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왕좌의 무게
“…….”
정적.
화이트의 질문 이후로, 제국 측의 세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화이트의 표정은 미묘해져만 갔으니.
‘……무슨 생각인 거지?’
워프까지 써 가며 제도의 앞에서 자신들을 가로막았다는 것은, 최소한 무언가 용무가 있다는 뜻일 터.
처음에는 그것이 처벌을 위함인 줄 알았으나,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그것은 아닌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부터 처벌은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는 듯한 기색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겠나.
황실의 대마도사, 프리드리히 에드발트.
그에 더해 클리포트 가문의 가주인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까지.
제국을 지키는 기둥이라고도 불리우는 셋이 이렇게나 조심스레 찾아왔다면.
필시 무언가 중요하기 짝이 없는 용무가 있기는 할 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는 말이지.’
화이트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눈동자만 살짝 굴려 뒤편의 아셰라를 흘겨보며, 화이트가 그녀를 지키듯이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움직임을 아셰라가 눈치채지 못할 일은 없었기에.
“뭐예요, 제자님?”
쿡쿡 웃음을 흘리며, 아셰라가 은근한 기색으로 화이트의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저를 지키는 기사님이라도 되려고요? 조금 멋진데?”
‘참자…….’
그리고 그런 아셰라의 장난 아닌 장난에, 화이트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프리드리히를 상대로 나름대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일말의 빈틈조차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런 와중에 스승인 그녀가 이리도 장난스럽게 굴어대니, 어찌 열불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승님.”
그렇기에, 화이트가 애써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으나.
“왜요, 이러지 좀 말라고 하고 싶나요? 싫은데요?”
“…….”
화이트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화이트의 미간에 한 차례 골이 파였다.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다 알고도 이러는 거죠, 스승님?”
화이트가 이를 악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고, 그에 아셰라의 미소가 짓궂은 방향으로 짙어졌다.
“아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쉬며, 화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쯤에서.
[크흐흐…….]
“…….”
루시펠의 음울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 차례 고요하게 울려 퍼졌으니.
아셰라를 상대하며 조금은 풀어졌던 화이트의 표정이 다시금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리도 겁들이 많아서야, 어찌하겠나. 그렇게들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내가 말을 꺼내 들 수밖에 없지 않나.]
“……루시펠.”
프리드리히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으나, 루시펠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그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화이트. 이 겁쟁이 놈들의 목적은 별거 없다. 그리고 그 목적이라 함은, 네게 있어서 해를 끼칠 만한 종류는 아니고.]
“……그 말은?”
처음으로 돌아온 의미 있는 말에, 화이트가 살짝이지만 표정을 풀며 되물었다.
그에 더욱 미소를 짙게 만들며, 루시펠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선 한 가지,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지.]
“알아야 할 사실이라.”
대화가 통할 만한 상대가 나타난 것에 만족했을까, 화이트가 한결 차분해진 기색으로 루시펠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런 화이트의 시선을 받아내면서, 루시펠이 특유의 가벼운 어조로 재차 입을 열었다.
[제국 측에서는, 아직까지 12마왕 중 둘을 죽인 범인이 클리포트 가문의 후계자인 너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
그러나 그런 가벼운 어조로 루시펠이 내뱉은 말에 담긴 내용은, 그다지 가볍지만은 않았으니.
화이트의 표정이 조금은 미묘하게 굳어졌다.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려,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제국 측의 인물들의 표정을 살피는 화이트.
‘……거짓은 아닌 것 같은데.’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화이트가 두뇌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12마왕을 죽인 범인이 나라는 걸 명확하게 아는 인물은 한정되어 있다.’
우선 아셰라.
자신의 스승인 그녀는 복수의 여행길에 동행하기까지 했으니, 굳이 말할 것까지도 없으리라.
중요한 건 그녀가 아닌 다른 인물들.
화이트의 시선이 프리드리히와 테이칸, 그리고 리이칸테르 후작을 한 차례씩 훑고 지나갔다.
공교롭게도 그 인물들은, 화이트의 진정한 경지를 알거나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는 인물들뿐이었기에.
‘……설마.’
순간적으로, 한 가지의 가능성이 화이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였고.
“루시펠.”
화이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는 루시펠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는 않고, 화이트가 고개를 들며 천천히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에드발트 경과 아버지는 황제 폐하께 나에 관한 걸 보고하지 않았군. 내 말이 맞나?”
[크흐흐흐…….]
루시펠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한층 더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런 루시펠의 반응에, 비록 명확한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화이트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에드발트 경.”
이내 화이트의 무기질적인 시선은 자연스레 프리드리히에게로 향하게 되었으니.
“…….”
석상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던 프리드리히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딱 1분이 지난 이후였다.
“……폐하께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셨다.”
“그 말씀은……?”
프리드리히가 꺼내든 말에 화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조금이나마 그려진 그림이 더욱더 정확성을 갖추어가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화이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리게 되었고, 그런 화이트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프리드리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과연 진정으로 12마왕과 정면으로 대적해도 되는 것인지, 비록 루시펠이 가세했다고는 하나, 제국에게 그럴 만한 역량이 있는 건지.”
“…….”
“……폐하께서는 짊어진 짐이 많으신 분이니, 결론을 내리는 것에 있어서는 언제나 신중해야만 하신다.”
한 차례 그렇게 말을 끊으며, 프리드리히가 얕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치 할 말을 정리하기라도 하는 듯이,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고.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시간은 흐르고 있지. 언제나 그랬듯이.”
“…….”
