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청의 마왕
“……알고 있겠지만, 이건 따지자면 심각한 중죄야.”
칼이 내뱉었고, 그에 화이트가 몸을 움찔거렸다.
아셰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뻘쭘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단을 물리고, 국왕 전하께 보고가 올라가는 걸 막고. 내 고생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군.”
“……음.”
얕게 침음성을 흘리며, 화이트가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렸다.
“고맙게 생각한다. 신세를 졌어.”
“……그게 다인가?”
칼이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도 않으며 되물었으나, 그럼에도 화이트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그의 도움으로 일이 커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
감사 인사를 하라면, 몇 번이고 더 하는 게 옳을 터였다.
화이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고, 그쯤에서 칼이 한 차례 더 타박하듯이 입을 열었다.
“관광이 하고 싶었으면 연락을 하지 그랬나. 내게 말했더라면 여러모로 편의를 봐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말은 진심이었다.
검문이나, 그 이외의 요소들에서 간단한 도움을 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 누가 남의 왕국의 도시에, 그것도 수도의 상공을 뛰어넘어 침입을 시도하는가.
하물며 그 의도가 진정으로 관광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더욱 우스웠다.
‘……그것도 그렇지만, 포탑의 공격을 버틴 것도 놀랍기 짝이 없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칼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포탑의 개발에 깊게 관여한 칼이었기에, 그 위력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7서클 급의 배리어로는 한 번의 포격조차 막지 못할 터.
“…….”
칼의 눈동자에 화이트와 아셰라의 모습이 담겼다.
……나오는 결론은 단순했다.
눈앞의 두 어린 소년소녀가, 최소 8서클 이상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딱히 어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기에, 경탄했다.
놀라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장 마법 대전 당시 칼을 일방적으로 압도한 게 바로 화이트였지 않은가.
그렇기에, 7서클의 끝자락에 도달했으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설마 그 이상이었을 줄은 차마 예상치 못했다.
‘그게 아니면, 소년이 아니라 소녀의 쪽인가.’
살며시 미간을 좁히며, 칼이 아셰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마치 관찰하듯이 아셰라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
그리고 그러한 시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이내 곧 화이트가 제지에 나섰다.
“…….”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슬쩍 발을 내디디며 아셰라의 앞을 슬며시 가로막을 뿐.
숫제 노골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태도에, 칼이 한 차례 헛웃음을 내뱉었다.
“뭘 그리 경계하나. 예전에도 말했지만, 내게는 약혼자가 있다.”
“…….”
“못 본 사이에 말이 더 줄어들었군.”
어깨를 으쓱이며, 칼이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이내 몸을 돌리고는 칼이 앞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도록. 그래도 연이 없지는 않은데, 도시의 안내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음.”
숫제 시원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만한 흔쾌한 태도, 그에 화이트가 살짝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별달리 따르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기에.
한 차례 아셰라와 시선을 교환한 후, 화이트가 천천히 칼의 뒤편으로 따라붙었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너무 허술한 건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일 텐데.”
그 자신과 아셰라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상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칼이 슬쩍 고개만 틀어 화이트와 시선을 맞췄다.
“뭐, 진실되게 안 좋은 의도로 잠입하고자 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이가 아닌가. 이 정도는 태자로서의 권한으로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있어.”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 부분이다, 칼 폰 아지다하카.”
“음?”
즉각 돌아오는 반문에 칼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한 눈짓에, 한 차례의 한숨과 함께 화이트가 말을 이어나갔다.
“안면이라고 해봤자, 고작해야 마법 대전에서 한 번 마주친 정도가 다일 텐데. 지나치게 안일한 건 아니냐는 말이다.”
“…….”
칼이 침묵했다.
걸음을 슬며시 늦추며, 그가 몸을 홱 틀어 화이트와 제대로 눈을 마주했다.
잠깐 꺼낼 말을 정리하는 듯이 턱을 쓸다가, 이내 칼이 재차 입술을 떼어냈다.
“뭐, 별문제는 없겠지. 안일하다면 안일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눈을 믿는 편이니까.”
피식 웃으며 내뱉는 칼의 모습에 화이트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지나친 믿음이었다.
물론 화이트로서도 무언가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한 왕국의 태자로서 가질 만한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어라 강하게 한마디를 하고자 했으나.
“뭐, 다 차치해 두고 말이다.”
“……?”
칼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얕게 웃음을 흘리며, 의미심장한 시선을 화이트에게로 보낸다.
