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4)퍼런 놈
[……가, 가증스러워! 이 가증스러운 마왕 놈!]
“…….”
[뭘 잘했다고 시선을 피해? 뭘 잘했다고 우리들의 왕국에 발을 들인 거야!]
이어지는 소녀의 맹격에 아셰라는 숫제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씁쓸함으로 가득한 울상을 지으며, 아셰라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마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쯤에서 화이트의 표정은 멍해져 있었다.
그야말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그저 멍하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스승님?”
“…….”
화이트의 부름에도 아셰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슬쩍 고개만 들어 올려 화이트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럼에도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어서 아셰라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화이트가 고개를 틀어 흐릿한 형상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음?]
그리고 그쯤 되자, 소녀 역시 화이트의 존재를 눈치챈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넌…….]
소녀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원망을 담고 있던 표독스러운 기색은 흩어지고, 점차적으로 의구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소녀가 천천히 허공을 밟으며 화이트에게로 다가갔다.
[…….]
“…….”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화이트는 소녀가 어째서 자신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고, 소녀는 그런 화이트를 그저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조금, 아니, 많이 노골적으로.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나?”
끝내 참지 못하고 정적을 깨뜨린 건 화이트의 쪽이었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화이트가 물었고, 그에 소녀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너, 뭐 하는 놈이야?]
그리고 내뱉는 말은 그러한 것이었다.
화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레 접근해놓고, 하는 얘기라는 게 뭐 하는 놈이냐, 라.
자연스레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아셰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그녀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레 화이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마나를 찬찬히 끌어올린다.
[어, 어?]
그 행동에 당황한 듯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냈으나, 화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마나를 더욱 거세게 일으키며, 공간을 찢어발길 듯이 폭발적인 기세를 풍길 뿐.
“스승님.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이 공간부터 빠져나가도록 하죠.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 제자님?”
그리고 그러한 화이트의 낮은 목소리에 당황한 건 아셰라 역시 매한가지였다.
“이, 일단 진정해요!”
다급히 눈을 깜빡이며, 그녀가 제지하듯이 손을 내저었다.
화이트의 고개가 미묘하게 옆으로 꺾였다.
그러나, 그런 아셰라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는다.
“…….”
차분하게 눈을 감으며, 마나를 다시금 가라앉힌다.
찬찬히 서클로 마나를 되돌려 보내며, 화이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둘째치고, 자신의 스승을 모욕하는 소녀의 행태는 보기 불편했다.
그렇기에 공간을 억지로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벗어나고자 했으나…….
“……후우.”
아셰라가 그러지 말라고 제지한 이상, 그에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당장 그녀가 조금 전 내뱉은 말들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해 보이고.
[…….]
그리고, 그렇게 상황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소녀는 오롯이 화이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금 적막이 흘렀다.
소녀는 화이트를 지그시 직시했고, 화이트는 그런 시선이 불편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아셰라의 쪽이었다.
“……그, 뭐. 혹시 저와 제자님을 여기로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까요?”
질문이 향하는 대상은 당연히 소녀였다.
여전하게 전류를 흩뿌리는 소녀의 고개가 아셰라의 쪽으로 돌아갔다.
[……제자? 그 흑의 마왕 아셰라가 제자를 들였다고?]
“…….”
[농담이지? 그 미친 마녀가 제자를 키워?]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었고, 하물며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그럼에도 아셰라는 무어라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녀가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언제쯤이었을까, 그게.
아마 천 년은 더 지났던 것 같은데.
아직까지 마도왕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제자님.”
“예.”
아셰라의 부름에 화이트가 즉각 대답한다.
그런 화이트를 향해, 아셰라가 천천히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혈기가 넘치던 시절이 있었죠.”
“……?”
아셰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기 때문일까.
화이트가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아셰라는 한층 더 부끄러움이 커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으나,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 숨길 건 없었다.
“저기, 저 소녀는 말인데요. 대충 예상했겠지만 뇌룡 본인이고…….”
“……예.”
그녀의 말대로 그 부분은 예측하고 있었기에, 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화이트.
아셰라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좀, 미쳐 날뛰던 때에 여러모로 피해를 입힌 적이 있어서…….”
“……미쳐 날뛰던 때, 말입니까?”
“……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은.
그런 의문을 잔뜩 담아, 자괴감과 함께 아셰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왜, 왜 어쩌다가 때아닌 고해성사의 시간이 찾아온 것일까.
그것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다름 아닌 화이트에게.
“하아…….”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가, 이내 체념한 듯 그녀가 시선을 슬그머니 늘어뜨렸다.
이어서, 이번에는 화이트가 아닌 소녀를 향해 말을 건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뭐?]
