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5)두 명
칼은 눈을 부릅떴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야 했다.
아무리 아지다하카 왕실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고작해야 조각상에 손을 대는 정도로 이런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기껏 해봐야 그날의 뇌 속성 마법의 위력이 조금 상승하는 정도.
정말, 감추는 것 하나 없이 고작 그 정도가 다였을 텐데.
“……헉.”
이번에는 달랐다.
소녀를 보았다.
익숙하다면 익숙하지만, 실체를 확인한 건 처음인 소녀.
그는 아지다하카 왕실의 시조와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진, 뇌룡 본인이었다.
[아지다하카의 아이야. 우리들의 왕국에 암운이 드리우는구나. 나가거라. 그리고, 청색의 재앙을 막아내거라.]
“……!”
그 말이 끝이었다.
한순간에 눈이 번쩍 뜨여지는 감각과 함께, 칼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슨.”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그가 침음성을 흘릴 즈음이었다.
콰앙!
무언가가 처참하게 깨부숴지는 소음이 들렸다.
자연스레, 칼의 고개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돌아갔다.
“……소년?”
그곳에는 화이트가 있었다.
뒤늦게, 공간을 가르며 아셰라 역시 튀어나오는 모습.
세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서 마주쳤다.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랬으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동일한 것을 보았노라고.
그 이후의 행동은 재빨랐다.
고민은 짧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파직-
칼의 전신에 전류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가장 먼저 유적의 계단을 타고 오른다.
화이트와 아셰라 역시 한 차례 눈짓을 교환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파앙!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세 마법사가 공간을 주파했다.
*****
“……이건.”
지상으로 올라온 뒤, 세 사람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마법사들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측면의 유적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들은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운 건 칼이었다.
“……누구냐!”
성격이 그러한 건지, 상황이 그를 그리 만든 건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마법사는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태, 태자 전하?”
그랬으나, 이내 칼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을까.
낯빛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마법사가 자세를 단숨에 낮췄다.
“아지다하카 왕실에 영광을! 태자 전하를 뵙……!”
“그런 허례허식은 됐다! 그것보다 상황의 설명을!”
“아, 옙!”
다급히 말을 끊고 들어오는 칼의 모습에, 마법사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칼과 화이트, 아셰라의 표정은 굳어져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어, 대체 어디서부터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수많은 병력들이 도시 밖에서부터 몰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내 마법사의 설명이 끝을 맺었고, 그쯤에서 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서 미안하군. 이만 대열로 복귀하도록 해라.”
“예, 예!”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한 모습으로 마법사가 다시금 걸음을 옮겨나갔다.
그리고 곧 세 사람만이 남은, 유적의 입구에는 적막이 흘렀다.
무척이나 심각한 기색으로 표정을 굳히고는, 칼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칼을 잠시 살피던 화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칼.”
“……뭐지?”
부름에 응답하면서도, 칼은 여전히 복잡한 기색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간결하게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이트가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뭘 본 건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아마 내가 본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나는.”
잠시 몸을 움츠리는 칼.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나는, 뇌룡을 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뱉어진 말에 화이트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예상대로군. 그렇다면, ‘푸른색’과 관련된 얘기도 들었을 테지?”
“……푸른색?”
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차분히 고민하는 모습.
경황이 없어서 기억이 애매하긴 했으나, 바로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청색의 재앙.”
이내 칼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고, 그에 화이트와 아셰라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였다.
“추측이지만, 아마도 그 청색의 재앙이라는 건 마왕을 뜻하는 걸 거다.”
“……마왕이라고?”
흠칫거리며, 칼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마왕이라는 이름은 그만큼 무거운 종류의 것이었기에.
그러나 그가 침착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던 탓에, 화이트는 그냥 할 말만을 이어나가는 것을 택했다.
“아마도 청의 마왕, 야라크와 관련된 문제겠지. 뇌룡이 거짓을 읊었거나, 혹은 잘못 본 게 아닌 이상, 마왕 중에서도 푸른색이라면 그밖에는 존재하지 않아.”
