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정체불명의 핏자국
“뭐 하고 있나요? 제자님.”
아셰라의 물음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화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요?”
“네. 에드발트 경에게는 그래도 소식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끊으며, 화이트가 조금은 무안한 기색으로 깃펜을 움직였다.
“당장 12마왕과의 전쟁이 선언된 마당에, 제가 이렇게 빠지는 것도 문제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음.”
아셰라가 침음성을 흘렸다.
화이트의 말에서 약간의 씁쓸함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화이트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제자님이 바란다면, 제도로 돌아가도 좋아요. 대륙의 정세가 정세이니만큼, 이렇게 마냥 휴식을 취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겠죠.”
그리 말하고는, 아셰라가 애써 표정을 다잡으며 화이트를 올려다봤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 묘하게 걱정하는 듯한 시선에, 화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대규모의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을 테고, 어느 정도는 시간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게다가, 적어도 지금 제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아셰라의 걱정스런 말을 잘라내며, 화이트가 옅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이내 아셰라를 향해 슬며시 손을 뻗는 화이트.
“제자님……?”
갑작스레 손을 맞잡아오는 화이트의 행동에 아셰라가 의아함을 표했다.
화이트는 그런 그녀를 그저 지그시 바라볼 따름이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쳐져 있는 와중이었다.
화이트가 평온한 어조로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과 보내는 시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리고 그런 평온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아셰라는 그 말에 얼굴을 화악 붉힐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화이트의 한마디, 그러나 그 한마디에 담긴 감정은 결코 얕지 않았다.
아셰라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자신의 제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잘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각해보았으나, 의미 있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원래부터 조금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말투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건 이러한 종류의 말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이었다.
절대 이렇게 그녀로 하여금 낯을 붉히게 만들 만한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읏.”
이내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각에, 아셰라가 조심스레 시선을 피해냈다.
화이트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러면서, 약간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금 입술을 떼어낸다.
“부끄러운 겁니까? 새삼스레. 서로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스승님.”
“……예?”
그리고 그렇게 내뱉어진 말에는, 아무리 아셰라라 해도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당혹스러움을 차마 감출 수가 없었으니.
아셰라의 두 눈이 멍하니 깜빡거렸다.
그러나 이내 곧 그 말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가, 이내 다시금 붉은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자님!”
짐짓 화난 태도로 바락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그럼에도 화이트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의 심정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그저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
아셰라가 입술을 깨물며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굳이 그렇게, 그렇게 오해할 만한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나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셰라의 사나운 눈빛에도, 화이트의 태연자약함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능글맞게 아셰라의 말을 흘려넘겼다.
“뭐, 제 말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길래 그러는 겁니까? 이 제자는 스승님께서 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하는 건지 알지 못하겠네요.”
“……윽!”
오히려 역으로 아셰라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한다.
아셰라의 얼굴이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잘 익은 사과와도 같은 모양새로.
그리고 그 종점에는, 화이트의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님도 참, 그렇게 안 보여도 은근히 음험한 구석이 있으십니다.”
“…….”
단순한 한마디였다.
그랬으나, 쉽게 넘길 수는 없는 한마디였다.
아셰라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와중에도, 화이트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께서 그 어떤 이상한 생각을 하셨더라도, 저는 존중해드릴 수 있습니다.”
“…….”
“뭐,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남사스러운 생각이었겠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화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충 어지간히도 부끄러워하고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화이트가 슬쩍 고개만 돌려 아셰라를 바라봤다.
“아.”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예상했었던,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고 있는 아셰라가 아닌.
“……제자님.”
무척이나 냉랭한 표정을 띤 채로, 그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는 아셰라의 모습을.
화이트는 직감했다.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그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리 놀렸을 뿐인데, 아무래도 자신의 스승은 그 놀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스승님? 그냥 장난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애써 아셰라를 향해 내뱉어 보았으나.
“…….”
“……스승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눈빛이 더욱 서늘하게 바뀌었을 뿐.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만 된 상황이었다.
화이트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려, 지면에 조심스레 닿을 즈음이었다.
우웅-
아셰라가 마나를 움직였다.
동시에, 그 자신의 완드를 꺼내 든다.
“제가 요즘 너무 교육에 무심했죠?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장난스러운 구석이 남아 있었네요.”
내뱉으면서, 아셰라가 그 표정 위로 섬뜩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기색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은 화이트였기에.
“……스승님, 일단 진정하시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애써 그녀를 진정시켜보고자 했으나.
“늦었어요, 제자님.”
아셰라는 그저 환한 눈웃음을 그려 보일 뿐이었다.
화이트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살벌하게 느껴지는 그런 눈웃음이었다.
“오늘, 오랜만에 저한테 좀 맞아볼까요?”
아셰라가 가학적인 느낌으로 싱긋 웃음을 흘렸고, 그 직후였다.
쿠구구궁-
그녀의 완드에 가공할 만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
그리고, 화이트는 생각했다.
당장 시간 마법을 사용해서, 조금 전의 어리석었던 그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뒤에 돌아오자고.
……그랬으나.
당연하게도 그러한 생각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아셰라의 완드가 내리그어지는 것과 동시였다.
콰아앙!
화이트는 정수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대한 중압감에 저릿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프리드리히, 표정이 좋지 않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측면에서 들려온 음울한 음성에,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돌렸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어느새 황궁 생활이 완전 익숙해진 한 리치가 눈에 들어왔다.
“……루시펠인가.”
낮게 내뱉으며, 프리드리히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군.]
그 반응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을까.
루시펠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프리드리히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건……?]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앞에 놓여 있는 하나의 편지를.
“화이트에게서 온 편지다.”
[화이트에게서……?]
프리드리히의 말에, 루시펠이 검은 안광을 번쩍이며 재빠르게 편지로 손을 뻗었다.
반쯤 뺏듯이 편지를 낚아챈 그가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당장 마법 대전과 축제가 끝을 맺고, 모습을 감춘 화이트였기에.
루시펠로서는 그런 그 소년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기가 시기이기도 했고, 혹여 안 좋은 일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편지가 왔다는 건, 곧 적어도 무사하긴 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흠, 흐음.]
그에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가던 루시펠, 그러나 이내 그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지?]
내용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저 잠시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왔을 뿐이었으니까.
그 이외에는 쓸데없는 안부 인사가 전부였으며, 적어도 루시펠은 그러한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그건 편지의 내용에 있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글귀가 적혀져 있는 양피지에 묻어 있는 어느 정체 모를 붉은 액체에 있었으니.
[피가 아닌가.]
“그렇지.”
루시펠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고, 그에 프리드리히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그 부분에서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어찌하면 편지지에 피가 묻게 된단 말인가.
처음에는 크게 상처라도 입은 건가 싶었으나, 내용에서부터 느껴지는 평온함은 그 추측이 틀렸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뭐지?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
루시펠이 의아함에 연신 해골 바가지를 갸웃거렸고, 프리드리히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여러 추측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흐음.]
“……으음.”
그리고.
……두 대마도사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차마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지조차 못하였다.
화이트가 보내온 편지.
그 편지지에 묻어 있는 자그마한 핏자국이, 다름 아닌 교육이란 명목하에 이루어진 아셰라의 일방적인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진정한 의미로, 두 대마도사는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