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누구인가?
“……컥, 커헉.”
피를 토하면서도, 화이트의 표정 위로는 그저 달성감 이외의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만을 노렸다.
야라크의 인지에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
정신계 마법 중에서도 최고위급에 속하는 기교였으나, 화이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것을 행동에 옮겼다.
‘고유 마법, 반영의 망토.’
상대의 인식을 일그러뜨리고, 나의 모습을 감춘다.
말하자면 자신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달리 표현하자면 오만이 될 수도 있었다.
다만, 중요한 건 화이트가 결국은 해내었다는 점에 있으리라.
자신의 존재를 잊게 만들어, 빈틈을 노릴 기회를 살폈다.
그리고, 얌전히 숨을 죽였다.
그저 기다렸다.
사냥감을 노리고 매복하는 포식자가 되기라도 한 듯이, 그저 얌전하게.
그리고 끝내는, 야라크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는 것에 성공했다.
“……쿨럭.”
후욱!
피를 토하는 화이트의 앞으로 칠흑이 일렁거렸다.
[괜찮나? 화이트.]
나타난 건 의외로 걱정의 빛을 띠고 있는 루시펠이었다.
화이트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연하지. 아무 문제 없어.”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만…….]
중얼거리면서도 화이트의 결연한 표정을 살폈을까, 그 이외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 루시펠이었다.
이내 그의 고개가 뒤편으로 돌아갔다.
쿠궁, 쿠구궁…….
[무너지는군.]
공간이 일그러진다.
세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청의 마왕, 야라크가 만들어낸 심해가 그 형태를 점차적으로 감추어 간다.
“……후우.”
얕게 한숨을 내뱉으며, 화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야라크를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지만, 남은 문제가 있었다.
화이트의 안광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트라마르.”
입에 담는 이름은 남색의 마왕의 것이었다.
자신의 심장에 창이 틀어박힐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야라크가 마도왕국으로 떠나보내게 한 사내.
그의 목숨마저 취해야만, 모든 게 비로소 끝맺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시야가 흐릿하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화이트가 한 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비틀-
한 차례 몸을 휘청거리며, 화이트가 이마를 짚었다.
‘어지럽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야라크 정도 되는 마법사의 인식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화이트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자색의 마왕 바이올렛 정도는 되어야 시도할 수 있는 기행이었다.
화이트 역시 힘을 지나치게 쏟아부은 나머지, 상당한 기력의 소모를 불러일으켰고.
[역시 너는 쉬는 게 낫겠군.]
“…….”
루시펠의 목소리에 화이트가 시선을 옮겼다.
혀를 차며, 루시펠이 고개를 살며시 가로젓고 있었다.
[네 상태를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군.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청의 마왕을 죽이는 과정에서 심히 몸을 상하게끔 한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잖아.”
[아니, 괜찮지 않다.]
단호한 목소리.
양보는 없다는 듯, 루시펠이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만 쉬어라, 화이트.]
“……아니, 아직 스승님이─”
화이트가 무어라 대꾸하며 루시펠의 손길을 쳐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퍽!
“……!”
일순 뒷목에서부터 느껴지는 강한 압박에, 화이트는 정신이 흐릿해지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이, 무슨.’
고개를 돌린다.
쓰러지는 와중에 보이는 것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리이칸테르 후작의 모습이었다.
털썩!
“…….”
[…….]
화이트가 쓰러졌다.
그리고 남은 세 사람은, 무척이나 떨떠름한 느낌으로 시선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기절시킬 필요까지 있었나?]
“크흠……!”
루시펠의 떫은 시선에 리이칸테르 후작이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이게 최선이라 생각해서.”
[흐음…….]
미심쩍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펠이 납득한 기색을 보였다.
[뭐, 좋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 말에 반응한 건 리이칸테르 후작이 아닌 테이칸이었다.
“내 아들이 기절한 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테이칸이 쓰러진 화이트를 부축했다.
“……각하, 일단은 들어 보시지요.”
“후우.”
리이칸테르 후작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테이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루시펠이 재차 입을 열었다.
[화이트의 마지막 말이 있기도 하니, 이제 마도왕국의 수도로 가보지. 마왕은 아직 한 존재가 더 살아있으니…….]
“마지막 말이라니, 마치 내 아들이 죽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리치.”
[…….]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태클에, 루시펠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자꾸 말을 끊어먹는 거지? 그리고 화이트를 기절시킨 건 내가 아니라 저기 리이칸테르 녀석일진대.]
“크흠! 크흐흠!”
리이칸테르 후작의 헛기침 소리가 한층 커졌다.
“…….”
잠시 다시금 떨떠름한 적막이 흘렀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쿠구구구궁……!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완벽하게, 야라크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루시펠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래도 시체는 수습해야지.]
이어서 손을 들어 칠흑의 마나를 끌어올리는 모습.
