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6)족쇄를 풀다
“…….”
대륙 북쪽 끝자락, 마왕의 고성.
그 심층부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려져 있으며, 두 눈은 지그시 감겨 있었다.
적의 마왕, 샤사르.
잔잔한 침묵을 지키며,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마나가 움직인다.
공명음이 고요하게 울리며, 그의 주변으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협정.’
떠올리는 건 과거의 기억이었다.
과거의 어느 한때, 그 자신이 저질렀던 최악의 실수였다.
이어서 샤사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금빛 눈동자.
그녀를 묶어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협정의 존재는, 그녀가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선택을 내려서 지금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하였으니, 남는 건 제압뿐일진대.
그 제압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 만들어내었던 협정이었다.
협정이라는 족쇄는 아셰라를 분명하게 억제했으나,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렇게, 맺었던 협정을 억지로 부숴내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말았다.
“……쯧.”
한 차례 혀를 차며, 샤사르가 고개를 가볍게 털어냈다.
……상념은 필요없었다.
쓸데없는 고민, 잡생각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이미 상황은 최악으로 다다랐으며,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정을 끊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뿐.
“──.”
그를 위한 1년이었다.
얼마나 참았는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 고성의 지하에서 보냈던가.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놈들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감히 반기를 들 생각조차 못 했을 제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안일하고, 아둔했다.
그렇기에 5명이나 되는 마왕이 목숨을 잃었다.
전력의 저울은 기울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니, 끝장을 보기 위해서는 이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야만 했다.
협정을 끊어내고, 확실하게 처리한다.
필요한 건 오직 아셰라뿐.
그마저도 그녀 자체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녀의 마나일 따름이었다.
그 특별한 마나만을 손아귀에 틀어쥘 수 있다면, 그녀의 목숨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았다.
“하아아아…….”
길게 숨을 내뱉는다.
마나를 끌어올리고, 심장에 집중시킨다.
일말의 낭비조차 없이, 전력을 이끌어낸다.
9서클의 수준조차도 아득히 뛰어넘은, 적의 마왕이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기세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번쩍─!
샤사르의 안광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섬광은 고성의 심층부를 가득 메우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쿠궁, 쿠구궁…….
지축이 뒤흔들린다.
그야말로 고성 그 자체를 무너뜨릴 것만 같이, 살벌한 기운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우웅-
“…….”
샤사르의 눈이 천천히 뜨여진다.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찢어졌다.
떠올랐다.
이끌어냈다.
심장을 옭아매고 있던 ‘협정’을, 형체화시켜 떠오르게끔 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사슬이었다.
그 자신의 심장을 틀어쥐고 있는, 한때의 실수가 만들어낸 최악의 족쇄였다.
그것을 향해,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지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어지는 건 그야말로 섬멸 마법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굉음이었다.
먼지구름이 일었다.
자욱한 안개와도 같이, 그것은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
그리고 잠시 후.
먼지구름이 천천히 흩어지며, 시야 역시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툭, 투두두둑!
먼저 보이는 것은, 처참하게 파괴된 실내였다.
그저 모든 게 일그러졌다.
단순히 벽이라거나, 지면이라거나.
그것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었다.
끼긱, 끼기긱-
공간이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뒤틀리며, 동시에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도중이었다.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처럼.
그랬으나, 샤사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떠올리게 할 따름이었다.
“……하하.”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롯이 하나뿐.
쩍, 쩌적-
지금껏 그 자신을 묶어 두고 있었던 족쇄가, 사슬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끊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슬이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땅을 뒤흔드는 소음을 내며, 사슬이 떨어져 내렸다.
사아아아-
이내 한 차례의 삭풍이 불어오며, 마치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듯 그 잔재는 사라져간다.
그야말로 깔끔하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큭, 크큭.”
샤사르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나를 지나치게 많이 소모했다.
자연스레,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큭, 크하하하…….”
그는 웃음을 흘렸다.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 그저 흥분한 채 광소를 터뜨렸다.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껏,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격을 방해했던 속박이 완벽하게 파훼되었을진대.
어떻게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크하하하……!”
웃음소리는 점차 광기를 머금어 갔다.
