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4)두 번째 복수
“……헉, 허억.”
숨을 거칠게 고르며, 아파르가 어지러운 시야에 한 차례 이마를 짚었다.
전신에서 힘이 쫘악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아파르가 힘없이 몸을 무너뜨렸다.
쿵!
그 거대한 육체가 쓰러지며 한 차례 소음을 만들어냈다.
‘……무슨, 일이.’
아파르의 눈동자 위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애써 움직이며, 아파르가 고개를 들어 어느새 흐릿해진 시야로 한 소년을 잡아냈다.
“…….”
소년, 화이트가 오연한 시선으로 아파르를 그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래 걸려 있어야 할 터인 잿빛의 맹세는 그 형태를 무(無)로 바꾸어 사라져 있었으니.
“……어떻게?”
아파르의 표정 위로 경악이 섞인 감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없앤 거지?
자신의 고유 마법을, 잿빛의 맹세를.
맹세가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 위력은 가히 9서클을 넘나드는.
……자신의 궁극의 기술을, 마법을.
어떻게, 저 어린 애송이가.
아무런 피해조차 받지 않은 모습으로, 태연하게 파훼해 낸 거지?
‘……아니.’
아파르가 떨리는 눈동자로 그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봤다.
“…….”
……정말로 없앤 게 맞는 것인가?
마법을 파훼해내,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게 맞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자신의 몸뚱이는 이렇게나 무거운 것이지?
평소였다면 결단코 느껴지지 않았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감각에 아파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회담 이후, 샤사르의 암묵적인 허락 하에 리이칸테르 후작가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
마침 알맞게 허물을 벗어내고, 현 리이칸테르 후작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가문의 기사단을 비롯한 강자들을 하나하나 맛볼 예정이었는데.
“…….”
아파르의 동공이 유례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인가.
갑작스레 그 모습을 드러낸 어린 소년에게, 어찌하여 그 자신은 힘없이 몸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아, 아.”
아파르의 입술을 비집고 여러 감정이 섞여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내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감정은, 경악과 한 줄기의 두려움이었으니.
“……너는, 넌. 넌 정체가 뭐냐, 대체.”
이윽고 아파르의 시선이 끝내 닿은 곳은 화이트가 서 있는 장소였다.
“…….”
아파르의 흔들리는 시선을 받아내며, 화이트가 묵묵히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대답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듯이, 그가 한손에 청백색의 창을 만들어냈고.
천천히, 느긋한 걸음걸이로.
화이트가 아파르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오지 마라.”
“…….”
“……오, 오지 말란 말이다!”
당연하게도 아파르의 표정은 썩어들어가듯이 일그러졌으니.
후욱!
쓰러진 와중에도 손에 들고 있던 그 자신의 검을 거칠게 휘두르고 보는 아파르.
콰과과과광!
잿빛의 검기가 화이트에게로 날아들어 가며 사방을 찢어발기듯 파쇄해나갔다.
……그러나.
“…….”
화이트는 그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평온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운 채, 화이트가 창을 앞으로 내밀었고.
이내.
서걱!
“……!”
가벼운 휘두름과 동시에, 아파르의 잿빛 검기는 허무하게 잘려나갔으니.
한순간에 아파르의 표정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 납득할 수 없는 불합리함에.
“……대체 뭐냔 말이다!”
아파르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너, 네놈은 대체 뭐길래, 나의 계획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리 방해를 해오는 것이냐!”
“…….”
“너만 아니었어도, 너 같은 정체 모를 놈만 아니었어도! 나는 리이칸테르 후작가를 집어삼키고, ‘우리’들의 계획은 끝내 시동을 걸었을 텐데!”
아파르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 화이트가 한 차례 눈썹을 까딱거렸다.
“……우리들, 이라.”
“……!”
그리고 아파르의 말에서, 걸리는 단어를 한 차례 입에 담으며.
푸욱!
“크아아아아악!”
화이트가 아파르의 어깨에 창을 내리꽂았다.
