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여운 스승님이 사실은 흑의 마왕이었습니다!-84화 (85/158)

(EP.84)세르피아

“……큭.”

에멜의 몸이 반으로 쪼개진 후.

화이트가 가장 먼저 보인 행동은 몸을 힘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털썩!

어느새 인위적인 냉기로 서늘하게 얼어붙은 지면 위에 무릎을 꿇으며, 화이트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미간은 자연스레 좁아지고, 입매는 비틀린 채, 눈동자마저 힘겹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정말로.’

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이를 악물었다.

……당할 수도 있었다.

오르카가 타이밍 좋게 개입해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그녀가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건 에멜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고는 하나, 그만큼 위협적인 상황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심하기는.’

한 차례 혀를 차며, 화이트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눈빛이 한 차례 살벌하게 번뜩여지면서, 시선은 자연스레 에멜에게로 향한다.

정확히는, 두 갈래로 나누어진 ‘에멜이었던 것’을 향해.

“…….”

……저런 형태로, 이렇게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적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그 에멜인데.

12마왕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상위의 무력을 소유한 그 녹색의 마왕일진대.

적어도 홀로 그를 상대했더라면, 진실되게 전력을 꺼내 들지 않는 이상 필패했으리라.

그도 아니면 저 멀리 떨어져 있을 아셰라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러한 요소들은 자연스레 화이트의 표정을 일그러지게끔 만들었다.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그저, 그냥.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나친 자조가 섞인 것도 아니었고, 평범하게 객관적인 판단에 의거한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홀로 이곳까지 왔더라면.’

오르카나 아셰라와 함께하는 것이 아닌, 진짜로 혼자서 에멜을, 루이 밤피르를 상대하고자 왔더라면.

“…….”

화이트의 표정이 한순간에 불쾌한 기색으로 구겨졌다.

……그래, 루이 밤피르까지는 좋았다.

애초에 루이 밤피르의 육체로 자신을 상대하는 에멜은 그다지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아무리 9서클의 대마도사라고는 하나, 평생을 갈고닦은 마법이 아닌 별개의 이능을 사용한다면.

그 수련의 기간이 10년 가까이 된다고 하여도, 약화되는 것은 필연이었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루이 밤피르의 탈을 벗어내고, 녹색의 마왕, 에멜이 그 모습을 드러낸 이상.

아마 거의 확실하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졌을 터.

어쩌면 끝내 목숨을 잃고 허망하게 쓰러져 있는 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져 있는 에멜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이트가 한 차례 헛웃음을 내뱉었다.

─죽을 수도 있었다.

복수는커녕, 고작해야 세 번째로 상대하는 마왕조차 이기지 못하고 말이다.

……물론,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아셰라가 전면에 나섰을 확률이 높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그녀라면 필히 재빠르게 접근해 에멜의 공격을 막아내고 역으로 쳐내기까지 했을 터.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로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내 화이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말은 그러한 한마디였으니.

진정한 의미에서 마왕을 죽이는 것.

딱히 이제 와서 모든 걸 홀로 감당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그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야말로 뼈저리게, 무력감이 전신을 천천히 잠식해 간다.

“……후우.”

눈가를 짓누르며, 화이트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간에 또 하나의 마왕을 죽였다.

오르카의 도움을 받았든 아니든 간에, 죽인 건 죽인 거였으니.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했다.

더욱더 강한 힘을, 조금 더 높은 경지를.

복수와, 수호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보다도 더한 강함이 필요할 터.

“…….”

화이트의 그 푸른 눈동자에 깊디깊은 열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잠시 한 차례의 정적.

“자, 그럼.”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화이트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기 위해, 어차피 이곳에 오래 남아있어서 좋을 건 없었으니.

……그렇게, 화이트가 마나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걸음을 옮기고자 하는데.

“……야.”

“……?”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자그마한 원망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화이트의 표정에 약간의 의아함이 떠올랐으나, 이내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걸까.