이내 프리드리히가 꺼내 들기 시작한 말은, 화이트의 신경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화이트의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기 시작했고, 그에 프리드리히가 미간을 좁히면서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금의 마왕이 죽은 시점에서, 전란의 기운은 고요하게 대륙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지요. 누군지도 모를 자가 12마왕의 일원을 죽였으니, 12마왕 측에서도 반응이 안 올 수가 없을 테죠.”
화이트의 태연하기 짝이 없는 말에 프리드리히가 이마를 짚었다.
“……그 누군지도 모를 자가 바로 네가 아니더냐, 화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는 숨길 수도 없는 일,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로 결정한 듯하였다.
프리드리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으나, 끝끝내 화이트는 무어라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프리드리히가 재차 입을 열 수밖에 없었으니.
“하아……. 그 건에 대해서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고. 얘기를 되돌리자면.”
조금은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프리드리히가 말을 이어나갔다.
“……결국 12마왕 측에서도 무언가 반응이 오긴 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루시펠의 제안을 수락했고, 동시에 12마왕의 움직임에 어떤 형태로든 대응을 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 폐하의 의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 말씀은, 황제 폐하에게는 알리지 않고 따로 움직이고 계시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즉각 돌아온 프리드리히의 대답에, 화이트가 잠시 미묘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 찬찬히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의 표정을 살피다가, 이내 화이트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에 제 아버지와, 리이칸테르 후작 각하께서도 동조하고 계시고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래, 다 맞는 말이지.”
테이칸과 리이칸테르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결국 프리드리히가 긍정의 말을 내뱉었고.
“흐음…….”
그에 어째서인지, 화이트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건 내게 있어서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속으로는 조심스레 그런 생각을 품으며, 화이트가 진중한 기색으로 루시펠을 포함한 네 명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
“12마왕은 언젠가 움직일 테지. 이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
프리드리히가 내뱉은 말에, 화이트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실제로 현재, 12마왕 중 둘이나 그 목숨을 잃은 이상.
‘샤사르로서도 움직이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테지.’
그도 그렇지 않겠나.
금의 마왕이 죽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한 명의 마왕이 그 목숨을 허무하게 잃어버렸다.
동시에 그 범인의 정체가 또다시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았다면.
아마 열불이 오르다 못해 뒷목을 잡고 쓰러져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상상하자니 참으로 즐겁기 그지없어서, 화이트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지. 표정 관리, 표정 관리.’
그리고 다행히 그러한 기색을 눈치채지는 못한 걸까.
“……이어서 말하자면, 황제 폐하께서 채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필시 무언가 큰 사건이 또다시 터져나오리라고 예상했다.”
프리드리히가 진중한 표정을 띄운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들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만은 않아. 그런 와중에,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르지만 또 하나의 마왕이 그 목숨을 잃었지.”
“……음.”
조금은 양심에 찔리긴 하였을까, 화이트가 움찔한 기색으로 시선을 조심스레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향해 난감하다는 기색으로 프리드리히가 재차 입을 열었으니.
“적의 마왕은 반드시 움직일 거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그 범인을 색출하고자 대륙에 혼란을 가져오겠지.”
“……필시 그러할 테죠.”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가 그에 동의를 표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쯤에서 프리드리히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기 시작했고.
“……나 역시 12마왕을 이 대륙에서 완전히 지워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애초에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던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미 벌써 두 명의 마왕이 그 목숨을 잃었으니.”
“…….”
“나로서도 무언가 행동을 보일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연스레,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가기에 이르렀다.
*****
“내가 널 도우마, 화이트.”
“…….”
프리드리히가 내뱉은 짧은 한마디에,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화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그런 기색에도 상관하지 않고, 프리드리히가 그저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네가 왜 마왕들을 적대시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름대로의 결연한 의지가 존재하리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지.”
한 차례 말을 끊으며, 프리드리히가 진중한 눈빛으로 화이트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이트 역시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해내지 않았다.
그저 올곧게, 프리드리히와 화이트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실의 대마도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에는 제약이 있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이 곧 제국의 의지로 간주될 것이고,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조금은 씁쓸한 듯이 프리드리히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기에 나는 직접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에드발트 경께서 대놓고 12마왕을 대적하겠다는 뜻을 드러내면, 그 이후의 일은 뻔할 테니까요.”
“……그래.”
화이트가 덧붙였고, 그에 프리드리히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며, 프리드리히가 재차 입을 열었으니.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다, 화이트.”
“…….”
“……비록 황실의 대마도사로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네 의지를 돕겠다는 뜻이지.”
끝내, 프리드리히가 그렇게 말을 끝맺었고.
자연스럽게도, 화이트의 표정은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제국의 비수가 되어라, 화이트.”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향해서, 프리드리히가 고요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냥개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제국이나 폐하의 명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필요도 없어. 애초에 처음부터 네게 제국의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나는 네게 가능성을 걸어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고작해야 7서클의 경지로 마왕을 죽였다면, 필시 네게는 마법에 있어서 단순한 7서클의 마법사 이상으로 특별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일 테지.”
“……그렇기에, 나는 너를 차세대의 대마도사로서 희망을 맡기고자 한다.”
“마왕을 적대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치루고, 끝내 그들을 이 대륙에서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것.”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이, 네게 가능하겠느냐?”
“…….”
그리고 끝내 프리드리히가 말을 마무리 지었을 즈음에도, 화이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이, 혹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이.
화이트가 적어도 겉으로만큼은 분명하게 무감정해 보이는 표정을 띄웠고.
“조금.”
최종적으로 화이트가 내뱉은 말은.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여지를 달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의, 보류의 한마디였으니.
화이트가 올곧은 눈동자로 프리드리히를 직시했으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해한다는 듯이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