른 마왕들이 죽어 나가든, 혹은 그들이 역으로 제국 측의 인물들을 섬멸하든.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셰라, 그녀만이 있으면 되었다.
그녀만 사로잡을 수 있다면, 모든 건 깔끔하게 해결된다.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세계를 뒤집는다.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큭, 크하하하…….”
그것을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입매를 사납게 비틀며, 샤사르가 마나를 일으켰다.
“좋다. 아셰라, 그리고 화이트 클리포트.”
“…….”
침묵하는 둘을 바라보며, 샤사르가 바이올렛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뜻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바이올렛 역시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대치가 시작됐다.
거창한 말은 없었다.
신경전이나, 혹은 가벼운 견제를 섞은 전초전도 없다.
“……끝을 보자.”
그저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그리고 그건, 서로가 유일하게 동의하는 부분이었기에.
“──.”
마나를 움직인다.
각자의 스태프, 혹은 완드를 꺼내 든다.
붉은빛과 보랏빛, 그리고 찬란한 두 갈래의 푸른빛이 아지랑이의 형태로 일렁거렸다.
그, 직후였다.
─────!
거대한 굉음이 제도 전체를 강렬하게 타격했다.
그야말로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소음과 함께.
서로가 끝장을 보기 위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