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끊어낼 방법
“……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우선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그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해, 금빛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하는 아셰라의 모습이었다.
“스승님?”
“깨어났어요?”
다정한 목소리로 그리 물어오는 아셰라, 그에 화이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누워있지. 싫었어요?”
“……아닙니다.”
조금은 섭섭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는 아셰라의 행동에 화이트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주변을 둘러본다.
고위 귀족이 머물 듯한 호화로운 방 내부, 보이는 것은 금빛 용의 문장이었다.
아지다하카 왕실의 상징이었다.
“마도왕국의 왕성입니까?”
“그 청년이 저희를 배려해준 덕분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고는, 아셰라가 천천히 상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은, 트라마르는 죽었어요. 루시펠에 의해서.”
“……그렇습니까?”
그에 눈에 띄게 반색하는 화이트.
뻔히 보이는 감정 변화에, 아셰라가 얕게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요?”
“……티가 났는지?”
조금은 허탈하게 헛웃음을 흘리며,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약간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군요. 그래도 제 손으로 복수를 완성하고 싶었는데.”
“그런가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아셰라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이후로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어요. 마도왕국의 피해도 그리 크지 않고, 용기병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답니다.”
그리 내뱉으며, 아셰라가 조심스레 몸을 기울였다.
화이트의 쪽으로.
조금은 당황한 듯 화이트는 순간 몸을 움찔거렸으나, 굳이 다가오는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다정하게, 아셰라가 화이트의 백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수고했어요, 제자님. 이번에도.”
“……별말씀을.”
옅은 미소를 그리며, 화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
그러나 불편하지는 않았기에, 화이트와 아셰라 두 명 모두 굳이 그 정적을 깨뜨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건 다정한 시선의 교환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그저 싱그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아.”
무언가가 떠올랐을까.
화이트가 짤막하게 탄성을 흘렸다.
아셰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그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화이트가 재차 입술을 떼어낸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말입니다.”
“생각난 거라, 뭔데요?”
아셰라가 즉시 되물었고, 그에 화이트가 입술을 일자로 꾹 닫았다.
명백하게 갈등하는 기색이 떠올랐기에, 아셰라가 조금 씁쓸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흘렸다.
“뭐가 문제일까요, 제자님. 이제와서 서로에게 숨길 건 없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여전히 고민하는 듯한 태도의 화이트의 모습에, 아셰라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럼 어서 말해요. 기다리게 하지 말고.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
“얼른.”
이어지는 재촉에, 결국 화이트는 백기를 들었다.
얕게 한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야라크, 말입니다만.”
“네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하는 아셰라.
싱글싱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화이트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가 계속 말하던 게 있었습니다.”
“……?”
아셰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고, 화이트가 말을 끝맺었다.
“아셰라는 어디 있냐, 고.”
“…….”
그리고 그렇게 말을 끝맺으며 내뱉은 한마디에, 아셰라의 표정이 약간은 굳어졌으니.
화이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스승님을 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백하게 좋지는 않은 목적일 테니.”
그러니까 거부감이 든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다며, 화이트가 그리 말을 마쳤다.
공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셰라가 고개를 살짝 떨구었으며, 화이트는 그런 그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있고자 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고민을 끝마치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의 목적은, 단순해요.”
아셰라가 드디어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 위로, 처음으로 혐오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역겹기 그지없는 목표를 가지고, 그들은 그 계획에 저를 이용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는, 아셰라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그리고 이내, 한마디를 덧붙인다.
“세계를 뒤집어엎는 것.”
“…….”
“그게 그들의 목적이에요.”
*****
“바이올렛.”
“……네, 샤사르.”
샤사르의 부름에 즉각 응답하며, 바이올렛이 고개를 숙였다.
명백하게 상급자를 대하는 태도였고, 그건 곧 모든 마왕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12마왕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적어도 지금 순간, 이 자리에 모인 마왕들은 그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샤사르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 대기의 명령을 전 마왕에게 전달하라고 그랬지 않나?”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그러나, 분명하게 기분이 좋은 건 아니리라.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바이올렛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할 뿐이었다.
“분명히 전달했어요.”
“……그래?”
턱을 괴고는, 샤사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단 말이지…….”
중얼거리며, 그가 붉은 안광을 흐릿하게 번뜩였다.
콰아아아아아앙!
“……!”
순간 울린 폭음에, 바이올렛은 물론이고 다른 마왕들 역시 몸을 움찔거렸다.
후둑, 후두둑!
기다란 테이블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다름 아닌, 샤사르가 가볍게 내지른 주먹질에 의해서.
누군가는 식은땀을 흘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른침을 삼켰다.
샤사르의 무력에 놀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장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에서 고작해야 테이블 따위, 주먹질로 파괴하지 못하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다만 그들이 긴장한 이유는, 샤사르가 이어서 뿜어내는 살벌한 기세에 있었다.
