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와인의 정체
“…….”
꼴깍!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자리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으나, 적어도 술잔을 든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낸 소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이네요, 이런 술자리를 가지는 것도.”
그녀, 아셰라는 연신 환한 미소만을 얼굴 위로 띄워놓았기 때문.
그야말로 수심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밝은 표정이었다.
그와 비교되게,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소녀는 그리 표정이 좋지는 않았으니.
‘……어쩌지?’
소녀, 오르카가 그 붉은 적안을 한 차례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의 와인.
진한 붉은빛, 굳이 표현하자면 핏빛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 정도로 짙은 붉은색을 발하는,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는 않아 보이는 와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다.
어떻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보고자 해도, 도저히 좋은 추측이 들지를 않았으니까.
‘……나, 나한테 저런 걸 먹여서 뭘 하려고?’
꼴깍!
다시 한 차례,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새하얀 뺨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긴장한 듯이, 동시에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다는 기색이 그녀의 표정에서부터 드러났으나.
그 표정, 혹은 마른침을 삼키는 행동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아, 오르카 영애. 역시 좋아 보이는 와인이죠?”
아셰라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그리 말을 걸었고.
“……네에?”
당연하게도 자연스레, 오르카는 끝내 표정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
“…….”
잠깐의 침묵.
이내 먼저 행동을 보인 건 오르카였다.
“저, 저는, 갑자기 일이 생각이 나서……. 가 봐도 될까요?”
그리 내뱉으며, 그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했으나.
“어딜 도망치려고.”
“……에?”
촤르륵!
“에?!”
금속음과 함께 날아든 사슬로 인해, 오르카는 전신이 구속당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별다른 영창조차 없이 속박 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눈을 크게 뜨며, 오르카가 두려움에 떠는 시선으로 아셰라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셰라는 그저 태연할 뿐이었으니.
“하하, 그렇게 드시고 싶다니까, 특별히 첫 잔은 영애에게 양보할게요. 괜찮죠, 제자님?”
어깨를 으쓱이며 아셰라가 그리 말했고, 그에 지금껏 얌전히 있던 화이트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오르카가 저렇게나 마시고 싶어 하는데, 첫 잔의 영광을 하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야말로 사제 간의 완벽한 짜고 치기였다.
“……야!”
당연하게도 즉각 오르카의 살벌한 눈빛이 날아들어 왔으나, 어찌 그게 화이트에게 통하겠는가.
“달이 참 아름다운 밤이구나.”
그저 태연히 무시로 일관하며, 화이트가 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진짜!”
그리고 당연히, 그런 화이트의 태도가 좋게 보일 리가 없는 오르카가 이를 아득바득 갈아가며 무어라 입을 열고자 했으나.
“자, 오르카 영애. 여기, 잔 받아요.”
“……!”
어느새 따른 건지, 짙은 붉은빛의 액체가 담겨 있는 술잔을 아셰라가 내밀었다.
어찌 그걸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그 이후의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는가.
“어, 어…….”
다시금 마른침을 삼켜가며, 오르카가 조심스레 아셰라의 눈치를 살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저 평범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으니.
그러나 오르카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잔을 거부한다면 크나큰 화가 덮쳐올 것이라는 걸.
거의 본능에 가까운 직감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건 한없이 정답에 가까웠기에.
“……감, 사합니다. 아, 아하하.”
주륵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도로 삼키며, 오르카가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로 잔을 받았다.
붉은 액체 위로 오르카의 모습이 비춰졌다.
무척이나 일그러진 표정, 동시에 애써 미소를 그려보이려는 꼴이 퍽이나 우스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버리고 만 걸까…….’
속으로는, 그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된 시점을 떠올려가며.
‘……그래, 다 저 녀석 때문이지.’
그 원인임이 틀림없을 화이트를 한 차례 흘기듯 노려보고는.
“……아, 모르겠다.”
그렇게 내뱉음과 동시에, 오르카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무엇이 끝이냐, 라고 한다면, 그건.
“……흐으으.”
그녀의 정신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의 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실로 옳을 것이니.
“앗, 화이트으…….”
“……?”
“흐으아…….”
이상야릇한 신음성을 한 차례 흘려가며, 오르카가 흐트러진 표정과 멍하니 풀린 눈빛으로 화이트를 바라봤다.