아파르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럼에도 상관하지 않은 채.
“12마왕의 계획, 네가 말하는 계획이란 그것을 뜻하는 것일 테지.”
화이트가 평온한 어조로 말하며 몸을 살짝 낮췄다.
이내 그가 아파르와 시선을 마주했고, 자연스레 아파르의 두 눈동자가 소름 돋게 떨리기 시작했다.
“……네, 네놈.”
“…….”
사시나무 떨듯 몸을 요동쳐대는 아파르를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화이트가 창을 회수했다.
촤악!
“……!”
아파르의 어깨에 박혀 있던 청백색의 창이 뽑혀 나오며, 붉은 피가 한 차례 사방에 흩뿌려졌다.
“……너희들은 말이야.”
그리고, 아파르가 채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열었으니.
“도대체 뭘 바라는 거지?”
“……무슨, 소리를.”
화이트의 나직한 목소리에 아파르가 동공을 떨어대면서도 시선을 조심스레 피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이트가 그저 할 말을 이어나갔다.
“나의 스승을 이용해서, 대체 무엇을 바라기에 그런 짓까지 저질렀던 건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
아파르의 낯빛이 기괴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미지의 공포에 몸은 연신 떨리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눈앞의 소년이 내뱉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아파르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내뱉는 거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자신은 이해가 불가능했고.
그에 당연하게도, 아파르의 표정은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들며 일그러졌으니.
“……‘그때’는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런 아파르를 지그시 바라보며, 화이트가 찬찬히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들의 목적이 뭐였든 간에, 이미 시작된 일이었고, 예정된 종말이었지.”
“……네놈,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도저히 버티지 못했던 걸까.
아파르가 무어라 부정의 말을 내뱉으려 했으나.
“닥치고 들어라, 아파르.”
서걱!
“크아아악!”
곧바로 잘려나가는 그 자신의 왼팔의 감각에, 아파르가 눈을 부릅떴다.
잘려나간 그의 한쪽 팔이 허공에서 한 차례 회전하며 이내 바닥을 뒹굴었으나, 피가 솟구치지는 않았다.
그 자신의 팔이 잘린 단면이 어느새 얼어붙어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아파르가 입술을 얕게 떨어댔다.
이내 그의 눈동자 위로 떠오르는 건, 불순물 하나 없는 분명하고 명확한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파르를 그저 태연하게 마주하며.
화이트가 창을 한 바퀴 돌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정된 종말, 그렇기에 나는 그저 오로지 하나의 목적에만 몰두했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아련한 기색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끝내 나는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기 직전에 하나의 마법을 창조해내는 것에 성공했지.”
동시에, 9서클의 끝자락을 넘어서 그 너머의 아득한 경지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기도 하였고.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아파르가 들을 필요는 없는 말이었고, 구태여 말을 꺼내 일말의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기에.
화이트가 창에 그 자신의 푸른빛의 마나를 담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우웅-
주인의 감정에 동조하듯이, 창과 마나가 일정한 움직임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
그리고, 금방이라도 그 자신의 목을 베어 들어올 것만 같은 그 창에.
아파르는 그저 몸을 떠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고.
그런 아파르를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화이트가 창을 다시금 내질렀다.
서걱!
“……!”
다시 한번 절삭음이 울려 퍼졌고, 이번에는 아파르의 오른팔이 허공에 붕 떴다.
“네놈들의 목적, 그걸 밝혀라.”
“……무슨, 소리를.”
어느새 사지 중 두 개를 잃은 채로, 아파르가 떨리는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다.
“목적, 이라니. 무슨 말인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군.”
목소리만큼은 연신 떨리고 있었으나.
끝내 그의 입에서부터 12마왕의 목적과 계획이 튀어나올 일은 없었다.
“…….”
두려움에 떨면서도, ‘계획’에 대해서는 절대 입에 담지 않겠다는 듯이 확고하게 번뜩이는 그의 두 눈동자에.