샤사르는 그렇게, 한동안 광인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뚝!
“…….”
그야말로 한순간에, 웃음은 멎었다.
단순히 입을 다문 게 끝이 아니었다.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운다.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내리며, 눈가를 가늘게 좁힌다.
무척이나, 무척이나 소름 끼치는 변화였다.
“……후우.”
이내 샤사르는 얕은 숨을 내뱉었다.
여전하게 남아있는 붉은빛의 아지랑이가 샤사르의 감정에 동조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
한 차례 주변을 흘겨본다.
1년 동안 처박혀 있었던, 고성의 심층부를 훑어본다.
별다른 감상이 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원해서 갇혀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말하자면, 약간의 불쾌함이 남아있는 정도일까.
고개를 가볍게 털어내며, 샤사르는 몸을 돌렸다.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두 번 다시 올 이유도 없을 테지.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심층부를 빠져나가며, 계단을 오른다.
한 발짝, 두 발짝.
느긋하게, 그야말로 조급해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흐음.”
이내 문 앞에 선 샤사르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어젖혔다.
콰앙!
“……!”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4명의 마왕이 고개를 홱 돌렸다.
“……샤사르!”
가장 먼저 반가움을 표시한 건 바이올렛이었다.
그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공했나요?”
이어서 조심스레,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질문을 입에 담는다.
그녀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샤사르는 그런 바이올렛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낸다.
“…….”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이올렛뿐만 아니라, 자리에 모인 4명의 마왕 전부가 샤사르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새삼스레 우스운 광경이라고 느끼기라도 한 걸까.
“큭.”
한 차례 조소를 흘리며, 샤사르가 턱을 쓸었다.
“그래.”
그리고 꺼내 드는 말은 바이올렛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협정을 깨부쉈다.”
샤사르가 입매를 비틀었고, 그에 따라 바이올렛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그 반응을 한 차례 살핀 샤사르가 실소를 머금으며 시선을 떼어냈다.
이어서 바라보는 건, 창밖의 어두운 하늘이었다.
어둡지만, 어딘가 모르게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 하늘이 아득한 저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새삼스레 그 광경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품으며, 샤사르가 목을 비틀었다.
뚜둑!
불쾌한 소리가 한 차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마나를 전부 회복하기만 하면, 그날로 끝을 본다.”
“……그 말은.”
“그래.”
바이올렛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샤사르가 섬뜩하게 입꼬리를 찢었다.
그 표정 위로 떠오르는 것은 분명한 환희와, 미약한 광기였으니.
“제국의 수도를 섬멸하겠다.”
무척이나 살벌한 어조로 그런 말을 내뱉으며, 샤사르가 몸을 돌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아셰라의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어떤 존재보다도 역린에 해당하는, 검은 머리칼의 소녀였다.
……진실되게 얼마 남지 않았다.
곧이었다.
그녀를 이 손아귀에 틀어쥐고, 세계를 한 차례 뒤집어엎는 데까지.
모든 건 그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테지.
제국도, 황실의 대마도사도, 서쪽의 엘더 리치도, 화이트 클리포트마저도.
그 어떤 마법사라고 한들, 자신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샤사르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오직 하나, 아셰라뿐.’
그녀만이 오롯이 자신에게 대적할 수 있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그녀가 유일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녀만 제압하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된다.
“……큭, 크하하.”
흥분이 담긴 광소를 잔잔하게 흘리며, 샤사르는 걸어 나갔다.
콰앙!
고성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아아…….”
한 차례 내부에서도 바라봤던, 붉은빛으로 물든 상공을 직시하며, 샤사르가 일그러진 미소를 표정 위로 띄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치게 흥분했기 때문일까.
끝끝내,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
‘누군가’가, 고성의 꼭대기에서 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어둠에 뒤덮여 있는 푸른빛의 눈동자가 섬뜩한 색채로 번뜩였다.
휘오오오-
한 차례, 부자연스러운 바람이 고성의 꼭대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 바람을 느끼며, ‘그 존재’는 몸을 돌렸다.
마치 더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이.
어둠 속으로, 더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백색의 로브를 걸친 그 존재는 완전히 어둠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