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여운 스승님이 사실은 흑의 마왕이었습니다!-88화 (89/158)

(EP.88)와인 때문일까

8서클, 그리고 9서클에 오른 마법사들에게 술이란 것은 그닥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마나로 둘러싸인 심장, 중첩되어 언제나 거칠게 회전하는 서클은 주인의 몸에 침투하려는 해악을 원초에 차단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기에 취하고 싶어도 취기가 전혀 올라오지 않는 상황이 종종 일어나고는 하나…….

그것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이제 좀 달아오르는 것 같네요.”

“저도, 슬슬.”

어느새 쓰러진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대충 내팽개친 채로, 아셰라와 화이트가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커다란 병에 들어있던 와인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쯤 돼서야 두 사람의 얼굴에도 약간의 붉은빛이 떠오르기 시작하였으니.

“아핫, 웃기지 않아요? 취하고 싶어도 취하지 못한다니, 그만한 족쇄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아셰라의 말에 느끼는 바가 있는지, 화이트가 두어 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감입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또 술을 목 너머로 털어 넣는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가, 전신을 살벌할 정도로 달구는 것만 같은 감각.

그러나 그마저도 잔잔한 쾌감으로 느끼며, 화이트가 눈꺼풀을 슬며시 닫았다.

“…….”

떠올리고 있었다.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분위기에 취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척이나 선명하게, 녹색의 마왕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른다.

그를 죽였던 자신의 청백색 창도, 그 이후 솟아난 두 개의 커다란 빙각도.

반으로 쪼개져 허무하게 그 목숨을 잃은 에멜의 시체까지도.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성취감이라고 하면 성취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씁쓸함이라고 하면 그 또한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 무슨 모순된 말이란 말인가.

솔직히 스스로도 잘 이해를 못하겠어서, 화이트가 한 차례 헛웃음을 픽 내뱉었다.

“후우…….”

얕게 숨을 고르며, 화이트가 아셰라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을 눈치챈 아셰라 역시 달아오른 표정으로 화이트를 바라보는 모습.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고.

이내 먼저 입을 연 건 화이트였다.

“……제국 측에서도 결정을 내렸습니다.”

“…….”

입을 일자로 다문 채 경청하는 아셰라를 향해, 화이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

“12마왕 측의 전력이 상당히 손실되었고, 그로 인해 무력의 저울이 슬슬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국은, 황실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그리 덧붙이며, 화이트가 한 차례 말을 멈췄다.

“…….”

잠깐의 정적.

휙-

그리고 그런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셰라가 완드를 휘둘러 와인이 담긴 병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쪼르륵-

“……아, 감사합니다.”

그 자신의 잔에 붉은 액체가 다시금 담기는 것을 바라보며, 화이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셰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언제나처럼 따스한 느낌만이 묻어나온다.

그에 맞춰 아셰라 역시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으니.

“일단 마시죠, 제자님.”

“그럴까요.”

아셰라의 권유에 따라 화이트가 술잔을 다시금 기울였다.

확실히, 여타 다른 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 느껴진다고.

그리 생각하며, 화이트가 속으로 언젠가 사라졌을 왕실에 대해 위로의 말을 전했다.

‘미안합니다, 왕실의 보물은 지금 이렇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술잔을 향하는 손길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 모순적인 행동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화이트가 다시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직,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스승님은, 어쩔 계획이신지요.”

흔치 않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어투로 화이트가 물었다.

아셰라의 표정 위로 약간은 의미심장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쎄요, 어떨까요.”

말을 끊었다가, 늦지 않게 재차 입술을 떼어낸다.

“당연히 12마왕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긴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금은 씁쓸하고, 동시에 아련한 기색이 그녀의 눈동자 위로 떠오른다.

12마왕.

그 개개인의 강함을 가장 잘 아는 존재 중 한 명으로서, 그녀는 쉽사리 무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국 측의 전력 역시 알고는 있다.

