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5)사랑해요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나 힘이 빠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슬며시, 약간의 안정을 되찾은 기색으로.
비에 젖은 지면에 옷이 적셔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셰라가 먼저 지면에 손을 대었고, 이어서 화이트 역시 자세를 낮춘다.
“…….”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셰라는 아직까지 조금 멍한 표정이었고, 화이트는 그런 그녀를 조심스레 살필 따름이었다.
어딘가 더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아직까지 그 광경을 두 눈에 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잡다한 걱정들을 품으며, 화이트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조금, 진정이 됐습니까?”
화이트가 물었고, 그에 아셰라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물었으나,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네, 괜찮아졌어요.”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그리며 내뱉는 대답이었다.
무척이나 작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미소였다.
화이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동시에,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명백한 분노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고.
‘……감히.’
왜, 혹은 어째서.
이런저런 의문은 많이 떠오르는 와중이었으나, 그럼에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증오였으니.
화이트의 표정이 미세하게나마 일그러졌다.
‘왜, 그녀에게 다시금 그 광경을 보여주었지?’
참을 수 없는 격정이 전신에서부터 묻어나오려 했으나, 아셰라가 아직까지 눈앞에 있었기에 애써 감정을 내리누른다.
그러나, 그런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속으로 억눌렀기에, 그랬기에 더더욱 증오와 원망은 깊어져만 갔다.
……어째서 그녀, 아셰라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안겨주었는가.
오직 그 의문뿐이었다.
시간에 간섭하는 마법을 사용한 건 그녀가 아니지 않나.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시간에 간섭한다는,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마법을 행한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왜 시간은 그녀에게 죄를 묻는가.
어째서 자신에게로 향해야 할 부작용이 그녀에게로 향했는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분노는 끝을 모르고 더욱 확장되어 간다.
“…….”
그리고, 그렇게 화이트가 애써 속으로 격렬한 분노를 감추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셰라는 줄곧 그런 화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하게 떨리고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조금 전과 같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던 위태로운 눈빛은 아니었다.
화이트가 아차 하는 심정으로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에게 자신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불안정하지만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친다.
“……화이트.”
그쯤에서, 아셰라가 드디어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묘한 기색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해했어요. 화이트가 겪고 온 게 무엇인지,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말하면서, 그녀가 한 차례 허탈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만 전해 들었다면, 약간은 의아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당장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기에.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다 보니 화이트가 말한 그 미래의 편린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으나, 그럼에도 한결 후련한 감정도 없잖아 있었다.
아셰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거군요.”
그러면서 내뱉은 말에는, 격심한 자괴감과 죄악감이 어려 있었으니.
화이트가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닙니다. 말했지만, 당신이 고통받을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원해서 한 게 아니고, 그렇기에 그 죄를 감당해야 할 건 당신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품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런 말을 내뱉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매달리듯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거칠게 이를 악물었다.
……결국 분노는 더욱 그 크기를 불려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 조금 변경되었을 뿐.
‘……샤사르.’
모든 일의 원흉인 적의 마왕을 떠올리며, 화이트가 사납게 안광을 번뜩였다.
……역시 죽였어야 했다.
못 죽이더라도, 죽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그때, 바이올렛과 함께 그 심장과 목을 꿰뚫어버렸어야 했는데.
“…….”
으득-
작게 이를 갈며, 화이트가 표정을 구겼다.
동시에, 다짐한다.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반드시.
전력을 다해, 사력을 다해.
……그녀를 지켜내겠노라고.
막상 시간을 다시금 되돌리겠다느니, 그딴 소리를 지껄이긴 했지만.
진정으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첫 번째 회귀는 그저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던 탓에,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걷게 된 길이었다.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고, 더 이상 폭주하는 아셰라를 막아설 자가 자신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랬기 때문에 내렸던 선택이었고,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녀와의 기억을, 그녀와의 추억을.
또다시 초기화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라 해도 좋았다.
그저 이기심에 물든 선택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건, 아셰라와 함께하는 평온한 삶일진대.
……시간을 되돌린다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었다.
“…….”
짓씹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화이트가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재차 시선을 들어, 아셰라를 바라본다.
그래도 살짝은, 아주 살짝은 편해진 낯빛으로 그녀가 화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아셰라가 나직하게 내뱉는다.
“……화가 많이 난 걸로 보이는데.”
“……!”
화이트의 몸이 순간 흠칫거리며,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그러나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한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런 일 없다고 말하는 듯.
“……아닙니다.”
화이트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고, 그에 아셰라의 눈빛이 한층 더 집요하게 바뀌었다.
