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3)잿빛의 맹세
“…….”
혹한의 폭풍이 몰아치는 저택의 한복판.
화이트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조심스레 기세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모든 감각은 폭풍으로 인해 일어난 먼지구름의 중앙에 집중시킨 채로.
그렇게, 얼마나 되는 시간 동안 먼지구름을 직시하고 있었을까.
화이트의 턱선을 타고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려 지면을 적실 즈음.
“……!”
콰아아아아아아앙!
고막을 찢어발기는 것만 같은 폭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네놈!”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아파르의 분노 섞인 목소리와 함께 그가 화이트를 향해 날아들었으니.
“쯧.”
화이트가 혀를 차며 다시금 양손에 마나를 머금었다.
끝내지 못했다.
물론, 그 한 차례의 마법으로 간단히 회색의 마왕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나.
‘……회귀 전과는 다르게, 아직까지 8서클에 머물러 있기에.’
잘하면 일순간에 몰아붙여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회귀 전, 회색의 마왕 아파르는 9서클의 경지에 오른 대마도사였으니.
한 차례 그와 무력으로 맞붙은 적이 있던 화이트로서는,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끝맺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회색의 마왕이란 이명은 허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쿠우우우웅!
“……큭!”
위에서부터 내리 찍혀 오는 검격에, 화이트가 한 차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고는 검을 최대한 빗겨내며 뒤로 물러나는 화이트.
그의 눈동자에 진지한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넌 여전하구나, 아파르.”
“……나를 알고 있나?”
화이트의 짤막한 한마디에, 아파르가 의구심이 섞인 시선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그로서는 화이트를 본 적이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아직 20대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이 그 자신과 대등하게 맞서온다는 상황 자체에 아파르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그런 정체불명의 소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름을 불러 왔으니.
아파르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알고 있느냐, 라.”
그리고 그쯤에서,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느새 창은 흩어지게 만들고, 양손에 찬란한 푸른빛의 마나를 머금은 채로.
화이트의 입꼬리가 살짝 끌어 올려졌다.
“잘 알고 있지. 회색의 마왕, 아파르.”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애초에 12마왕이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그와 악연을 맺고 있었으니까.
화이트에게 있어서, 12마왕은 같은 하늘 아래에 존재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있어서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나, 아파르?”
“……?”
돌연 화이트가 그런 말을 내뱉었고, 그런 뜬금없는 소리에 아파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이 어린 애송이가 무슨 소리를 꺼내는 것인가.
딱 그러한 말을 대언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잘 들어. 지금의 너는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승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그 원인이 너를 향한 복수라는 것 정도는 알고 가야 하지 않겠나.”
“…….”
화이트의 비꼬는 듯한 어조에, 아파르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네놈.”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건, 분명한 분노의 빛이었고.
“죽여버리겠다.”
후욱!
이어지는 말 따위 듣지 않겠다는 듯이, 아파르가 검을 한 차례 거칠게 휘둘렀다.
콰앙!
“네가 누군지는 모른다.”
아파르가 지면을 박차고 튀어 나갔고, 그에 대지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제국의 숨겨진 전력이든, 잠적한 대마도사의 제자든 간에. 그딴 것들은 하등 상관없다.”
순식간에 화이트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아파르가 검을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그에 대처하기 위해 화이트가 손을 펼쳐 들었으니.
「배리어」
이내 화이트의 방어막과 아파르의 검이 격돌하며 거대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한 차례, 마나의 파동이 거칠게 사방으로 퍼져나갔으나.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두 마법사가 서로를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 나갔다.
아파르는 그 자신의 잿빛 마나를 이용한 검술을 연신 펼쳤고, 화이트는 그런 검격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
“네가 꺼내든 그 말, 그대로 돌려주도록 하지.”
“…….”
아파르가 살벌하게 눈빛을 번쩍였고, 그에 화이트가 얕게 이를 악물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화이트와 아파르가 한 차례 서로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정체 모를 애송아,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
“회색의 마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겠다.”
아파르가 섬뜩한 목소리로 그리 말을 끝맺었고.
콰아아아아아아!
바로 다음 순간, 아파르의 전신에서부터 거친 마나가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왔으니.