소녀가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가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아셰라를 가리켰다.
[……아셰라, 맞지? 그 흑의 마왕이 맞는 거지? 아니, 지금의 내가 사람을 잘못 볼 리는 없을 텐데? 어, 어어?]
“…….”
숫제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는 소녀의 모습에, 아셰라의 고개는 한없이 깊게 떨구어질 따름이었다.
*****
“그러니까, 스승님께서 한때 난동을 피운 적이 있고, 그에 주변의 피해가 막심했었다고요.”
“……네.”
확인차 묻는 화이트의 목소리에, 아셰라는 마치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물론 과거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난동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한바탕 난리를 일으킨 것이고, 기실 그에 뇌룡이 피해를 입을 줄은 그녀로서도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샤사르에게 속아 넘어간 걸 깨닫고, 그와 의견이 처음으로 갈려 한 차례 맞붙었었죠. 아마 그때 간접적으로나마 피해를…….”
[간접적이긴 무슨! 완전 직접적이었거든! 둘이서 싸운답시고 주변을 아예 깔끔하게 지도에서 지워버린 주제에!]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아셰라가 움찔거렸다.
“……아, 아니.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애초에 12마왕으로서 이름을 올린 것부터가 모두 그에게 속아서─”
[시끄러, 시끄러! 그런 변명을 듣는다고 뭐가 달라져? 어찌 됐든 간에 너는 최악이었어! 아셰라! 뭐, 진짜 미친년이 따로 없이 날뛰던 주제에! 이제와서 점잖은 척이야, 무슨!]
“…….”
이어지는 폭격과도 같은 외침에 아셰라는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그쯤에서는, 진정으로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걸까.
“……스승님.”
“어, 네……?”
화이트가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부른 대상은 아셰라였으나, 바라보고 있는 건 소녀의 쪽이었다.
이내, 화이트가 가라앉혔던 마나를 다시금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냥 제가 지금 당장 저 이상한 사념을 치워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빠져나가도록 하죠.”
굳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고 덧붙이며, 화이트가 살벌한 안광을 번뜩였다.
[……히끅!]
그에 반사적으로 소녀가 움찔거렸으나, 화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마법진을 그려내며, 아공간을 파쇄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갈 뿐.
[……그러고 보면, 너는 도대체 뭐야!]
소녀의 의미 모를 외침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들은 필요조차 없다고 판단했고, 왜인지 모르게 아까부터 무척이나 불길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빠져나간다.’
생각은 그 이후에 해도 좋을 것이다.
천 년 전에 죽었다던 뇌룡의 사념이 존재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게 다였다.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지금 해야 할 건 감탄만이 아니었기에.
눈빛을 가라앉히며, 그저 차분하게 마나를 운용해나갈 즈음이었다.
[이상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놈! 그 아셰라와 함께 왔으니, 분명 밖의 퍼런 놈하고 관련이 있는 거겠지!]
“……뭐?”
그냥 흘려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마법을 완성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화이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소녀에게로 시선을 옮긴 화이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뭐라고 했지?”
[뭐, 뭐?]
그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만 건지, 소녀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랬으나, 화이트는 그녀가 침착을 되찾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말했냐고, 그리 물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소녀가 언짢은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화이트는 그저 집요하게 그녀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퍼런 놈, 이라고요?”
그건 아셰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퍼런 놈이라니, 설마. 아니,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흔치 않게 당혹스러움으로 표정을 물들이며, 그녀가 다급한 어조로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소녀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떼어냈다.
마치 화이트와 아셰라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태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 우리들의 왕국으로 접근하고 있는 퍼런 놈, 내가 그놈의 기척을 눈치 못 챌 줄 알았어? 당연히 너희들도 한패일 거 아니야!]
“……!”
화이트와 아셰라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대화가 맞물리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간격에서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무언가, 일이 터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영역으로 들어왔겠다, 딱 잡아챈 거지!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려! 마왕 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들의 왕국을 노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을 그 퍼런 놈이 물러날 때까지 여기서……!]
쩌어어엉!
[……꺄악?!]
소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한 차례 무언가가 깨뜨려지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화이트와 아셰라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벌어진 공간의 틈으로 몸을 던지며, 아셰라가 슬쩍 고개를 틀어 소녀와 눈을 맞췄다.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에요. 저희는 마도왕국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대가 말한 마왕의 존재도, 이제와서 눈치챈 겁니다!”
[뭐, 뭐……?]
소녀가 기겁하며 떨리는 손을 애써 뻗어보았으나, 이미 화이트와 아셰라는 공간 밖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슨,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답답함과 초조함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