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5)족쇄를 부수는 방법
“후우.”
한숨은 길게 이어진다.
한 차례 내쉬고, 또 한 차례 내쉰다.
화이트의 한숨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아아…….”
“……제자님?”
결국 참지 못한 아셰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미묘하게 눈썹을 까딱거리며, 그녀가 화이트를 향해 쏘아붙였다.
“한숨만 쉬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알면 계속 찾아보기나 해요. 제자님이 먼저 제안한 거라고요?”
“끄응…….”
미간을 좁히고 침음성을 흘리며, 화이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무어라 받아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고문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하는 화이트.
그러나 그 눈동자 위로는 약간의 체념이 떠오른 상태였다.
화이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고문서를 뒤적거린다고 발견될 파훼법이었더라면, 진작에 부수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걸.
“…….”
그리고 그건, 아셰라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문서를 분석하는 눈짓을 멈추지는 않았다.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 황립 도서관의 지하에 보관된 고문서는 수천 개에 달했고, 그중에 마법적인 계약을 파훼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문서가 없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멈추지는 않는다.
지루하고 고되지만, 계속 해나갈 따름이다.
그녀도 알고, 화이트도 안다.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12마왕 중 일인으로 불리던 시절 맺었던 협정, 그것만 깨뜨릴 수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될 가능성이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러니, 포기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자리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지루한 건 지루한 거고, 스승님이 곁에 있으니.’
그리 생각하며, 화이트가 아셰라를 힐끔거렸다.
……그녀가 옆에 있다면, 이런 일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치게 지루하긴 하다지만, 감당할 만했다.
입가에는 자연스레 옅은 미소가 맺히는 시점이었다.
“……음?”
화이트의 입술을 비집고 의아함이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선은, 시야의 끝자락에 잡힌 한 고문서로 향해 있었다.
화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내려앉았다.
홀린 듯이 고문서를 향해 손을 뻗는다.
들어 올리고, 그 제목을 읽어 내려갔다.
“……「족쇄를 부수는 방법」, 저자 마크 콘테스.”
“어?”
그 목소리에 반응한 건 아셰라였다.
화이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살짝 놀란 듯이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셰라가 보였다.
“알고 있는 고문서입니까?”
무언가를 느낀 걸까, 화이트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아셰라가 허공을 날아 화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고문서를 살피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에, 화이트 역시 침묵하는 모습.
“고문서 자체를 알고 있기보다는…….”
약간은 의아하다는 듯, 아셰라가 중얼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크 콘테스……. 그 저자의 이름이 신경 쓰이네요.”
“……?”
화이트가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이어서, 고문서를 한 차례 내려다본다.
……어느 모로 보나, 최소 수백 년은 더 지난 문서처럼 보였다.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만 해도 그리 보인다는 의미였으니, 실제로는 더 오래된 고대의 문서일지도 모른다.
화이트의 시선이 약간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아셰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위로는 아주 미약한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뭐예요, 그 시선은?”
그리고 아셰라 역시 그런 화이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기에.
“설마 또 나이니 뭐니, 그딴 헛소리를 꺼내 들 생각은 아니겠죠?”
완드를 꺼내 들며, 그녀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화이트는 그에 그저 고개를 재빨리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흥.”
살짝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아셰라가 다시금 고문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마크 콘테스, 계약 마법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마법사예요. 그런 그가 이런 문서를 남긴 건 저도 몰랐지만…….”
문서를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 위로, 약하게나마 기대의 빛이 떠오른다.
“족쇄를 부수는 방법이라……. 공교롭기 짝이 없네요.”
“…….”
화이트의 표정 역시 한층 더 굳어졌다.
어쩌면,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고문서를 재빠르게 펼쳐 든 화이트의 눈짓이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셰라 역시, 그런 화이트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고문서를 바라본다.
적당한 침묵이 공간에 깔렸다.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두 마법사는 고문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건…….”
그리고.
……그리고, 끝내는.
“……가능성.”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발견해내는 것에 성공하였으니.
“찾았네요.”
흔치 않게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아셰라가 눈을 반짝였다.
화이트와 아셰라,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거라면.”
중얼거리는 화이트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대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직은 모른다.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이론’대로 시도한다고 해서, 협정이라는 게 그리 간단히 깨부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화이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끌어올려졌다.
처음으로 찾아낸 가능성.
미약하지만, 분명한 실마리였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화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네, 제자님.”
즉각 대답하며,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아셰라.
그녀와 눈을 맞추면서, 화이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보도록 하죠. 혹시 모르니까.”
“……그렇네요.”
그 의미심장한 말에 같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아셰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 모르니까,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두 사람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히는 순간이었다.
*****
그로부터 하루 후.
“재료, 다 모아왔습니다.”
“아, 왔어요?”
제국을 다 뒤집어엎으며 돌아다녀, 필요한 준비물들을 모아온 화이트가 연구실 내부로 발을 들였다.
황실 측에서 준비해준, 최고의 마법적 설비들을 갖춘 곳이었다.
연구하기에는 이만큼 최적의 장소가 달리 없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가볍게나마 결계마저 쳐놓았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준비만 완벽하다면, 이 마법으로 부수지 못할 족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아셰라가 중얼거린 말이자, 동시에 마크 콘테스의 고문서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였다.