“……그런가. 딱히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화이트가 씁쓸한 한숨을 한 차례 내뱉었다.
약간의 아쉬움, 그러나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반응이었기에.
“그럼, 이제 네게 볼일은 없다.”
“……!”
화이트가 분명한 살기를 그 자신의 창에 담아내기 시작했고.
아파르의 몸이 마치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떨려대는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아파르를 그저 고요한 살의가 담긴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저번 생에는 네놈의 위치를 알 수 없었지만.’
화이트가 찬찬히 상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12마왕의 위치, 그 본거지.
혹은 최소한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는 그 가식된 신분이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그렇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아셰라가 벼랑 끝까지 몰려있는 것도 몰랐고.’
자신의 스승을 이용해, 12마왕이 무언가 역겨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조차 알고 있지 못했으니.
그 자신이 한심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기에, 한때는 자괴감에 휩싸여 절망에 빠진 채로 시간을 허무하게 보낸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화이트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 올렸다.
그래, 이제는 그럴 필요 따위는 하등 없었기에.
자신의 곁에는, 아직까지 멀쩡하게 그녀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제부터는 그저 그녀를 지키기 위해 행동해나가면 될 일일 뿐이니까.
“루시펠에게는 감사해야겠군. 덕분에 이렇게 일찍 네놈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동시에, 이렇게 일찍 네놈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고.
입매를 비틀며, 화이트가 비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어차피 그 금발을 다시금 잿빛으로 물들였다는 건, 정체를 드러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나?”
정말이지 기쁘기 그지없다는 태도로 화이트가 환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웠고.
이윽고, 바로 직후.
“─잘 가라, 아파르.”
화이트가 살벌하게 눈빛을 번뜩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으니.
콰아아아아!
그의 창에서부터 푸른빛의 마나가 거칠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서걱!
“……!”
무척이나 가볍고, 지극히 자그마한 절삭음이 한 차례 울려퍼짐과 동시에.
툭!
잿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그와 함께 아파르의 머리가 힘없이 스러져 내렸다.
“…….”
그리고.
그런 광경을, 조금은 허탈한 듯이 쳐다보던 화이트는 이내.
“……아.”
그 몸을 한 차례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눈을 깜빡여댔으니.
‘……반영의 거울을 사용하느라고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했나.’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신의 고유 마법 중에서도 ‘반영의 거울’은 그 난이도와 필요한 마나의 양이 상당한 축에 속하였기에.
시야가 흐릿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화이트가 이마를 짚었다.
‘쓰러지면 안 되는데.’
……제법 빠르게 교전을 결말 짓기는 하였으나.
이쯤 되면, 소란을 눈치챈 리이칸테르 후작가의 기사단이 당장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아.”
그렇지만, 그런 현실적인 고민들과는 별개로.
화이트는 점차적으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그저 가만히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끝내는.
“……이런, 젠장.”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화이트가 비틀거리며 몸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차마 손을 내뻗을 틈조차 없이, 화이트의 몸이 머리부터 바닥에 내려꽂히려 하고 있었다.
‘……피곤하다.’
그렇지만, 그저 무력감이 전신을 덮쳐드는 감각에.
화이트가 서서히 두 눈을 감았고.
“──.”
이윽고, 화이트가 완전히 그 몸을 쓰러뜨리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사아아-
“…….”
한 차례, 잔잔하고도 어딘가 평온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 불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쓰러지는 도중, 화이트는 볼 수 있었다.
“아…….”
무척이나 익숙하고도, 동시에 지금은 없어진 시간대에서는 한없이 바랐던.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모순적이게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검은빛 머리카락을.
그리고 이내, 두 눈을 흐릿하게 뜬 화이트의 시야에 한 소녀가 잡혔으니.
“수고했어요, 나의 제자님.”
“…….”
달콤할 정도로 나긋나긋하게, 귓가에 속삭여오는 그 자신의 스승의 목소리에.
“……예, 스승님.”
화이트가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며, 천천히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