죽은 야라크의 시체가 떠오르며, 루시펠의 쪽으로 끌어당겨지기 시작했다.
[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테이칸이 오묘한 목소리로 물었고, 그에 루시펠이 미소를 지었다.
[하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본질적으로 마법사란 말이지.]
“……그래서?”
[마왕의 사체라니, 연구의 가치로는 충분하지 않나!]
돌연 목소리를 높이는 루시펠의 모습에 테이칸이 인상을 찡그렸다.
야라크를 한 차례, 루시펠을 한 차례 살피고는, 이내 영 탐탁잖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테이칸.
“……알아서 하도록 해라.”
[그럴 생각이었다.]
웃음을 흘리며, 루시펠이 아공간을 열어 야라크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재빠르게 닫히는 아공간.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이 눈짓을 교환했다.
“……으음.”
“크흠.”
영 마뜩잖았으나,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 임시 파티의 리더는 루시펠이었으니.
무어라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고, 기본적으로 피해가 되는 일도 아니었기에…….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은, 무척이나 떨떠름하지만 그럼에도 애써 신경을 끄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 직후였다.
콰과과광!
숫제 굉음이라고 표현할 만한 소리와 함께, 심해는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원래대로의 세상이 드러났다.
*****
마도왕국, 수도.
그 성벽에서는, 묘한 대치 상태가 벌어지고 있는 도중이었다.
“……아셰라. 여기 있었나.”
“…….”
남색의 마왕, 트라마르의 말에 아셰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다.
12마왕이라는 존재는 아셰라에게 있어서 그러한 자들이었기에.
굳이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자님은 어떻게 됐죠?”
사내, 트라마르가 이렇게 도시로 접근했다는 의미는 화이트가 실패했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아셰라의 눈동자가 깊게 침체되었다.
“무슨 소리지?”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마시죠. 화이트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트라마르의 반문에 즉각 대꾸하며, 아셰라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아, 화이트 클리포트 말인가.”
그리고 그제서야 질문을 이해했다는 듯, 트라마르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연히, 죽었다.”
“──.”
그리고 이어서 내뱉어진 말에, 아셰라는 순간 그게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으니.
“……거짓을.”
뱉어지는 목소리는, 명백히 떨리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트라마르의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한 태도로, 트라마르가 손을 휘저었다.
쿠궁, 쿠구궁!
아공간이 열리며, 그곳에서부터 수많은 용기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거짓을 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아셰라.”
“…….”
“화이트 클리포트는 죽었다. 다름 아닌 야라크의 손에 의해서 말이지.”
내뱉으며,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불쾌한 미소와 함께 트라마르가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협정’을 기억하고 있겠지.”
“…….”
아셰라가 침묵했다.
그랬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트라마르는 계속 말해나간다.
“너와 나는 서로 건드릴 수 없지만, 나의 병사들은 다르다.”
척, 척척!
용기병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는, 무기를 아셰라에게로 겨누었다.
아셰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여전히 성벽의 한쪽에서는, 마도왕국의 마법사들과 용기병들이 무기를 섞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럼에도 여력이 남아 있다는 듯, 트라마르는 태연히 용기병들을 꺼내 들었다.
그야말로 군단이라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
아셰라의 표정이 착 가라앉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 용기병들이 너를 잡아두는 동안, 야라크가 돌아오겠지. 네 제자의 목을 뽑아 들고 말이다…….”
으득!
그쯤에서, 아셰라가 이를 갈며 짓씹듯 내뱉었다.
“……닥치세요.”
그랬으나 당연히 트라마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즐겁다는 듯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큭큭거릴 따름이었다.
“아아, 이건 귀한 광경이구나. 그 흑의 마왕이 걱정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이라니…….”
“…….”
“실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어, 아셰라.”
말을 끝맺으며, 트라마르가 한 차례 고개를 꺾었다.
마치 잘 보라는 듯, 시선을 뒤쪽으로 던진다.
우우웅-
마나가 울부짖는다.
명백하게, 그 주인의 기척을 드러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보아라. 기척이 느껴지겠지? 이 강렬한 마나의 파동은 9서클의 대마도사가 아니면 풍길 수 없는 기운이다.”
아셰라가 표정을 구겼고, 트라마르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야라크가 돌아왔군.”
그리고.
……그리고, 그 바로 직후의 순간이었다.
[누가 돌아왔다고?]
“……!”
귓가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소름 끼치는 음울한 음성에 트라마르의 고개가 완전히 뒤로 꺾였다.
“……무, 슨.”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바라마지 않던, 그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청의 마왕 야라크의 모습─
[크흐흐…….]
─이 아닌.
그 특유의 불쾌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한 리치의 모습을 말이다.
검은 로브를 흩날리며, 루시펠이 그 형체를 드러냈다.
[자, 청의 마왕을 따라갈 시간이다. 또 한 명의 마왕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