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7)호칭
“제자님이 말한 것처럼, 한동안은 그들에 대한 건 잊고 지내도록 해요.”
아셰라가 말했고, 그에 화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12마왕에 관한 일을 잠시간 잊자는, 그 말 자체에는 동조하는 바였기에.
……그렇지만.
“……그, 아셰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었던 걸까.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화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그리고 그런 화이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셰라는 태연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 태도에 잠시 머뭇거리던 화이트,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입술을 떼어낸다.
“……호칭, 말입니다.”
“네?”
두 눈을 한 차례 깜빡이며 반문하는 아셰라를 향해, 화이트가 조금은 붉어진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계속 이름으로 불렀으면서, 왜 이제 와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거죠?”
“아.”
무척이나 힘겹게 뱉어내는 말, 그에 아셰라가 손뼉을 쳤다.
동시에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리며 환한 미소를 그려낸다.
화이트의 근처로 다가가며, 아셰라가 장난기가 묻어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신 건가요?”
“……그건.”
날아오는 질문에 화이트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 직구로 날아오는 질문에, 대체 무어라 대꾸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말하자니 그 후폭풍이 두려웠고,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자니 영 석연치 않았다.
그에 자연스레 화이트가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으며, 아셰라의 미소는 점차 진해져만 갔다.
“제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면, 그렇다고 말해요.”
“……예?”
와중 재차 들려온 아셰라의 목소리에, 화이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 말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아셰라가 말을 이었다.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다고,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저한테 매달리듯 애원하면, 어쩌면 들어줄지도?”
“…….”
그리고 그 말에는, 아무리 화이트라고 해도 순간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워낙 중요한 일들이 많이 벌어져서 그런가, 한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성향이 재차 발동된 것만 같았다.
화이트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며 입을 열어 대답을 꺼내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굳이 이름으로 불릴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네? 뭐라고요?”
싱긋 웃으며 반문하는 아셰라.
그러나 화이트는 그 미소가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
무어라 다시금 입을 열지는 못한 채로, 화이트가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셰라는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
“자, 어서 말해봐요. 제가 특별히 제 이름을 부르는 건 허락해드렸잖아요? 그러니 이제는 제자님이 제 말에 따를 때랍니다.”
“…….”
“얼른?”
이어지는 재촉.
화이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셰라의 눈빛은 점점 집요하게 바뀌어 갔으니.
“안 할 건가요? 정말로?”
소악마의 그것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셰라가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점차적으로 좁혀져 오는 아셰라의 포위망, 그리고 그에 제대로 걸려든 그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이트는 속으로 자책했다.
그녀에게 빌미를 준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
화이트가 아셰라를 슬며시 바라봤다.
흘기듯이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쳐다보며,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끔.
아주 미세하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린다.
현재의 상황이 난감하고 곤란한 건 둘째치고, 속으로는 또 그런 생각을 품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그녀가 이 이상으로 죄악감에 잡아먹히지 않아서, 없어진 시간대의 그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서.
무척이나 안심했고, 동시에 더없이 다행이라고.
그런 속내는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떠오르는 미소만큼은 막아낼 수 없었다.
“하하…….”
끝내 화이트의 입술을 비집고 얕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뭔가요?”
아셰라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왜 웃는 걸까요, 제자님?”
그러며 동시에 화이트를 향해 묻는 그녀.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눈동자로 아셰라를 담아내며,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승님.”
어느새 호칭은 원상태로 되돌아온 채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 부르는 화이트도, 그렇게 불리는 아셰라도.
두 사람 모두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아마 금방.
다시금 서로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를 순간이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 순간이라는 건, 아마도.
분명──
*****
쿠웅!
대륙의 북쪽 끝자락, 그곳에 존재하는 마왕의 고성.
그곳에 두 남녀가 붉은 광휘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 마왕 샤사르, 그리고 자색의 마왕 바이올렛이 그들의 정체였다.
휘오오오-
부자연스러운 삭풍이 불어오며, 두 마왕의 머리카락을 허공에 휘날리게끔 만들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미안해요, 샤사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깊게 숙이며, 그녀가 샤사르를 향해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제 실책이에요. 설마하니 타락의 술식이 들킬 줄은.”
