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4)타락의 술식
“……죽였습니까?”
“네?”
기절한 오르카를 마법으로 둥둥 띄워 데려온 아셰라를 보고 화이트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마치 범죄자를 보는 듯이, 화이트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아셰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시죠, 스승님. 설령 스승님이 밤피르 가문에 쫓기게 되더라도 저는 언제나─”
“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퍽!
화이트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아셰라가 볼을 부풀렸다.
그에 화이트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실소를 흘리는 모습.
“장난입니다, 장난. 농담인 거 아시죠?”
“……짓궂은 제자님이라니까요.”
툴툴대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는 듯, 아셰라가 얕게 미소 지었다.
잠깐의 정적, 그러나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은.
그런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그려 보일 때.
“……저기, 화이트. 나를 잊은 건 아니지?”
오르카가 입을 연 것은 그즈음이었다.
“아.”
화이트와 아셰라의 시선이 한순간에 오르카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중에서도 아셰라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해 순간적으로 몸을 흠칫 떠는 오르카였으나, 어떻게든 침착을 되찾으며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음, 흠흠. 그, 이제 돌아가면 안 될까?”
“돌아가자고? 어디로?”
화이트가 즉각 반문했고, 그에 오르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시선으로 화이트를 훑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황궁이지. 언제까지 이 칙칙한 숲속에 있을 거야? 나 슬슬 싸늘해지려고 하는데.”
“아하.”
부연 설명에 그제서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화이트.
그런 그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오르카가 조심스레 아셰라를 쳐다봤다.
동공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으나, 애써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모습.
“……그, 돌아가지 않으시겠어요?”
그러나 내뱉어지는 대사는 무척이나 공손하기 그지없었으니.
“아, 아하하…….”
그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오르카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흐음.”
아셰라가 한 차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으나, 이윽고 별달리 거부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조금은 아쉬운 눈빛으로 화이트를 슬쩍 흘겨본 아셰라가 이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도록 할까요, 제자님.”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긴다.
여전히 완드를 움직여 오르카는 허공에 묶어둔 채로 말이다.
“……어?”
표정을 오묘하게 바꾸며, 오르카가 한 차례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불길한 감각이 드는 것이, 무언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 오르카가 떨리는 시선으로 화이트를 내려봤으나.
“아, 네.”
당연하게도 그런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화이트는 그저 아셰라의 뒤를 따를 뿐이었으니.
“야, 내 취급이 왜 이래? 네 스승님한테 나 좀 내려달라고 말해줘!”
오르카가 짐짓 울상을 지으며 빼액 소리를 질렀으나, 화이트는 태연했다.
“뭘, 재밌어 보이는데.”
“뭐, 뭐? 재미?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화이트가 가벼운 어투로 내뱉은 한마디에 오르카의 표정이 화악 붉어졌다.
물론 이번에는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때문은 아닌, 온전히 분노로 인한 붉어짐이었고.
허공에 뜬 채로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다가,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너! 목덜미 좀 보여줘 봐!”
이내 그렇게 의미 모를 말을 내뱉기까지 하는 그녀.
그렇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화이트는 그저 평온하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화이트는 오르카가 밤피르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 진짜!”
오르카가 한 차례 살벌한 눈빛을 번뜩였다.
“피 좀 빨자! 그 열받는 면상을 고통으로 구겨주겠어!”
그녀의 송곳니가 햇빛을 받아 한 차례 섬뜩하게 빛났으나, 화이트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듯했으니.
“스승님, 오르카가 헛소리를 합니다. 좀 더 높이 띄워주시죠.”
“아, 그럴까요?”
오히려 천연스럽게 그리 말하기까지 했으며, 그에 아셰라는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우웅-
“……어, 어?”
마나가 한 차례 일렁거렸고, 그 직후 오르카의 몸이 통제를 잃은 듯이 상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마치 재밌는 광경을 구경하듯이 바라보는 화이트와 아셰라.
“자, 잠깐!”
오르카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나 치마, 치마 입고 있다고!”
