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2)착한 아이는 잠에 들 시간
“결국 전쟁인가요.”
황궁, 클리포트 가문의 저택.
화이트의 방에서, 아셰라가 침대에 몸을 눕힌 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화이트의 눈동자가 살며시 진지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턱을 한 차례 쓰는 화이트.
이내 그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연다.
“……제국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아셰라가 시선만 돌려 화이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기색이 담겨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화이트의 표정 역시 살짝이나마 굳어진다.
“어쩔 수 없는 전개입니다. 이미 12마왕과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요.”
“알고 있어요, 그런 건.”
고개를 끄덕이며 아셰라가 긍정을 표했다.
그랬으나, 역시 무언가 걸리는 듯 굳어진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화이트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아셰라의 옆에 걸터앉았다.
자연스레, 누워 있는 아셰라가 화이트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형성됐다.
“……그러고 보면, 제자님.”
“듣고 있습니다.”
화이트의 대답에 아셰라가 살며시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무언가 떠오른 것일까.
그녀가 약간은 짓궂은 느낌을 주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마법 대전, 결국 우승했네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게 의미하는 바는 조금 달랐다.
속뜻이 있다는 얘기였다.
화이트가 살며시 손끝을 움찔 떨었다.
“……예, 그랬죠. 결국 필요도 없는 고대 문명의 스태프를 받는 걸로 끝났지만.”
“왜 끝이라고 생각해요?”
아셰라가 즉각적으로 대꾸했다.
“……예?”
화이트가 순간적으로 두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혹은 알아들었음에도, 일순간 당황하고 만 것일까.
알 수는 없었으나, 아셰라는 그저 그런 화이트를 바라보며 장난기가 서린 미소를 그려내 보일 뿐이었다.
“우승하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약속했는데.”
“……아.”
“설마, 잊은 건 아니죠?”
아셰라가 살짝은 토라진 듯이 볼을 부풀렸고, 그에 화이트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스승님.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흐흥.”
한 차례 묘한 비음을 흘리는 아셰라.
이내 그녀가 기분이 좋아진 기색으로 몸을 슬며시 비틀었다.
“그럼 됐어요. 기억하고 있다니, 얘기가 빨라지겠네요.”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최적의 자세를 찾고자 하는 아셰라.
“……크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화이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장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는, 그 자신이 매일 밤 수면을 청했던 장소였으니.
그런 곳에서 아셰라가 몸을 눕히고 있는 것이다.
당혹스럽다면 당혹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조금은 부끄럽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중요한 건, 현재 화이트가 아셰라를 지극히 심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부분에 있었다.
“……흐응.”
……그리고, 그러한 화이트의 감정을 아셰라 역시 눈치채고 있었으니.
아셰라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었다.
눈웃음을 만들어 내며,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당연하게도, 화이트가 있는 쪽을 향해.
“……!”
이내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따뜻하다면 따뜻한 온기가 손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진다.
어쩌면 심장 박동까지도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게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품으며, 화이트가 한 차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어떤 마왕을 상대할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긴장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애초에 그 긴장의 형태가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맞닿은 손을 떼지는 않은 채로, 화이트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냈다.
“……소원, 말입니까.”
“네, 뭐. 제게 바라는 소원 같은 거, 있지 않나요?”
아셰라가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었다.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이었으나, 그와 반대되게 화이트는 연신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채였다.
그런 스스로가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후우.”
한 차례 숨을 고르며, 화이트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강제적인 수법이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에.
우웅-
마나를 운용해 전신을 감싸, 화이트가 반쯤 억지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내 흔들림이 없어진 눈동자로 아셰라를 직시한다.
아셰라 역시 그런 화이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올곧게 서로를 마주 보며, 두 사람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분위기가, 점차적으로 묘한 기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밤이 무르익은 시간대.
구름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달빛은, 창가를 통해 은은한 광휘를 비춘다.
화이트와 아셰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맞닿았던 손은, 어느새 맞잡는 형태로 바뀐 지 오래였다.
“……스승님.”
“네, 듣고 있어요.”
화이트의 부름에 아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답을 들으며, 화이트가 조금은 쑥스러운 듯이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종류의 말이었고, 그렇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끝내 내뱉고자 한다.
하고 싶은 말, 하고자 했던 말.
……바랐던 말을,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듣기 위해.
화이트가 살짝은 붉어진 낯빛으로 아셰라를 향해 재차 입을 열었으니.
“이름, 불러도 될까요.”
“…….”
나직하게, 마치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화이트.
혼잣말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크기의 목소리였으나, 아셰라는 그런 그의 말이 귓가에서 바로 속삭여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건 무척이나 달콤하면서도, 그녀로 하여금 어딘가 모르게 야릇한 감각을 느끼게끔 하였다.
아셰라의 금빛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짓궂던 기색, 장난기로 가득 찬 표정은 어느새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 역시 화이트의 낯빛과 비슷하게 붉은색으로 달아오른 상태.
서로가 내뱉는 달뜬 숨결이, 그 소리가.
무척이나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몸이 파르르 떨린다.
긴장이라고 하면 긴장감이라 해도 좋았으나, 조금은 달랐다.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감춰진 감정이 사뭇 틀렸으니.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형태였으나, 굳이 한 가지를 콕 집어내자면.
그건 기대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감정이었다.
화이트도, 아셰라도.
둘 모두가, 똑같은 기색으로, 똑같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이, 눈빛을 야릇하게 바꾸었다.