화이트의 눈빛이 한층 진지하게 바뀌었다.
“계약 마법을 중점적으로 파고든 마법사가 남긴 최후의 마법이라면,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겠죠.”
“그래서, 준비는 완벽한가요?”
아셰라가 얕게 웃음을 흘리며 물었고, 그에 화이트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니.
“최상급의 재료들로 모아왔습니다. 드래곤 하트, 그리폰의 깃털, 그리고 정령의 혈청까지.”
그렇게 한 차례 말을 멈추는 화이트의 표정 위로, 처음으로 약간의 불안감이 떠올랐다.
“……재료만 보면 아무리 봐도 연금술사의 기록인데, 마법사인 건 확실한 겁니까?”
“으음…….”
그 질문에는 아셰라 역시 답할 말이 그다지 없었던 걸까.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는, 그녀가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뭐, 저야 모르죠? 마크 콘테스라는 이름의, 계약 마법의 권위자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라…….”
그 이상의 상세한 정보는 알지 못한다고 덧붙이며, 그녀가 무안한 듯 볼을 긁적였다.
화이트의 표정이 살며시 굳어졌다.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요? 영 신뢰가 안 가는데.”
아셰라의 말이 영 시원찮았기에 꺼내 든 말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말고는 의미 있는 방법은 못 찾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다만 아셰라의 말에 반박할 말이 궁한 것도 사실이었다.
……겨우겨우 찾아낸, 아주 미약한 희망이었다.
이마저도 놓아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그러니, 영 신뢰가 가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눈 꼭 감고 믿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
……그래야만 할 것이다.
화이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모르겠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가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연구실의 중앙, 여러 마법 설비들이 비추고 있는 테이블 위에 모아온 재료들을 쏟는다.
“……자, 그럼.”
이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해볼까요, 한 번.”
그렇게, 협정을 깨부수기 위한 1차 실험이 시작되었다.
*****
[흠, 흐음.]
흔치 않게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루시펠이 황궁 내부를 거닐었다.
공중에 반쯤 뜬 채 허공을 유람하며, 루시펠이 불쾌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크흐흐…….]
그리고 그에 반응한 한 사람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웃어요?”
[음?]
순간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루시펠의 안광이 측면을 비추었다.
한 소녀가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귀여운 외모를 가진 소녀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연한 빨간색의 입술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가 눈에 띄게 날카롭다는 부분일까.
루시펠은 금방 그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밤피르 가문의 아이인가.]
“오르카 밤피르라고 해요.”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며, 오르카가 옅게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인사하는 건 처음이죠? ……그러니까, 엘더 리치 씨?”
[그냥 루시펠이라고 불러도 된다. 화이트 역시 그리 부르고 있으니.]
“아, 그럼 그렇게 할게요.”
루시펠의 허락에 기껍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오르카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루시펠.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왜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거예요?”
[…….]
그 질문에 잠깐 몸을 멈칫하는 루시펠.
오르카를 바라보는 그의 안광이 살며시 파르르 떨렸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아갔다.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고, 내가?]
“아, 자기가 어떻게 웃는지 모르고 있었구나.”
루시펠의 말에 살짝 안쓰럽다는 듯 입가를 가리며, 오르카가 쓴웃음을 흘렸다.
“뭐, 자잘한 건 넘어가자고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중요한데…….]
“아뇨, 아뇨. 안 중요해요, 하나도.”
[…….]
루시펠은 무어라 더 말을 꺼내고자 했으나, 어째서인지 싱글싱글 웃는 오르카에게 무슨 말을 덧붙이기가 쉽지 않았기에.
[……후우.]
한 차례 깊게 숨을 내뱉고는, 그가 고개를 대충 털어냈다.
그리고 이어서 대답을 꺼내 든다.
[연구에 성과가 있었다. 1년 전에 얻어낸 12마왕의 사체로 실험한 결과지.]
“아, 그러고 보니 들었어요. 마도왕국의 습격 사건을 처리한 대가로 두 마왕의 사체를 루시펠이 수습했다면서요?”
[그랬지. 크흐흐…….]
다시금 불쾌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루시펠.
그러고는 이어서 그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특별히 네게는 말해주도록 하마, 밤피르의 아이야. 내가 이번에 얻어낸 성과는─]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꺄악?!”
갑작스런 폭발음이 한 차례 울려 퍼졌고, 그 여파로 오르카가 순간 공중에 붕 떠올랐다.
단순히 멀리서 들려온 소음뿐만이 아니라, 측면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재빨리 핏빛 기운을 운용해 안정적으로 착지하며, 그녀가 폭발이 터져 나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이……?”
[……저곳은.]
그 말을 받으며, 루시펠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으음…….]
그에 오르카가 물었고, 루시펠이 한 차례 침음성을 흘리는 모습.
살짝 갈등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화이트와 그 스승인 소녀가 무언가를 실험한답시고 마련한 연구실이 있는 방향이었는데.]
“……에?”
그리고 그렇게 내뱉어진 말에, 오르카의 표정이 순간 기묘하게 바뀌었다.
[……음.]
루시펠과 오르카의 시선이 동시에 폭발의 중심지로 향했다.
무척이나 떨떠름한 기색을 담은 시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