“……?”
그에 한 차례 미묘한 표정을 짓는 화이트.
마치 ‘어쩌라는 거지?’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 오르카가 수치심으로 물든 목소리를 내뱉었다.
“보지 마! 이 멍청아!”
애써 험한 말로 쏘아붙여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화이트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한 차례 고개를 갸웃하던 화이트, 그러나 이내 뒤늦게나마 오르카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을까.
“아하.”
가벼운 어조로 탄성을 내뱉으며, 화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척이나 가엾다는 듯이, 혹은 안쓰럽다는 듯이.
애써 치마를 손으로 눌러 가리는 오르카를 올려다보며, 화이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걱정하지 마라, 네 치마 속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까.”
“……뭐, 뭐?!”
그리고 그렇게 내뱉어진 화이트의 말에 실시간으로 바뀌는 오르카의 표정이란.
한 차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가, 이내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가.
“……야!”
끝내는 무척이나 분노한 기색으로 그녀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게 지금 숙녀한테 할 말이야? 너, 내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더럽게 배려가 없구나!”
“그래, 그래.”
오르카의 격정 섞인 목소리에 화이트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거렸다.
그렇지만, 과연 정말로 알아들었을까.
그저 재밌다는 듯이 연신 웃음만을 흘리며, 화이트가 아셰라를 뒤따랐다.
공중에 떠서 옮겨지는 오르카는 그저 방치한 채로.
“이, 이……!”
이윽고 화이트의 진심을 깨달을 수 있었는지, 오르카가 진심을 다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야아! 진짜 이렇게 무시할 거야? 정말로? 나 오르카 밤피르야!”
“스승님, 숲길이 어둡습니다. 저랑 같이 가시죠.”
“야! 화이트!”
“아, 스승님. 거기 나무뿌리가 돌출되어 있습니다.”
“……! ……!”
끝끝내 무시로 일관하는 화이트의 태도에 질린 걸까, 더 이상 무어라 소리를 내지르지도 못하며 오르카가 눈을 붉혔다.
……어쩌다가 밤피르 후작가의 영애인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건지.
무척이나 억울하고도, 묘하게 수치스러운 상황 속에서 오르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것뿐이었다.
*****
쿠궁, 쿠구궁…….
거친 번개가 내리치는 장소였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내리꽂히는 번개들이 하나같이 붉은빛을 띠고 있다는 부분일 터.
……그리고.
콰아아아앙!
한 차례, 그런 붉은 번개가 사납게 떨어지며 커다란 고목을 한순간에 불태웠다.
화르륵!
“…….”
일순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고목을 살짝 흘겨보면서.
연한 보랏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파르가 죽었어요.”
“…….”
그리고 그렇게 내뱉어진 말에.
대륙의 그 어떤 인물이라도 그냥은 흘려넘길 수 없는 말에.
적(赤)의 마왕, 샤사르가 턱을 괴며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벌써 두 명이나 죽었군.”
“…….”
샤사르가 태연히 내뱉은 한마디에, 바이올렛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상당히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어조였으나, 샤사르의 곁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현재 샤사르는, 무척이나 격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노라고.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바이올렛은 확신했다.
12마왕의 일좌를 차지한 마왕, 그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당장이라도 격하게 터져 나올 감정을, 샤사르가 힘겹게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하하.”
그러나 어찌 감정을 온전히 조절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저 그런 평범한 사건도 아니고, 두 명의 마왕이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은 상황이다.
황실의 대마도사가 움직인 것도 아니며, 하나의 국가가 전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분노하고 있을 터.
바이올렛은 최대한 그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며, 이 폭풍이 빠르게 지나가기를 속으로 기원했다.
“…….”
……그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콰르릉…….
콰아앙!
수십 번 정도 붉은 번개가 사방을 사납게 짓밟을 즈음, 샤사르가 다시금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웃기는 일이야.”
“…….”
바이올렛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고,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샤사르가 말을 이었다.
