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6)복수에 동행하다
“화이트?”
“…….”
밤피르 후작가의 저택.
그 입구에서 우연찮게도 화이트는 저택을 나서는 오르카와 마주할 수 있었다.
화이트의 표정이 살짝이나마 굳어졌다.
물론, 그녀를 만나러 이곳을 찾은 것은 맞았으나…….
‘……하아.’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화이트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찌 되었든 굳이 불편한 기색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화이트가 또렷한 눈빛으로 오르카를 직시했다.
“……무슨 일 있어?”
그리고 그에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을까.
오르카 역시 환하던 표정을 슬며시 지우며, 조금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으니.
“잠시 자리를 옮기지.”
“어, 어?”
오르카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화이트가 몸을 살짝 기울여 그녀를 가렸다.
무엇에게서, 라고 한다면, 그건.
“…….”
의미심장한 눈빛을 한 차례 빛내는 화이트.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그의 시선이, 이내 밤피르 후작가의 저택.
그 두 번째 층의 한쪽 창가로 향한다.
“화, 화이트?”
갑작스러운 끌어당김에 당황한 건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는 오르카를 뒤로하며.
화이트가 창가에서 붉은 눈동자를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는 한 사내에게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그리고 그런 무언의 인사를 차마 예상치 못한 것일까.
창가의 사내가 살짝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슬며시 몸을 뒤로 물렸다.
이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창가에서는 완전히 인영이 사라졌으니.
‘……괜히 밤피르 후작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겠지.’
속으로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오르카를 슬쩍 흘겨보았다.
……데리고 가는 것은 그녀뿐이면 족하다.
애초에 복수에 손을 거들어주겠노라 약속한 것은 오직 그녀에 한한 문제였고, 장남을 죽인 흉수에 눈이 돌아간 밤피르 후작마저 복수의 길에 동행한다면 일이 상당히 복잡하게 바뀔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계획은 어그러질 것이며, 자칫하면 12마왕 측에서 제국의 개입을 의심할지도 모를 일.
……물론, 오르카 밤피르라는 존재를 동행시키는 것만으로도 위험성은 충분했으나.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
언젠가의 새벽, 눈가를 촉촉하게 젖게 만든 채로 그리 중얼거렸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떠올리며.
‘나도 참, 멍청하기 짝이 없군.’
화이트가 자조 섞인 말을 한 차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위험을 자조하는 일이다,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녀에게 알리지 않고 그저 아셰라와 함께 조용히 루이 밤피르를 죽이러 가는 방법도 있었다.
지금까지 두 차례 있었던 마왕의 죽음에 있어서, 제국 측 인물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은 마왕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러했다.
……그렇지만.
“후.”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오직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랬으면 진작에 이 세계는 감정을 지워낸 기계적인 인간들로 가득 채워졌을 테지.
그렇지 않았으니, 화이트로서도 이런 선택을 내리게 된 것이다.
“……오르카.”
“어, 어?”
여전히 긴장했는지 살짝 볼을 붉히고 있는 오르카를 나직이 부르며, 화이트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가 흘렸던 눈물, 그리고 잘게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한 소녀를 이끌고자 구태여 자신이 내뱉었던 한마디.
“‘복수를 도와주겠다’…….”
그 한마디를,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굳이 다시금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오르카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
어느새 망설임 없이 뻗어지던 발걸음은 멈춰진 채였다.
이채가 서린 화이트의 눈빛을 받아내는 오르카.
그녀 역시 바보가 아니었기에, 화이트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0%의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으니.
“……지금 그 말을 내뱉는 이유가 뭐야?”
오르카가 표정을 착 가라앉히며 물었고, 그에 화이트가 한 차례 입을 꾹 다물었다.
“…….”
진정으로 그녀에게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맞는가.
그런 생각이 연신 뇌리에 맴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미 결정은 내린 후였기에.
“루이 밤피르의 위치를 찾았다.”
화이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뭐?”
그 말을 들은 오르카의 표정, 그리고 눈빛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북부 지방의 혹한을 떠올리게끔 만들 정도로 차가우면서도 서늘한 느낌을 띠게 되었으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오르카가 화이트를 향해 살기가 섞인 시선을 빛냈다.
물론 그 살기는, 그리고 살의는 화이트에게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싸늘하게 갈무리된 살기, 마치 북풍한설을 연상케 하는 정제된 살의.
……그것은, 그 자신의 오빠인 루이 밤피르를 죽이고 그 몸을 찬탈한 정체 모를 마왕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장난을 치는 건……. 아니겠구나.”
화이트의 표정을 살피며, 오르카가 그 자신의 말을 번복했다.
화이트의 싸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에서부터 그 진심을 읽을 수 있었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그 살기를 강렬하게 피어오르게끔 하며, 그녀가 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그야말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강렬하게.
“……네게 알리지 않는 것도 생각은 했었다.”
그리고 그런 오르카를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며, 화이트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잔잔하게, 차분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네가 무슨 수를 써서도 이기지 못할 상대, 그리고 나로서도 쉽게 싸우지 못할 강적이니까.”
“…….”
오르카가 한 차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 자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이 침묵하는 화이트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라.”
얕게 숨을 내뱉으며, 오르카가 살짝이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건 나름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고자 하는 의미이기도 했고, 그녀 자신의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말해줬다는 건, 나를 데려가고자 결정을 내렸다는 거네.”
“그래.”
오르카가 힘겹게 꺼내 든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가 긍정을 표했다.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화이트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런 짤막한 한마디에, 화이트를 지그시 바라보던 오르카의 눈동자가 이채를 담아내기 시작했으니.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그 약속?”
“…….”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표정으로부터 답을 읽어낼 수 있었던 오르카가 한 차례 작게 숨을 골랐다.