“그 상황에서 내가 마법사단을 멈춰 세우지 않고 그대들을 지하 뇌옥에 가두려고 했다고 한들, 순순히 잡혀줄 생각은 없었을 테지?”
“…….”
이내 칼이 그리 내뱉자, 화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실,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는 말이었던 탓이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상황을 전투로 이끌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화이트는 순순히 잡힌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여유는 없었고, 애초에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으니.
여의치 못해 마법사단을 다 쓸어버렸으면 쓸었지, 역으로 잡히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터.
‘……틀린 말은 아닌가.’
이내 화이트는 혀를 차면서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래저래 불평불만을 내뱉을 입장은 아니었다.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마당인데, 더 이상 무어라 왈가왈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우.”
얕게 숨을 고르며, 화이트가 살며시 고개를 까딱였다.
“말이 길어졌군. 아무튼 고맙게 됐다, 칼 폰 아지다하카.”
차마 고개를 숙이지는 못할 것만 같아서, 의도적으로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감사 인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뻣뻣했으나, 그래도 말을 내뱉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칼 역시 알고 있던 바였기에.
호쾌한 미소를 띠며, 그가 화이트와 아셰라에게 한 차례씩 눈짓을 했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어찌 되었든, 우리 측의 포탑 탓에 그대들이 죽을 뻔한 건 명실상부한 진실이니까.”
그러면서, 그가 다시금 몸을 돌려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살짝 시선을 교환하는 화이트와 아셰라.
“……크흠.”
“으음.”
차마 무어라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칼은 나름대로 그 자신들의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그런 그의 면전에 대고, 일말의 위협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그렇기에, 우선 입을 꾹 다문다.
굳이 그에 관해서 말할 이유는 없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화이트와 아셰라는 침묵을 택했다.
“자, 그럼 어디가 좋을까. 혹, 우리들의 마도공학 기술에 관해서 궁금하지는 않나? 일정 부분이라면 충분히 견학도 시켜줄 수 있는데.”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칼.
그런 그를 향해, 화이트가 애써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흥미가 돋긴 하는데. 포탑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신선했고.”
조금은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라고는 일절 담겨 있지 않은 듯했으나,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칼은 그러한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
“준비는, 어디까지 되었지?”
푸른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물음에, 부복하고 있던 여인이 조심스레 대꾸했다.
“거의 끝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신다면, 진군은 완벽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확신이 섞인 목소리였으나.
“……흐음.”
그러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런 여인의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걸까.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에 여인이 몸을 살짝 움찔거리는 것은,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사내로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여인으로서는 무척이나 견디기 버거운, 그런 적막이었다.
“뭐, 상관없을 터.”
이내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 즈음에는, 이미 여인의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착실히 진행되어 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감사합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개는 깊게 숙인다.
그런 여인의 모습을 한 차례 흘기는 사내, 이내 그가 천천히 그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질적인 청발과 청안이 햇볕을 받아 흐릿하게 번쩍였다.
“……샤사르는 대기하라 했지만, 내가 굳이 그에 따를 이유는 없지.”
얕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놀랍도록 싸늘한 기색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12마왕의 이름을 무시한 죄는,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이다.”
쿠구구구-
그리 내뱉는 것과 동시에, 그의 마나가 주인의 의지에 따라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압박감을 받아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그의 앞에서 부복하고 있던 여인이었다.
“……!”
몸이 파르르 떨린다.
자연스럽게, 마치 야생의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 동물이 되기라도 한 듯이.
지극히 본능적인 작용이었다.
그러한 반응에 수치심을 품을 틈조차 없었다.
그저 깊게, 더욱더 깊게 고개를 푹 숙일 따름이었다.
“준비해라.”
이윽고 사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숫제 섬뜩한 기색으로, 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나의 군세가 첫 번째로 짓밟을 곳은, 다름 아닌 마도왕국이 될 것이다.”
마치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내뱉으며, 그가 살벌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그런 사내의 말에 그저 무조건적인 복종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끝내 여인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으며.
이어서, 무척이나 공허한 목소리로 여인이 사내의 정체를 입에 담았으니.
“……모든 것은, 청의 마왕께서 바라시는 대로.”
청의 마왕, ‘야라크’.
무력으로는 그 적의 마왕의 바로 뒤를 잇는다는, 12마왕의 이인자.
그가 번뜩이는 안광으로 바라보는 끝자락에는, 마도왕국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