“……무슨.”
칼의 표정이 더욱더 심각하게 바뀌었으나, 화이트는 이미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떠들고 있을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마나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칼, 너는 마도왕국의 태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해라. 도시와 백성들을 지켜.”
“……음.”
정론이라면 정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말이었기에, 한결 침착해진 기색으로 칼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약간은 걱정된다는 시선으로 화이트를 살핀다.
“그렇다면 넌 뭘 하려는 거지? 무언가 생각이 있어 보이는데.”
“……그래, 생각이라. 당연히 있기는 하지.”
칼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화이트가 사납게 웃었다.
살기가 줄기줄기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며, 동시에 화이트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마왕을 죽인다. 그뿐이야.”
그리고 그게 화이트의 마지막 말이었다.
후욱!
“……음!”
순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바람이 불어오며, 화이트와 아셰라의 신형이 한순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두 눈을 부릅뜬 칼이었으나.
“……후우.”
이내 얕게 숨을 고르는 것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7서클의 마법사로서가 아닌, 마도왕국의 태자로서.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 적을 몰아낸다.
칼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동시에, 마찬가지로 순간이동의 술식을 그려내 그가 왕성으로 이동했다.
*****
후욱!
“…….”
화이트와 아셰라, 두 사람의 모습이 다시금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도시의 성벽 위였다.
거대하게 솟아 있는 성벽 위에서 아래를 오연하게 내려다보며, 화이트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보이는 건 그저 까마득한 숫자의 병력들.
도시의 저 건너편에서부터, 수많은 병력들이 천천히 발을 굴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병력들 사이사이에서 간간이 보이는 깃발이 하나.
“……야라크의 표식이에요.”
아셰라가 중얼거렸고, 그에 화이트가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뇌룡의 말을 듣고 예상은 했지만, 상황은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어째서,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필시 한동안 12마왕 측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했는데.
물론 그건 화이트의 일방적인 추측에 불과했으나, 그럼에도 근거가 없는 추측이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샤사르는 한 발 물러났고, 바이올렛은 부상을 입었다.
그런 와중에, 먼저 돌발적인 행동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단순한 견제조차 아니었다.
이건 명백하게, 전쟁을 위한 행동이었다.
마왕과 대륙의 국가들이 부딪히는, 전면전을 위한 행동이었다.
“……쯧.”
한 차례 혀를 차며, 화이트가 아셰라의 눈치를 살폈다.
“…….”
아셰라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상황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이채가 내려앉은 건 한순간이었다.
“한 명이 아니었군요.”
“……예?”
돌연 아셰라가 내뱉은 의미 모를 말에, 화이트가 되물었다.
아셰라의 고개가 틀어지며, 동시에 그녀가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보이나요? 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용기병(龍騎兵)들이?”
“……?”
화이트의 시선이 아셰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
이후, 화이트는 볼 수 있었다.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아니게 된 비운의 병사들을.
“……설마.”
“네.”
화이트가 낮게 중얼거렸고, 그에 대답한 건 아셰라였다.
마찬가지로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며, 그녀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야라크는 세력을 만들지 않는 자에요. 금의 마왕처럼 마탑을 쌓아 마법사들을 모으는 성향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지만.
덧붙이며, 그녀가 말을 이어나간다.
“……12마왕 중 단 한 명, 샤사르가 아니라 야라크를 따르는 자가 존재해요.”
그리고 그렇게 점차 이어지는 설명들에, 그로 인해 그려지는 그림들에.
화이트의 표정은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만 갔다.
“남(藍)색의 마왕.”
이윽고 선고하듯 내뱉어진 아셰라의 목소리에, 화이트의 눈동자는 어둡게 침체되기까지에 이르렀다.
“청의 마왕과 함께, 그가 그 자신이 키운 병력을 몰고 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