“아.”

짧은 탄식과 함께, 화이트가 고개를 측면으로 돌렸다.

“……‘아’, 라고?”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로 터벅터벅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화이트의 바로 앞이었으니.

어느새 화이트의 코앞까지 접근한 오르카가 원망과 증오로 뒤섞인 눈빛으로 화이트를 노려봤다.

콰악!

“아, 잠깐.”

멱살을 잡으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오르카를 향해, 화이트가 우선 손을 내밀어 제지하고자 했으나.

“잠깐이고 뭐고, 너는 좀 맞아야 해!”

날아드는 것은 분노로 가득 찬 오르카의 눈빛과 그녀의 손날이었다.

텁!

그러나 어떻게 그걸 그냥 맞아주겠는가.

그냥 화가 나서 내지르는 가벼운 주먹질도 아니고, 기운마저 서린 손날이었기 때문에.

화이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르카의 손목을 잡아챘고, 그에 오르카의 표정은 더욱 험악하게 바뀌었으니.

“하, 막아?”

“……그럼 그냥 맞아줘야 하나?”

“넌 맞아줘야지!”

빼액 소리를 내지르며, 그녀가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무리 최적의 기회였다고는 해도, 그 불길에 그대로 노출된 나는 생각도 안 해?”

“……음, 크흠.”

찔리는 게 있긴 한지, 화이트가 한 차례 헛기침을 내뱉었다.

“내가 급하게 끌어올린 기운으로 막을 둘러서 겨우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불에 탄 송장이 되어 있었을 거라고!”

“…….”

이어지는 오르카의 울분 섞인 말에, 화이트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러한 태도는 오르카의 열을 더욱 뻗치게끔 만드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으니.

“너, 진짜…….”

짐짓 울상을 지어가며, 오르카가 이를 갈았다.

“……두고 봐, 그냥은 안 넘어갈 거니까.”

볼을 부풀리고, 오르카가 다 필요 없다는 듯이 몸을 홱 돌렸다.

“……음.”

그리고 화이트는 그저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조용히 그녀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 역시 스스로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긴 했기에.

‘……아무리 그래도 불길에 그대로 노출되게끔 한 건 조금 지나쳤나.’

약간의 도움이나마 줬더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지.’

화이트로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약간이라도 신경을 쏟았다가는 겨우 얻어낸 기회, 빈틈을 놓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그저 방치했고, 끝내 결론적으로는 에멜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으나.

결과, 오르카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나름 확신이 있기도 했고.’

사실 그녀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충은 알고 있었기에 행한 일이었지만.

오르카에게 그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일 터.

그렇기에 그저 입을 일자로 꾹 다물며, 화이트가 발걸음 소리마저 지운 채 오르카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어디 계신 거지.’

그러면서도 떠올리는 건 그 자신의 스승에 대한 것이었으니.

분명 에멜의 녹색 가시에 빈틈이 노출됐을 당시, 지근거리로 접근하는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었는데.

“…….”

……어째서인지, 지금에 와서는 기척은커녕 아무런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감각에.

‘……괜찮겠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그 아셰라이니만큼 별일은 없을 거라 믿으며.

“기다려라, 오르카.”

“……꺼져!”

욕지거리를 내뱉는 오르카에게, 그래도 짤막하게나마 사과를 하기 위해 화이트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

……한편.

같은 시각.

마을, ‘벨티아’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어딘가의 숲속.

아셰라는 그 자신의 금안을 의아함으로 물들인 채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세르피아?”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유일하다시피 한 부하의 갑작스런 등장에 의해서.

“…….”

어두운 흑발을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게 하며, 세르피아가 한 차례 멍한 눈빛을 빛냈다.

아셰라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 세르피아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탁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만 같다고.

“무슨 일 있나요?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이리 갑자기 나타나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아셰라가 흐릿한 안광을 조심스레 번뜩였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삭풍이 두 사람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가며, 자연스레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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