수천 년 동안 존재해왔던 12마왕과는 달리, 그 역사가 그토록 길지는 않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세대의 제국은 상당한 강자들이 집결해 있었기에.

이미 세 명의 마왕을 잃은 12마왕이라면, 제국이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을 경우 나름의 대등한 전쟁이 성립될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긴 하였으나.

“전쟁은 좋지 않아요, 제자님.”

“…….”

이내 아셰라의 입술을 비집고 꺼내진 말은 그야말로 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마디였고.

“……알고 있습니다.”

화이트 역시 부정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어서 입술을 떼어내는 화이트가 꺼낸 말은, 아셰라로서도 쉽게 고개를 가로저을 수만은 없었으니.

“그렇지만, 지금만큼의 기회는 앞으로도 없을 테죠.”

“…….”

“마왕 중 세 개의 왕좌가 그 형태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남은 건 고작해야 여덟. 그들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이번만큼 확실한 기회는 없어요.”

그리고 자신은, 곧 일어날 대전쟁에 있어서 아군 측의 승률이 그리 낮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그렇게 추측한다며, 덧붙이고는.

화이트가 술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군 측, 이라.”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셰라의 눈빛은, 어느새 묘한 이채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제자님에게 있어서 아군이라면, 제국을 말하는 걸까요.”

“……예?”

아셰라가 내뱉은 말에, 화이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한순간이나마 표정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빈틈을 꿰뚫어 보지 못할 아셰라가 아니었다.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힌 채, 그녀가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제국의 뜻과, 제자님의 뜻.”

“…….”

“다르게 말하면 목표라고 표현해도 좋아요. 아무튼.”

입을 일자로 꾹 닫은 채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화이트를 향해, 아셰라가 묘하게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제자님이 바라는 것과, 제국이 바라는 것. 그게 궁극적으로 동일한가요, 정말로?”

“……스승님.”

“제대로 대답하세요, 화이트. 저는 지금 장난을 치는 게 아닙니다.”

“…….”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아셰라가 그리 말했고.

자연스럽게, 화이트의 표정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의미심장한 분위기, 묘하게 무거운 공기가 천천히 두 사람의 주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

상당히 긴 침묵이 지나고 화이트가 내뱉은 말이었다.

아셰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다르다면, 정확하게 무엇이 다를까요?”

“…….”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으로 자신을 직시하는 아셰라의 시선에 화이트가 한 차례 몸을 움찔했다.

……저런 아셰라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 도저히 거짓을 읊을 수가 없었다.

‘후우.’

속으로 한 차례 한숨을 내뱉으며, 화이트가 난감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제국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왕을 죽이는 이유, 마왕에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기실, 협력관계라 표현해도 좋을 프리드리히, 루시펠,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 역시 화이트의 의도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

그저 목적지가 겹쳐서, 서로가 바라는 것이 똑같기에.

그런 이해관계가 얽힌 탓에 협력을 하게 된 것이지, 실상 그들이 화이트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리도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냈는지, 어떤 방법을 사용했기에 스무 살도 채 되지 못한 나이로 8서클이라는 경지에 올랐는지.

아무것도 몰랐고, 알 방법조차 없었다.

화이트가 스스로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절대로.

……그리고 그건, 지금 화이트의 눈앞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아셰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

아셰라의 금빛 눈동자가 깊게 침체되기 시작한다.

그저 알지 못했다.

그 자신의 제자가 무엇을 바라고, 무슨 이유로 12마왕을 적대하는지.

아니, 적대하다 못해 어째서 끝내는 세 명의 마왕을 그 왕좌에서 끌어내리기까지 하였는지.

그 이유, 동기, 원인 따위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스승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으면서, 그 이전에 화이트와 그 누구보다도 깊은 관계를 형성했음에도.

사실은 제자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시피 했으니.

어찌 우습지 않을 수가 있겠나.