그건 아무리 8서클의 끝자락에 오른 대마법사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종류의 마나가 아니었다.
8서클의 경지, 그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반강제적으로 경지를 끌어 올리는 수법.
그리고 그 정체에 대해서, 화이트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회귀 전, 회색의 마왕을 단신으로 상대한 후 뼈저리게 감당해야만 했던 마법일진대.
“……고유 마법, 맹세.”
화이트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그 정체에 관해서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 짤막한 한마디에, 아파르가 한 차례 손목을 꺾었다.
“내 힘을 알고 있다, 라. 뭐, 이제와서는 상관없나.”
그의 검에서부터 무시할 수 없는 패도적인 기운이 뻗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그리고 그 기운은, 사방을 뒤덮다 못해 끝내 화이트에게로 도달하기까지에 이르렀고.
“…….”
화이트는 그 기운의 파도를 피해내지 않았다.
애초에 피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화이트의 두 눈이 감기며, 시간을 되감듯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무너진 건물의 벽면에 등을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
그리고 그런 사내를, 또 다른 사내가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쿨럭.”
한 차례, 잿빛의 사내가 피를 토해냈다.
검게 물든 피가 지면을 적시며 어두운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어 갔다.
이내 사내의 시선이 그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금발의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잿빛의 사내와는 다르게, 그는 피로 몸을 적시고 있으면서도 머리칼만큼은 선명하고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으니.
마치 그림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풍경을 펼쳐지기 시작했다.
“클리포트의 가주, 화이트.”
“…….”
“……크큭, 대마도사 급 중에서도 가장 어리다고 무시 받던 그 클리포트의 새로운 가주가 설마하니 이런 괴물이었을 줄이야.”
잿빛 머리카락의 사내, 아파르가 허탈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아파르를, 화이트는 그저 무감정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고.
“…….”
한 차례, 무거운 정적이 깊게 내려앉았다.
두 사내가 서로를 향해 각자의 감정을 담은 눈빛을 번뜩였다.
그리고, 이내.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나?”
“…….”
아파르가 재차 입을 열 즈음에는, 그의 몸에서부터 잿빛 마나가 다시금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화이트의 눈동자가 더욱 어둡게 침체되기 시작했다.
우웅-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이트가 그 자신의 양손에 재차 푸른빛의 마나를 머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마나가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화염구와 같이 그 형태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크흐흐.”
그리고 그런 살벌한 마나를 두 눈에 담으면서도, 아파르는 그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실실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 기이한 광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다, 화이트 클리포트. 내 고유마법은 이미 발동되었어.”
“……그런가?”
우웅-
더 이상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까.
화이트가 그 말을 끝으로, 강렬하기 짝이 없는 마나가 담긴 창을 아파르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회색의 마왕, 아파르.”
“…….”
연신 웃음을 실실 흘리는 아파르를 향해, 화이트가 무기질적인 눈빛을 한 차례 번뜩였다.
이내 그 푸른 눈동자 위로 떠오르는 것은, 그저 고요한 살의에 불과했으니.
“이만 죽어라.”
푸욱!
짤막하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화이트의 창이 아파르의 심장을 관통했다.
“……커헉.”
당연하게도, 아파르는 또다시 피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고.
아파르는 그 순간, 그 자신의 죽음을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곧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무슨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그런 무자비한 죽음의 사신이 자신을 찾아올 터.
“……흐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르는 그저 계속해서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
그쯤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화이트가 불쾌한 기색으로 한 차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이내.
“……!”
화아아아악!
아파르의 전신에서부터 잿빛의 기운이 만개하듯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으니.
“……나의 고유 마법이다, 화이트 클리포트.”
씨익!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파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죽지만.”
“……네놈.”
“크흐흐, 너 역시 곧 나와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겠지. 내가 아닌, 다른 마왕에 의해서 말이다.”
아파르가 그렇게 불쾌한 눈웃음과 함께 말을 끝맺었고.
바로 직후.
『잿빛의 맹세』
“……!”
12마왕의 일좌를 차지한, 대마도사 급의 마법사.
회색의 마왕, 아파르의 고유 마법이 펼쳐지며.