“금의 마왕이 죽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또 다른 마왕이 죽어 나가는 거지? 이거, 사실 엄청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크큭.”
농담조로 내뱉는 그였으나, 바이올렛은 그런 그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
콰직, 콰지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실시간으로 사방에 붉은 번개를 흩뿌리고 있는 샤사르, 그런 그가 장난스럽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바이올렛은 멍청하지 않았다.
“……하하.”
다시금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고, 오로지 샤사르의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주변을 메울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당신이 기뻐할 만한 소식을 가져왔는데요.”
타이밍을 재던 바이올렛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그즈음이었다.
“……내가 기뻐할 소식이라?”
흥미가 돋았을까, 샤사르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리며 고개를 살짝 꺾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바이올렛의 모습이 담기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들어보도록 할까, 바이올렛. 네 말이라면 잠시나마 경청해줄 가치는 충분하지.”
“……그것 참 감사한 일이군요.”
일말의 동요도 없이 가식적인 말을 내뱉는 샤사르를 지그시 쳐다보며, 바이올렛이 한 차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나 이내 꺼낼 말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걸까.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저희들의 계획, 비원을 수정할 필요가 생긴 것 같습니다.”
“……흐음?”
샤사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한 차례 비음을 흘렸다.
그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며, 샤사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내 완전히 몸을 돌리고는, 바이올렛과 시선을 마주하는 샤사르.
그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생겼다라, 그게 내게 있어서 마냥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바이올렛.”
“……물론이죠.”
바이올렛이 샤사르를 향해 마찬가지로 잔잔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무척이나 살벌한 빛이 떠올라 있는 채였다.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바이올렛이 하나의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건?”
샤사르가 물었고, 그에 바이올렛이 짧은 간격을 두고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이 기뻐할 만한 소식, 정확히는 한 명의 인물이랍니다.”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웅!
바이올렛이 손을 휘저었고, 그에 따라 수정구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紫)색의 마나가 일렁거리며, 수정구에서 노이즈가 흘러나온다.
-치직, 칙.
“…….”
샤사르와 바이올렛, 두 마왕의 시선이 온전히 수정구를 향해 내리꽂혔다.
이내, 그리 길지 않은 정적이 사방에 내려앉았고.
-우웅…….
이윽고 완전하게 자색으로 물든 수정구가 보인 하나의 광경이란.
“……세르피아?”
온몸을 검은색 로브로 감추고 있는 한 명의 여인이었으니.
“어떻게……?”
무척이나 드물게도, 샤사르가 놀란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 들었다.
그도 그럴 만하지 않겠나.
수정구에 드러난 여인, 검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분명하게.
“……아셰라가 우리를 적대하기 시작한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으니.
샤사르의 붉은 눈동자가 묘한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흑의 마왕, 아셰라.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샤사르에게 있어서 역린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때 그의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각이었으며.
샤사르로 하여금 비원을 이룰 수 있게 만들어줄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장기말이었기에.
“……하, 하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샤사르가 한 차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그의 입꼬리는 귀에 걸린 듯이 쭉 찢어진 채였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사납고도 혼탁한 감정이 그의 눈동자 위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어느새 그의 입은 쉴새 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수정구에 드러난 여인에게 고정시키며, 샤사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르피아를 통해, 아셰라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계획은 훨씬 앞당겨질 수 있겠죠.”
바이올렛이 뒷말을 이었고, 그에 샤사르가 눈꼬리를 섬뜩하게 끌어올렸으니.
“큭, 크큭. 크하하하…….”
이내 그의 입술을 비집고 광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과과과광!
한 차례, 다시금 붉은빛의 번개가 사방으로 거칠게 내려꽂혔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으며, 샤사르는 그저 광기로 물든 웃음을 계속해서 터뜨릴 뿐이었고.
그런 그를 향해 마찬가지로 싸늘한 미소를 그리는 바이올렛.
그 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차례 휘날리며, 그녀가 냉기가 배어 나올 것만 같은 목소리로 짤막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타락의 술식’을 재가동하도록 하죠, 샤사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