“……흐음.”
바이올렛의 말에 샤사르가 한 차례 묘한 비음을 흘렸다.
시선만 살짝 들어 올려, 그런 샤사르의 눈치를 살피는 바이올렛.
그가 분노했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생각 외로, 그는 분노를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물론, 원래 감정을 쉽사리 밖으로 드러내는 사내는 아니긴 했지만.
적어도 바이올렛은 알 수 있었다.
지금 현재, 샤사르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바이올렛은 떠올렸다.
……흑의 마왕 아셰라와, 그런 그녀의 제자라는 한 소년의 존재에 대해서.
“…….”
자연스레 몸이 한 차례 흠칫 떨려온다.
두려움에 의한 반응이었으나, 애써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샤사르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바이올렛이 고개를 숙인 채로 샤사르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바이올렛, 그거 알고 있나?”
“……예?”
샤사르가 돌연 전조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고, 그에 바이올렛이 의아함이 섞인 반문을 해냈다.
샤사르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셰라는 원래 남과 깊은 관계를 맺는 여자가 아니지. 하물며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던 부하인 세르피아 역시, 그녀에게 크나큰 의미를 가지진 못했어.”
물론 그나마 가장 깊은 사이긴 했지만.
그리 덧붙이며, 샤사르가 한쪽 입꼬리를 섬뜩하게 끌어올렸다.
“……그런 아셰라가, 제자를 만들었다. 그것도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로 말이지.”
이어서 그가 떠올리는 광경은, 그 자신이 화이트 클리포트라는 이름의 소년의 목을 붙잡았을 때였다.
정확하게는, 그 순간의 아셰라가 지었던 표정이었다.
“……하하, 그렇게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모습은 나도 몇 번 못 봤는데.”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샤사르가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눈빛은, 그 붉은 동공은 어느새 짙은 열망으로 번뜩이고 있는 채였다.
“단순한 블러프가 아니었어. 만약 그 순간 내가 그 소년의 목을 꺾었더라면, 아셰라는 필시 나를 죽이려 들었을 거다.”
“…….”
침묵하는 바이올렛.
일단은 그 시점에서 기절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그저 얌전히 듣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무언가 의미 있는 반응을 기다리던 건 아니었는지, 샤사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여러모로 체면을 구기는군. 고작해야 제국의 황제 따위가 나에게 전쟁을 선포하질 않나. 기껏 마주친 아셰라를 붙잡긴커녕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니…….”
잔잔하게 흘리던 웃음은, 점차 광기를 맺어가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의 고개가 더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요하게 중얼거리는 샤사르.
그의 전신에서부터 점차 붉은 기운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콰르르르르르릉!
줄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붉은색의 마나는, 이윽고 적색의 벼락이 되어 사방을 거칠게 강타했으니.
“…….”
샤사르의 적안이 깊게 침체되기 시작했다.
“12마왕 전원을 소집한다. 저번의 회담에 응하지 않았던 놈들도 끌고 와. 오지 않는 놈들은 내가 직접 목을 치겠다.”
그리고 이내 내뱉어진 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바이올렛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바이올렛이 그리 대답한 직후였다.
후욱!
한 차례의 붉은 섬광과 함께, 샤사르가 한순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
혼자 남게 된 바이올렛이 입술을 짓씹듯 깨물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차례, 단 한 차례였다.
샤사르가 번개를 흩뿌린 것은.
그러나, 그랬으나.
……고작 그 한 차례의 번개에, 사납게 내리꽂힌 적색의 벼락에.
고성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게 황폐하게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후우-
짤막하게 숨을 내뱉고는, 바이올렛이 눈가를 짓눌렀다.
우선, 그가 시킨 대로 12마왕의 전원을 소집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의 명에 따르는 것이었으니.
“……피바람이 불겠군요.”
이내 그리 중얼거리는 바이올렛의 표정 위로는, 아주 약간의 불안감이 떠올라 있었다.
……어째서인지, 지금껏 있었던 일들과는 다르게.
이번만큼은 마냥 샤사르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될 것 같지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