잿빛의 파도가 화이트를 물어뜯기 위해서 거칠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그 이후로 많이 고생했지. 네 저주를 풀어내느라고.”
“……?”
그 자신의 고유 마법에 정확하게 걸려든 주제에, 태연히 입을 여는 화이트를 바라보는 아파르의 표정이 기괴하게 바뀌었다.
그도 그렇지 않겠나.
그 역시 마법사라면, 자신이 펼친 이 잿빛의 고유 마법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을 터.
고유 마법, 잿빛의 맹세.
그 마법의 효과는, 한 가지의 맹세를 선언하는 것으로 하나의 ‘대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
저주를 걸거나, 혹은 상대의 힘을 강제적으로 탈취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 이외의 어떠한 것이라도 가능한.
무궁무진한 응용력을 가진 마법.
그 응용의 가능성은, 맹세를 반드시 지킨다는 가정 하에 실로 한도가 없을 정도였기에.
“……네놈.”
그에 더해, 저 어린 놈은 그 자신의 고유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더더욱, 저렇게 태연자약한 반응이 나올 수가 없는데.
……없어야만 할 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파르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묘한 불길함이 서서히 올라오는 감각을 느끼며, 아파르가 손을 쫘악 뻗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이미 나의 마법에 걸려들었다.”
“…….”
“너의 마나는 이제 나의 것이고, 나를 위해 운용되기 시작할 테지.”
……이어지는 아파르의 말에도, 화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는, 아파르로 하여금 불길함을 한층 더 느끼게 만드는 것에 성공적이었고.
아파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엇이냐.
무엇이냔 말이다.
저 애송이는 이미 자신의 마법에 완벽할 정도로 걸려들었고.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마나가 흡수되어 가는 감각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어찌하여.
저 어린 놈은, 저리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단 말인가.
‘……이런, 개 같은.’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불안감에, 아파르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그거 아나, 아파르?”
그쯤에서, 화이트가 드디어 말문을 떼어냈다.
어느새 화이트의 입가에는 선명한 미소가 걸쳐져 있는 채였다.
“나는 이미 네 고유 마법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저주로 인해 한참이나 고생한 전적 역시 있고.”
“……네놈, 무슨 말을─”
아파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대꾸하고자 했으나.
“단순하게 말해서, 나는 한 번 기회를 얻은 셈이지.”
그런 아파르의 말을 그저 태연히 끊어내며, 화이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전히 잿빛의 맹세에 걸려서, 마나를 빼앗기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화이트의 태도에 아파르의 불길함이 점점 선명하게 그 형태를 갖춰갈 때 즈음.
“……네 마법에 저항할 만한, 그야말로 딱 알맞은 술식을 연구해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말이다.”
“……!”
화이트가 다시금 입을 열었고.
화아아아아악!
“자, 네 두 눈으로 봐라.”
바로 직후, 화이트가 유려한 궤적을 남기며 푸른 안광을 번뜩였으니.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미소와 함께, 화이트가 순식간에 하나의 마법진을 그려냈다.
“……이게 바로.”
우웅!
마나가 움직임과 동시에, 공기가 한 차례 두려움에 떨기라도 하듯이 공명했다.
“네 저주에 고생한 전적이 있기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술식이자, 내 고유 마법이니까.”
“……무슨 말을─”
깊숙한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한 채, 아파르가 무어라 대꾸하려 했으나.
쩌어어엉!
“……!”
바로 직후, 화이트의 양손에 그려진 마법진이 시전되었고.
“이게, 무슨……!”
곧바로 느껴지는, 전신에서부터 마나가 빨려져 나가는 익숙하고도 생소한 감각에.
“……윽!”
아파르가 눈을 부릅뜨며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하하.”
그리고.
그런 아파르를, 마치 둘도 없는 재밌는 광경을 관람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짙은 미소와 함께 쳐다보며.
화이트가 끝내 손을 일자로 내리그었고.
쩍, 쩌적.
쩌저저저저적!
이윽고, 푸른빛을 발하는 찬란한 마나와 함께.
화이트를 감싸고 있던 ‘잿빛의 맹세’가, 역으로 아파르를 향해 날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고유 마법.”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화이트가 무척이나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반영의 거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