“아니잖아요. 지금 화내고 있는 거잖아요. 그 대상이 저는 아닌 것 같지만.”
“…….”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아셰라가 말을 이어나갔다.
“제자님이 털어놓은 얘기로 추측하자면, 아마 샤사르에 대한 분노일까요.”
이내 아셰라의 입에서 샤사르의 이름이 나오자, 화이트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셰라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 시선은 줄곧 화이트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
잠깐의 침묵.
화이트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런 침묵이 흘러갔다.
아셰라는 대답을 요구하듯,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화이트를 직시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화이트는 끝끝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야만 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가 모든 일을 계획했고, 당신이 고통받은 것도, 세계가 멸망을 맞이하게 된 것도 전부 그의 탓이라고.”
“…….”
아셰라가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고, 그에 화이트가 슬며시 분노를 드러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제가 죽일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 거라고.
진심을 담아 그리 덧붙이며, 화이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
또 한 차례, 침묵이 흘렀다.
화이트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아셰라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눈빛을 띠고 있는지.
볼 자신이 없었다.
그저, 그저 착잡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녀가 그 광경을 보게 될 줄 알았다면.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이고, 비밀이고, 감춰왔던 걸 그대로 쭉 이어나가며, 그녀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짓 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는 걸 잘 알았던 탓이었다.
“화이트.”
“……예.”
아셰라의 부름에 대꾸한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영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마치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화이트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
그리고.
……그리고, 화이트는 보지 못했으나.
그런 화이트를 바라보는 아셰라의 얼굴 위로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어딘가 서글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절 걱정하는 건 잘 알겠어요. 화이트는 그런 사람이니까.”
“…….”
대답하지 않는 화이트를 바라보며, 아셰라가 조금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뱉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한마디를.
화이트의 눈이 슬며시 크게 뜨이며, 천천히 고개가 들어 올려진다.
표정 위로는 감출 수 없는, 명백한 걱정이 묻어나오고 있는 채였다.
그에 아셰라가 살며시 눈웃음을 그려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힘들긴 해요. 죄악감이 가시가 돼서 전신을 사납게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셰라.”
화이트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야말로 그 이상이 없을 정도의, 격심한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화이트.”
그런 화이트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으며, 아셰라가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괜찮아요.”
단순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내뱉는, 공허한 울림이 담긴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었다.
화이트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서 분명한 진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내 아셰라가 뻗은 손이 화이트의 새하얀 뺨에 닿는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화이트가 있으니까.”
“……!”
그리고 이윽고 내뱉어진 말에, 화이트는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뜰 수밖에 없었으니.
“……아셰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당장 죄악감에 집어 삼켜질 것 같지만.”
화이트의 부름에는 답하지 않으며, 할 말을 이어나간다.
한 차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속으로 감춰두었던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는다.
“……견딜 수 없는 진실을 맞닥뜨렸다 해도, 화이트가 있다면.”
“…….”
“저는 괜찮아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직감이 들었거든요.”
이어 잠시 간격을 두고 말은 끊는 아셰라.
그녀의 선명한 금빛 눈동자에, 심히 당황한 듯한 모습의 화이트가 담겼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나요?”
아셰라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고, 그에 화이트가 두 눈을 멍하니 깜빡이며 침묵했다.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무슨 의미, 냐고.
무엇이?
그러니까, 자신은 괜찮다는 그 말을 가리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있으면 버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나, 애초에 대답을 바라지는 않은 것일까.
조금은 아련한 미소와 함께, 잠깐의 기다림을 끝내고 아셰라가 재차 입을 열었다.
“간단해요, 무척이나.”
천천히, 아셰라가 화이트의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반쯤 그에게 몸을 맡기듯이, 혹은 기대는 듯한 형태로.
화이트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으나, 아셰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민하지 않을게요, 괴로워하지도 않아요.”
화이트의 반응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아셰라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쳐져 있는 채였다.
“화이트가 그걸 바란다면, 이겨내 보도록 노력할게요.”
“……아셰라.”
“이제는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어요?”
화이트의 부름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로 화답하며, 아셰라가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는다.
“……사랑해요, 화이트.”
“……!”
화이트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순간적인 반응이었고, 마치 그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상관하지 않으며, 아셰라는 환한 미소와 함께 화이트에게로 안겨들 따름이었다.
화이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으며, 그녀가 진심을 담아 웃었다.
그야말로, 그 순간만큼은 걱정을 깔끔하게 지워버린 듯이.
그리고, 진심을 담아 중얼거린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어요, 이건 제 진심이에요.”
그 화이트로 하여금, 한순간이나마 멍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한마디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