어떻게 씁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래, 그랬다.

지금 현재 아셰라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저 씁쓸함이었다.

스승인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안 해주는 제자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을 것이고, 그와는 별개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도 분명 존재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화이트는 그제서야 그런 아셰라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렇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

그저 간단하게 얼버무리는 것도 가능했고, 주제를 구태여 돌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굳이 말하자면, 자신이 그렇게 했을 경우 아셰라는 더 이상 추궁해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방법은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한 얕은 수작을 부릴 경우, 아셰라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은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고민했다.

또 심란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자 했고, 차분함을 가장하고자 했다.

“…….”

고민과 고심, 무엇이든 간에 두뇌를 최대한 빠르게 굴려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하여, 결국은 끝내 한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일.’

그게 언제가 되었든, 자신은 스승인 아셰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지금이 아니었을 뿐.

그랬는데.

그랬을진대.

……지금 그녀의 표정 위로 떠오른 씁쓸한 미소, 그리고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녀, 아셰라가 저리도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기에 시간을 되돌린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판을 엎으며, 과거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속에 불안감을 심어놓고 있었다니, 어떻게 이렇게도 한심할 수가 있을까.

“…….”

화이트의 표정에서 고민의 기색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내뱉는다.

그녀가 바라고 있을 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언제나 듣고 싶어 했을 말을.

“……네 번째.”

화이트의 눈빛이 결연한 의지의 빛을 띠어가기 시작한다.

결정을 내린 이상, 망설임은 사라졌다.

동요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네 번째 마왕, 그러니까, 다음 마왕을 죽이게 될 시점에서.”

“제자님……?”

의아한 듯 반문하는 아셰라를 향해,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를 빛내며.

“당신께 모든 걸 고하겠노라 약속하겠습니다, 아셰라.”

……그렇게, 화이트가 말을 끝맺었고.

“……!”

그 단순한 한마디, 그저 말로 이루어진 약속에.

아셰라는 한순간이나마 울컥하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읏.”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드디어, 그 자신의 제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에 대해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올곧은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내뱉는 제자의 짤막한 한마디에 우습게도 감동하고 만 것일까.

‘……와인 때문이겠죠.’

도리도리, 한 차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셰라가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표정은 화악 붉어져 있었으나, 그 입가에는 이전과 다르게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고마워요, 제자님.”

그리고 화이트를 향해 그런 말을 내뱉는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한층 따스해진 시선으로.

화이트를 바라보며, 아셰라가 싱긋 눈웃음을 그려 보였다.

“기쁘게 기다릴게요, 제자님이 모든 걸 말해주는 그 날을.”

“……스승님.”

쿵, 쿵.

아셰라를 나직이 부르면서, 화이트는 그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와인으로 인한 취기, 그 때문에 생긴 박동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별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그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화이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점일 것이다.

“…….”

“…….”

한 차례 침묵, 동시에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는다.

그리 나쁜 방향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고,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은연 중에 바라던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아셰라.”

그렇기에, 화이트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그 자신의 스승을 부르며.

화이트가 아셰라의 새하얀 뺨을 한 차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읏.”

자연스레 아셰라의 표정이 화악 붉어졌으나.

손을 쳐낸다거나, 고개를 돌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녀 역시 각오를 다진다.

무엇을 위한 각오인지는, 구태여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으며.

아셰라가 슬며시 눈꺼풀을 닫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 그 기쁜 고동을 느끼면서.

아셰라가 한쪽 손으로 화이트의 어깨를 잡았고, 반대쪽 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조심스레 짚었다.

화이트 역시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바라던 바라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화이트 역시 아셰라와 마찬가지로 두 눈을 슬며시 감았고.

그다음 순간, 화이트와 아셰라.

두 사람의 입술이 조심스레 겹쳐졌다.

……그 달콤한 감각은, 맛은.

필시 와인 때문이리라고, 애써 그리 생각해가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