얼굴은 약간이나마 미세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는 연신 거칠어지는 중이었다.
그것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크게 작용한 요인은 단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복수심이요, 동시에 두 번째는 그러한 복수심과 모순되는 또 다른 하나의 오묘한 감정일 것이니.
화이트를 바라보는 오르카의 표정이, 점차적으로 붉은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약속은 지킬 거야. 하지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이건 목숨을 거는 일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러한 오르카의 묘한 기색을 읽어냈는지, 혹은 못했는지.
화이트는 그저 태연히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표정 위로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그 자신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다.
화이트의 시선은 오롯이 오르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뭐야, 걱정해주는 거야?”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를 알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기에, 오르카가 한 차례 실소를 흘렸다.
“살짝 기분 나쁜데? 나도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말의 불쾌함도 보이지 않는 상큼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우는 그녀.
무척이나 모순된 광경이었으나, 과연 그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
“…….”
한 차례,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러면서도 연신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두 소년 소녀.
“……고마워.”
그리고 이내, 먼저 입을 연 것은 오르카의 쪽이었다.
평소의 발랄한 표정과는 한층 그 결이 다른,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오빠 행세를 하던 그 마왕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몰라. 그렇지만 중요한 건 네가 그걸 내게 알려주고자 했다는 거지.”
“…….”
침묵하는 화이트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가자, 화이트.”
그녀, 오르카가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을 선명하게 빛냈다.
와중에도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였으니.
“새삼스레 안일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야. 죽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어.”
그렇지만.
덧붙이며, 그녀가 화이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어. 오빠를 죽이고, 수년 동안 뻔뻔하게 우리 가문 내에 존재하고 있던 그 마왕을 죽이고자 사력을 다하겠다고.”
오르카가 확고한 의지를 담아 그리 말을 내뱉었고, 그에 화이트의 눈빛이 한 차례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감정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불확실한 전력을 동행시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은 약간은 들뜨는 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없어진 시간대, 어떤 형태로든 죽어 사라졌을 소녀가 작금에 와서 마왕을 죽이는 자신의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들뜸.
동시에 과연, ‘피’의 권능을 품고 있는 그녀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까지도.
이런저런 복잡미묘한 감정들로 휘몰아치는 눈동자를 한 차례 빛내며, 화이트가 살짝 허탈한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냐.”
어느새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한 차례의 헛웃음과 함께, 화이트가 내밀어진 오르카의 손을 맞잡았다.
…….
……아니, 맞잡으려 했으나.
“…….”
순간적으로 엄습해 오는, 그야말로 본능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할 직감에.
……어딘가에서부터 싸늘한 금빛 시선이 날아드는 것만 같은 감각에.
“……음, 그럼.”
“아…….”
내밀어진 오르카의 손을 애써 외면하고, 약간은 아쉬운 듯이 침음성을 흘리는 오르카 역시 돌아보지 않은 채.
화이트가 몸을 돌리며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개만 살짝 틀어 내뱉는다.
“가볼까, 네 오빠를 죽인 마왕에게 복수의 칼날을 꽂아주러.”
“읏…….”
살짝 토라진 듯이 볼을 부풀리던 오르카, 그러나 이내 상황의 진지함에 어느 정도 차분하게 감정을 가라앉히며.
“……후우.”
얕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무거운 고개를 애써 끄덕거렸다.
“그래, 가자.”
그렇게 내뱉으며, 오르카가 그 붉은 눈동자에 다시금 선명한 살기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 확고한 의지에, 그리고 흔들림 없는 결연한 살의에.
‘……비록 아직 어리긴 하더라도, 그 오르카 밤피르가 맞긴 하다 이건가.’
나름대로의 안도감을 품으며, 화이트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떠오르는 것은, 지금은 없어진 미래에 밤피르 가문의 가주가 되어 ‘피의 군주’라 불렸던 그녀의 모습.
‘아직은 약하다지만, 어쩌면.’
화이트의 시선이 오르카의 입술 사이로 슬쩍 보이는 송곳니로 향했다.
……그녀의 ‘능력’을, 잘만 이용한다면.
아마도, 아니 분명히 도움이 될 터.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은 마냥 감정적인 요인으로 인한 결정만은 아니었다.
비록 아직은 덜 성장한 그녀라도, 도움이 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화이트는 아주 약간 남아있던 망설임, 혹은 불안감을 깔끔하게 지워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은 은밀하게 황궁을 빠져나간다.
“……근데 죽일 방법은 있는 거지? 적은 그 12마왕 중 하나라고?”
제도의 대로를 걸으며, 오르카가 살짝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렇지만.
“새삼스레 두려워지기라도 했냐? 그럼 지금이라도 말하고.”
화이트의 그저 피식 웃으며 그리 대꾸할 뿐이었으니.
그런 그의 모습에 오르카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네가 너무 자신만만해 보이니까 그게 조금 걱정돼서─ ……잠깐, 뭘 피식피식 웃는 거야? 기분 나쁘게!”
“그렇게 무서우면 놔두고 가줄 수도 있는데. 그걸 원하냐?”
“……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바락바락 소리치는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화이트가 태연히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라.”
무척이나 태연자약한 어조로.
“애초에 금의 마왕과 회색의 마왕을 죽인 자를, 넌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절대 흘려넘길 수 없는, 그런 말을 말이다.
“……뭐?”
오르카의 표정이 한순간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화이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그도 아니면 머리가 이해를 거부하는지.
그러나 이내,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아서.
“……뭐어?!”
그녀가 경악이 섞인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 들었으니.
“너, 너, 너……?!”
숫제 감춰져 있던 출생의 비밀이라도 들은 것만 같은 표정으로, 오르카가 화이트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고.
“자, 얼른 가자. 갈 길이 멀다.”
화이트는 그저 천연스럽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