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전쟁의 전조
“아, 스승님.”
화이트가 아셰라를 마주한 건 밤피르 후작령에서 황궁으로 복귀한 이후였다.
그다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오랜만에 만나는 것만 같은 감각에 화이트의 표정이 자연스레 환해졌다.
“어디 계셨던 건가요, 같이 돌아가도 좋았을 텐데.”
“으음……. 그게 말이죠.”
아셰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떠올리는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이전의 일.
화이트와 오르카의 합공으로 에멜이 쓰러진 걸 확인한 후, 느껴지는 기척에 따라 어느 한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유일한 부하인 세르피아였으니.
상당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었기에, 제법 당황했었으나.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한 내용들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저번에 한 차례 내뱉었던 화이트에 관련된 의심까지.
이래저래 이야기는 길었으나, 결국 중요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게 무척이나 의아하고, 또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며.
“……아뇨,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거든요.”
아셰라가 싱긋 미소를 지은 채 그리 말했다.
“그런가요.”
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음을 표현하는 화이트.
그의 표정에 한순간이나마 아주 약간의 의구심이 깃들었으나, 이내 금방 흩어졌다.
“아, 저는 지금부터 보고를 위해 황실 마법사단의 성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혹시 함께 갈 생각이 있으신지?”
“……음, 글쎄요. 제가 그들과 마주하는 것보단 제자님이 홀로 보고하는 형태가 더 모양이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죠.”
사실 별 생각 없이 예의상 한 차례 물어본 것이었다고 덧붙이며, 화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스승님. 나중에 뵙죠.”
“네, 잘 다녀와요.”
몸을 돌리고 걸어가는 화이트를 향해, 아셰라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
그리고, 이내 화이트가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후.
아셰라의 낯빛이 어째서인지 어두운 기색으로 가라앉아 있었으니.
따끔-
……무언가, 잘은 모르겠지만.
허리 부근에서 한 차례 미세한 통증이 느껴져 오는 것만 같다는 기분과 함께.
“……별일은 아니겠죠.”
피어오르려고 하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아셰라가 고개를 홱홱 털어냈다.
그러면서 이내 조금은 평온해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긴다.
별다른 목적지는 없었으나, 대충 산책을 한다는 느낌으로 황궁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거 들었어? 이번 황제 폐하의 탄생절에 폐하께서 중대한 발표를 하신다고 했는데.”
“아, 나도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대륙의 정세가 정세이니만큼, 12마왕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역시 그렇겠지? 전쟁만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
……거닐며, 그렇게 들려오는 말소리들을 귓가에 담으면서.
‘그러고 보니, 황제의 탄생절이 며칠 남지 않았던가요.’
아셰라가 한 차례 고개를 까딱였다.
“……축제라.”
황제의 탄생절이면 언제나 있어 왔던, 대륙 제일의 축제를 떠올리며.
‘할 것도 딱히 없겠다, 제자님이랑 놀러 다니기라도 할까요.’
아셰라가 풋풋한 미소와 함께 기분이 좋아진 기색으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발걸음은 어느새 한층 가벼워진 채였다.
*****
“결국 선택을 내리셨습니까.”
“……그래.”
화이트의 물음에, 프리드리히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두 눈동자 위로 묘한 열망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마, 화이트.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네 덕에 셋이나 되는 마왕을 이 대륙에서 지워낼 수 있었으니. 그건 온전히 너만의 공적이다.”
프리드리히가 그리 내뱉었고, 그에 화이트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신민이자, 클리포트 가문의 후계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내 화이트가 꺼내 든 것은 그런 상투적인 대답.
어쩌면 가식이라고 표현해도 좋았겠으나, 어차피 화이트는 물론이고 방 내부의 모든 인물은 애초에 그것이 거짓된 말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마왕을 척살하는 것.
그 위험천만한 일에 있어서, 화이트가 개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프리드리히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리 추측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12마왕을 죽이러 나서는 것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만큼은 꽁꽁 감추고 있는 게 바로 화이트였으니.
무언가, 모종의 원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만을 조심스레 품을 뿐이었다.
“……그래,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이내 프리드리히가 주어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고, 그에 화이트의 표정이 살짝이나마 굳어졌다.
“…….”
한 차례의 침묵, 무거운 정적이 방 내부에 내려앉았고.
“……이번 황제 폐하의 탄생절, 모두의 앞에서 공표하도록 하겠다.”
이윽고 프리드리히가 다시금 입을 열 즈음에는, 내부의 모든 인물들이 진중한 기색을 표정 위로 띄우고 있었다.