“근데 어째서, 야라크는 내 명에 따르지 않은 걸까.”
흐-
얕게 숨을 내뱉고는, 샤사르가 이마를 짚었다.
무척이나 곤란하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냐, 아냐. 사실 명에 따른 건 문제가 되지 않지. 중요한 건 야라크가 트라마르와 함께 죽음에 이르렀다는 거야.”
“…….”
“왤까? 왜 그랬을까. 마도왕국 따위는 둘이서 충분히 멸망으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한 걸까?”
중얼거림은 연신 이어져만 갔고, 그 이외의 마왕들이 흘리는 침묵은 점차 짙어졌다.
“아니지. 그게 맞아. 충분히 멸망시킬 수 있었지. 멸망시킬 수 있어야만 했지. 근데 그러지 못했어. 왜? 왜지? 어째서일까?”
콰르르르릉!
……또 한 차례, 고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붉은 섬광이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입매를 사납게 비틀며, 샤사르가 홀로 말을 이어갔다.
“고작해야 변방의 왕국 하나, 그걸 두 명이서 처리하지 못해서, 결국 이딴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라…….”
미소는 진해졌고,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 간다.
샤사르의 적안이 살벌하게 빛났다.
“금색, 회색, 녹색이 죽었을 때도,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그런데 이제 둘이 더 늘었군. 시체가 두 구 더 늘었어.”
내뱉고는, 한 차례 간격을 두고 말을 멈춘다.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당연하게도 그 정적을 깨뜨리는 역할은, 샤사르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 이외의 마왕에게는 발언권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같이, 샤사르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들의 목표가 무엇이지?”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샤사르가 내뱉은 말이었다.
명백히 대답을 바라는 그 말에, 바이올렛이 한 차례 마른침을 삼키고는 대답을 꺼내 들었다.
“세계의 재편성, 이죠.”
“그래. 세계를 한 차례 뒤트는 게 우리들의 목적이지. 그것만큼은 시종일관 내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던 야라크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었는데…….”
피식 웃음을 흘리며, 샤사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겠어. 적어도 야라크에게 있어서는 말이지.”
죽었으니까.
딱 그렇게만 덧붙이면서, 샤사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샤사르의 시선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왕들을 훑고 지나갔다.
이어서, 다시금 입술을 떼어낸다.
“아셰라를 확보해야 한다.”
“…….”
그리고 그리 내뱉어진 말에, 일순간이지만 모든 마왕들의 표정이 진중하게 바뀌었다.
샤사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마나, 태생적으로 타고난 그 찬란한 빛깔의 마나만이 우리들의 목적을 이루어낼 수 있으니.”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잡는다.”
필요하다면, 협정을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내뱉으며, 샤사르가 비틀린 미소를 그려 보였다.
*****
“……세계의, 재편성이라고요?”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화이트의 표정은, 그야말로 구겨지다 못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데까지에 이르렀다.
아셰라 역시 혐오감을 감추지 않으며, 입술을 짓씹는 모습.
“신이라도 되려는 겁니까? 그놈들은.”
“……어쩌면 신이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것일 뿐일지도 모르죠.”
싸늘하게 내뱉으며, 아셰라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 그쯤에서, 화이트가 어지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한 지경인데.”
설마하니 이러한 비밀이 감춰져 있을 줄은 몰랐기에.
진정으로, 추측은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화이트는 당혹감과 경멸을 참지 못했다.
……어딘가 머릿속의 한구석이 뒤틀려 있는 녀석들이라는 건, 회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
헛웃음을 흘리며, 화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바라보며, 아셰라가 조심스레 몸을 기울였다.
화이트의 손을 마주 잡고는, 그녀가 입술을 떼어냈다.
“……제 마나는 그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저의 마나를 폭주시키는 것이 강대한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는 가장 획기적인 방법이니까, 그 탓에 저를 노리는 거예요.”
“…….”
“지금껏 그들이 제게 집착한 이유는 그러한 거죠. 아마 제자님이 건너뛴 시간대에서 저를 폭주시킨 이유도, 과거에 저에게 타락의 술식을 새겨넣은 이유도. 모든 그런 목적에서 비롯된 행동들일 거예요.”
그렇게 아셰라가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기나긴, 무척이나 기나긴 시간이 그저 흘러만 갔다.
아셰라는 어느새 화이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은 채였으며, 화이트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얌전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이내.
화이트가 그 벽안을 서서히 뜨이게 하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네, 제자님.”
아셰라의 대답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방법을, 찾도록 하죠.”
내뱉는 말은 그러한 것이었다.
아셰라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화이트가 천천히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 푸른 눈동자 위로 떠오르는 건, 명백한 열망이었으니.
이윽고, 화이트가 다시금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빌어먹을 ‘협정’을 안정적으로 끊어낼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을.”
무척이나, 무척이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