풀썩-
손은 여전히 꼬옥 붙잡은 채로, 아셰라가 몸을 뒤로 눕혔다.
다리는 살짝 들어 올리며, 눈꼬리를 휘게끔 만들며, 환한 눈웃음으로 화이트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쯤 돼서는, 화이트 역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감정이 요동친다.
슬금슬금, 욕망이 깊숙한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건 화이트도, 아셰라도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아셰라는 그런 화이트의 욕망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마음에 든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제자.
그리고 동시에, 그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이 보내는 감정이 그러한 것이라면.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주고 싶었으며.
서서히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비단 화이트뿐만은 아니었기에.
“……화이트.”
아셰라가 나지막하게 화이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화이트는 그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제자님’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 그 의도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남자로서 보겠다는 의미이리라.
두근, 두근.
……심장이 격하게 박동하기 시작한다.
기껏 마나를 돌려 진정시킨 게 다 소용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심장의 두근거림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화이트도, 아셰라도.
서로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그 움직임을.
그저 온전하게 느끼면서, 기쁘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밤이 늦었네요.”
이내 아셰라가 재차 입을 열었다.
창밖을 슬쩍 흘기는 그녀의 눈동자에 반으로 접힌 달이 담겼다.
“착한 아이는 잠에 들 시간인데.”
쿡쿡 웃음을 흘리며, 농담조로 그리 내뱉는다.
화이트의 표정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농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셰라.”
그렇게 내뱉으며, 은근슬쩍 호칭을 고친다.
아셰라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제가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고 허락했던가요? 제 기억에는 없는데.”
“그래서, 허락 안 해주실 겁니까?”
“후후, 글쎄요…….”
흥미롭다는 듯이, 아셰라가 옅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내 시선은 다시금 화이트에게로 고정된다.
사락-
한 차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화이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한쪽 손으로는 아셰라의 손을 붙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아셰라의 뺨을 쓰다듬는다.
“…….”
조용한 침묵이 방 내부에 내려앉았다.
단지, 그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조용했기에, 마음에 든다고 해도 좋았다.
화이트가 아셰라와 다시금 한 차례 눈을 맞췄다.
시선으로 묻는다.
‘허락’을 구하기 위한 시선이었다.
“……읏.”
그리고 그런 시선에, 화이트의 올곧은 눈동자에.
아셰라가 상당히 붉어진 표정으로, 끝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으니.
……허락하겠다는 의미이자, 수락의 의미이기도 했다.
화이트의 손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셰라의 몸을 살짝씩, 부드럽게 쓸고 지나간다.
아셰라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길에 그저 몸을 맡기며, 슬며시 눈꺼풀을 닫는다.
두근, 두근.
……다시금,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방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건 화이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셰라의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둘 모두의 것일까.
알 수는 없었으나,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품으며.
“……아셰라.”
화이트가 애틋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한쪽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아셰라의 얼굴이 한순간에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달아올랐으나, 그럼에도 손길을 피하지는 않는다.
……바라는 걸까, 혹은 원하고 있는 걸까.
화이트는 그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조금 더 깊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다시금 손을 움직인다.
화이트의 손길이, 이번에는 아셰라의 허리 부근의 옷자락에 닿았다.
사락-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붙잡으며, 화이트가 한 차례 흐릿한 눈빛을 빛냈으니.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될 뿐.
화이트가 망설임을 지워냈다.
그리고.
“──.”
……그, 순간이었다.
우웅-
“……!”
한 차례, 무언가가 울음을 내뱉는 것만 같은 공명음이 울렸다.
화이트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
눈을 감고 있던 아셰라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을까.
한쪽 눈꺼풀만 슬며시 들어 올리며, 그녀가 화이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화이트는, 정작 그런 시선을 받아내며 별것 아니라며 손을 내저어야 할 화이트는.
그런 그녀의 시선에조차 신경 쓰지 못한 채, 표정을 싸늘하게 가라앉히고 있었으니.
“……화이트?”
아셰라가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이트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두운 빛으로 침체됐다.
이내 천천히 손을 움직여, 화이트가 아셰라의 허리 부근을 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절대 그녀에게서 느껴져서는 안 될 기운.
절대 지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알아챌 수 없는 종류의 기운.
따끔-
“……아?”
순간적으로, 허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얕은 고통에 아셰라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
화이트가 이를 악물었다.
……하나하나, 조각이 맞춰져 가는 기분이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이, 몇 가지의 의문이 해소되어간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화이트의 표정은 일그러져만 갔다.
“……스승님답지 않습니다.”
“네……?”
화이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그에 아셰라가 의문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를 화이트가 내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씁쓸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분노가 잠들어 있는 듯한.
그런 시선으로.
“왜, 이런 하찮은 술식에 걸린 겁니까.”
화이트의 눈동자가 서서히 분노의 빛을 띠어간다.
……도대체 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나.
어째서 알아채지 못한 것인가.
이미 한 차례의 실패를 겪은 주제에, 또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화이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 아셰라의 허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마나의 기척이 있었다.
술식이었다.
무척이나 단조로운, 하나의 술식이었다.
……그리고, 그 술식은 화이트가 알고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윽고, 무척이나 괴로운 기색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화이트가 그 술식의 명칭을 입에 담았으니.
“……타락의 술식.”
……도저히 감추지 못한, 명백한 분노의 기색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화이트의 전신에서부터 살기의 형태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