그런 면면들을 차분히 살피면서, 끝내 프리드리히가 말을 잇는다.
무척이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그런 목소리로.
“12마왕, 그중에서 셋을 죽인 게 우리 제국의 소행이었다는 것을.”
“…….”
서늘한 정적이 또다시 내려앉았다.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지는 것만 같다는 감상을 느끼며, 화이트가 지그시 눈꺼풀을 닫았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단 한 단어였으니.
‘……전쟁, 인가.’
약간의 씁쓸함, 그리고 동시에 모종의 열망 역시 느끼면서.
화이트가 약하게 그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
……제국과, 12마왕의 전면전.
언젠가는 벌어졌을 사건이었다.
그건 딱히 화이트가 미래의 사건들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금의 마왕을 죽인 시점에서부터, 화이트는 그 자신이 아는 대로 미래가 흘러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과한 기대이자, 더해 의미 없는 망상에 불과했으니.
화이트의 표정이 무기질적인 빛을 띠기 시작한다.
‘미래는 이미 바뀌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손에 의해서.
이미 12마왕 중 셋이나 되는 왕좌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된 이상, 연신 갈등하던 제국 측에서도 결국은 끝내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 또 동시에 확신하고 있었다.
제국이라면, 언제나 12마왕과 대척점에 서 있던 제국이라면.
세 명의 마왕이 그 목숨을 잃은 지금.
……무력의 저울이 12마왕 측에서 제국 측으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한 지금, 힘들게 감춰두었던 이빨을 드러낼 것이라고.
그건 야망이라고 해도 좋고, 혹은 대의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리라.
12마왕을 이 대륙에서 깔끔하게 지워낼 수만 있다면, 대륙의 패권을 잡게 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제국이 될 것이고.
흉악하기 그지없는 마법사들인 12마왕이 사라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대의 제국은 영원토록 칭송받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결정일 테다.
화이트가 천천히 눈을 떴고, 이내 그 시선을 프리드리히에게로 향하게끔 했다.
……황실의 대마도사, 프리드리히 에드발트.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서쪽의 엘더리치, 루시펠.
이 두 존재만으로도 이미 두 개의 왕좌가 틀어막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뿐일까, 제국에 존재하는 전력은 단순히 그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천천히, 화이트가 제국 측의 강자들을 떠올려 내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일곱 가문의 가주부터 시작해서, 그 휘하의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 그 이외의 전력들까지도.’
……애초에 프리드리히가 12마왕과 정면으로 대적하고자 마음을 먹은 이상, 그건 당연하게 승산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리라.
그리고 화이트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불가능하지 않다고.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힘들고, 또 험한 전쟁이 되겠지만.
끝내 12마왕이라는 악성 종양을 이 대륙에서 영원토록 몰아내는 것에 있어서, 승산은 충분하다고.
그건 단순하게 달아오른 감정에 휩쓸려 생각하는 그릇된 판단이 아니었다.
죽은 세 명의 마왕과, 아셰라를 제외하면 남은 마왕은 이제 고작해야 8명.
게다가 무력 측면에서 최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던 녹색의 마왕, 에멜이 죽은 이상.
12마왕 측에서도 9서클에 이른 대마도사는 이제 몇 남지 않았을 터.
‘……회귀 이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왕이 있기도 하고.’
그렇게 계산하자면, 승산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오묘한 희열이 차오르는 감각을 느끼면서, 화이트가 서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드디어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이미 개별적으로 행동하여 세 명이나 되는 마왕의 목을 떨구었다.
거기에 제국 측의 전력이 가세한다면.
프리드리히나 테이칸, 혹은 리이칸테르 후작뿐만 아니라 숨겨진 비장의 카드라고 표현해도 좋을 루시펠까지 존재하는 이상.
─그저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드디어 마냥 승산이 없는 전쟁은 아니게 되었군요.”
“……그렇지.”
화이트가 꺼내 든 말에, 프리드리히가 굳은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무척이나 진중한 기색으로 그가 말을 잇는다.
“황제 폐하께는 이미 말씀드렸다. 다행히 납득도 해주셨으며, 우리의 의견을 지지하겠노라고 의지를 밝히기까지 하셨지.”
그런 이상, 더는 무를 수 없게 된 것이라고.
그렇게 덧붙이며, 프리드리히가 흔치 않게 살벌한 눈빛을 번뜩였다.
“……전쟁의 전조가 보이는군.”
그가 짤막하게 내뱉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방 안의 모든 인물이 그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