……그녀의 인생, 그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게 될 흑역사가 탄생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
“으앙, 아셰라 님!”
“네네, 아셰라 님이 여기 있답니다.”
“저 녀석 좀 봐요! 저를 그렇게 심하게 대해놓고, 조금의 반성도 안 하는 모습을요!”
“그렇네요. 아무리 제 제자님이라지만, 조금은 괘씸하네요.”
“그렇죠?!”
“…….”
일련의 촌극을 술잔을 홀짝이며 바라보는 화이트.
도대체 아셰라가 가져온 술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고작 한 잔만에 맛이 가버린 오르카의 상태에, 화이트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 차례 짓눌렀다.
그리고 그런 도중에도 오르카의 술주정은 이어지고 있었으니.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
아셰라에게 반쯤 안겨 무어라 웅얼거리다가, 갑자기 자신에게로 화살을 트는 오르카의 모습에 화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라고 말을 해보라니.
뭐를 말하라는 말인가.
“지금 거의 반쯤 이성을 놓은 네 상태를 말해달라는 의미냐?”
“……아냐, 그런 거!”
화이트의 말에 격하게 반응하며, 오르카가 볼을 있는 대로 부풀렸다.
숫제 울상을 지어가면서, 그녀가 화이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퍽!
“…….”
그러나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조차 안 되는 상태에서, 어디 주먹에 힘이 들어가겠는가.
“하.”
그저 가볍기 그지없는, 혹시 솜방망이로 두드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공격에 화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걸까.
“아, 너……!”
눈을 치켜뜨며, 오르카가 연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툭, 툭, 툭!
“안마라도 해주는 거냐? 기특하기도 하지.”
“아니야아……!”
“아니면 뭔데.”
“아니야아아아!”
“…….”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간 그녀의 상태에, 도저히 더 이상 말을 못 꺼낼 것만 같아서.
화이트는 이제부터 무시로 일관해야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술잔을 홀짝인다.
그의 눈살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확실히, 독하긴 독하군.’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독함에도 그 독한 것이 이해가 갈 정도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속에서부터 톡 쏘아오는, 그러나 그게 그리 나쁜 감각만은 아닌 느낌.
목을 넘어, 속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만 같은 감각에, 화이트가 잔잔한 미소를 그려냈다.
술은 싫어하지 않았다.
애초에 회귀 이전, 아셰라의 폭주를 겪고 난 이후에는 도저히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술에 의존하며 산 적도 있었으니.
하물며 이 정도로 귀하고도 좋은 와인이라면, 거부할 이유 따위 하등 없었다.
“……이런 와인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답니까? 스승님.”
또 한 번 술잔을 까딱이며, 화이트가 아셰라를 향해 물었다.
무척이나 태연하게, 별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글쎄요, 언제쯤이었더라. 그게 아마, 지금은 없어진 어느 한 왕국의 국보였던가요.”
“……예?”
그러나, 정작 돌아온 대답은 그리 가볍지만은 못한 것이었다.
화이트의 속눈썹이 한 차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왕국.
그 국보, 라고.
“…….”
아직까지 제법 많이 남은 와인을 보는 화이트의 동공이 천천히 흔들린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술잔에서 손이 떼어지려고 하였으나.
“아, 상관없으니까 그냥 먹어요. 뭐 문제라도 있나?”
탁!
아셰라가 내뻗은 손길에 의해 그 시도는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쯤 강제로 먹이려는 듯이, 압박해오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화이트가 눈가를 짓눌렀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 맞나?’
속으로는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시작한다.
가장 최근에 멸망한 왕국이 어디가 있더라.
……그게 아마, 70년 전쯤의 로우젠 왕국이었던가.
내전으로 인해 왕실이 붕괴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
화이트의 떨떠름한 시선이, 취기 따위는 일절 보이지 않으며 술을 홀짝여대는 아셰라에게로 향한다.
‘아니, 뭐.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레 그녀의 나이,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확 다가오는 느낌이다.
잠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올려볼까,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제자님, 지금 무슨 생각 했어요?”
순간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묻는 아셰라의 압박감이 섞인 한마디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화이트는 그저 실없는 웃음 소리와 함께 그리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