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리이칸테르의 마왕
“…….”
한 사내가 있었다.
거대한 몸체, 흘러내리는 금발, 번쩍이는 푸른색의 안광.
허리춤에 묶여 있는 하나의 장검.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슴 부근에 달려 있는 하나의 문장.
그것은, 제국의 검술명가인 리이칸테르 후작가의 문장이었다.
“형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
사내가 중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내의 뒤편에 부복하고 있던 한 소년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 그것이.”
굳이 말하자면 사내의 어조는 무척이나 평범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소년은 지나칠 정도로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혼합된 표정을 띄우고 있는 소년이었지만.
가장 강렬하게, 소년의 눈동자 위로 떠올라 있는 감정은 명확한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흐음.”
그리고 그쯤에서 사내가 한 차례 턱을 괴고 숨을 흘렸다.
애초에 별다른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던 걸까.
“되었다, 이만 물러나도록.”
사내가 대충 손을 휘저으며 소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예.”
그에 소년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표정을 굳히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
끼익-
소년이 그렇게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고.
이내 홀로 남은 사내는, 그저 창밖만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천천히 사내의 푸른 눈동자 위로 흐릿한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혹은 무언가에 야망을 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모를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방 내부에는 이제 사내 혼자밖에는 남지 않았으니.
“……움직여야 하는가.”
사내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수백 년 동안 육체를 바꿔오며 이 가문의 뒤에서 암약하던 것도 이제는 질렸지.”
이내, 서서히 사내의 입꼬리가 섬뜩한 느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를 아는 자라면, 필시 놀라 대경실색하였을 터.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자들의 앞이었더라면.
사내는 절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것이기에.
“크큭, 크하하…….”
천천히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불쾌한, 마치 공기를 긁고 지나가는 것만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
뚝.
사내의 웃음소리가 한순간에 잦아들었으니.
그야말로 갑작스레, 어쩌면 조금은 소름 끼친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변화였다.
이내 사내의 표정 위로 무기질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현세대의 리이칸테르 후작이여.”
그러나 명확하게, 마치 상쾌하기 그지없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이제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하나하나 형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도 질렸다.”
사내가 섬짓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고.
쿠궁, 쿠구궁…….
그와 동시에, 리이칸테르 후작가의 저택이 마치 지진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사내로부터 새어나오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기세에 의해서.
후욱!
그리고, 사내가 일순간에 기세를 폭발적으로 터뜨리며 검을 꺼내 들었으니.
“……오늘부로 리이칸테르 후작가는 내가 집어삼킨다.”
사내의 눈꼬리가 기분 나쁜 형태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마치 악마가 미소를 짓는 것만 같은 눈웃음이었다.
우웅-
……천천히, 사내의 검이 그 주인의 의지에 따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검에 떠오르는 기운의 빛깔은.
리이칸테르 후작가를 상징하는 금빛 오러가 아닌, 마법사의 마나와도 같은 푸른빛이었고.
바로 직후.
쩌어어어어억-
마치 지면이 갈라지는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누가 보더라도 경악에 몸을 떨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정도의 괴기한 현상이었으나.
적어도 그 당사자는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툭, 투둑.
이내, 사내의 얼굴이 완전히 쪼개지며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뿐일까, 어느새 사내의 금빛 머리카락은 어두운 잿빛을 띠고 있었다.
그야말로 강렬한 불에 의해 타들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하게 빛깔을 잃어버린 회색이었다.
“…….”
사내의 두 눈동자 위로, 서서히 고요하고도 섬뜩한 기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내의 검에 맺혀 있던 마나는, 어느새 푸른색에서부터 짙은 잿빛의 색깔로 그 형태를 바꾼 지 오래였다.
“샤사르 역시 나의 이러한 결정에 토를 달지는 않을 터.”
연신 홀로 중얼거리며, 사내가 창가에 반쯤 몸을 걸쳤다.
아득한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푸른 하늘을 한 차례 흘겨보는 사내.
“……기분 나쁜 푸른색이로군.”
그리고, 한 차례 그리 중얼거림과 동시에.
후욱-
사내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고.
쩌어어어어어어엉!
그 가볍기 그지없는, 어쩌면 검을 ‘털어낸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일격에.
푸른빛을 띠던 창공이 한순간에 그 빛깔을 잿빛으로 바꾸어버렸으니.
“가급적이면 돌아오지 마라, 리이칸테르 후작.”
사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그 순간, 네 목은 지면에 떨어져 내릴 터이니.”
그야말로 허무하게.
일말의 반항조차 시도해보지 못하고, 몸뚱이와 머리가 반으로 갈라질 것이기에.
“크하하…….”
잿빛 머리카락의 사내.
외부에서는 리이칸테르 후작의 친동생이라 알려진 그.
“크하하하……!”
그러나 그 진정한 정체라 함은, 12마왕의 일좌를 차지한 ‘회색의 마왕’이었으니.
“크큭, 크하하하하!”
그런 그가, 광인의 그것과도 같은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
창가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시선이 하나 있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걸까.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어서,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는 걸까.
그 모든 것은 알 수 없었고,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문제일 테지만.
솔직히 관심은 없었다.
그저 분노했다.
‘너는 웃을 자격이 없다.’
허무하지만, 동시에 그 무슨 감정보다도 강렬하기 짝이 없는.
그런 무채색의 분노를 터뜨리며.
“─뭐가 그리도 웃기나, 아파르.”
“……!”
콰아아아아아아앙!
거친 굉음과 함께, ‘소년’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로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직후.
회색의 마왕, 아파르가 채 무언가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콰앙!
소년, 화이트가 지면을 폭발적으로 밟으며 아파르를 향해 뛰쳐나갔으니.
“──.”
쩌어어어어어엉!
어느새 화이트의 손에 들려 있는 청백색의 창과, 아파르의 잿빛 검이 거칠게 맞부딪히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아파르의 표정 위로 당황스러운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감정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차마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니, 채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
화이트가 그 자신의 창을 일자로 길게 쭉 내뻗었고.
화아아아악!
“……크윽!”
순간적으로 창에서부터 터져나온 선명한 푸른빛의 마나에, 아파르는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후웅!
그 이후로도, 차분한 대응 따위는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화이트가 연신 창을 내질렀다.
일자로 내리긋고, 대각선으로 올려치고, 일직선으로 내찌르기도 하며.
아파르로 하여금 두뇌를 굴려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화이트가 그 자신의 마나를 폭발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알려주지.”
“……?!”
콰앙!
화이트가 창에 담겨 있는 마나를 터뜨렸고, 그에 아파르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길게 밀려났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을 타, 아파르는 그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소년?’
이내, 아파르의 표정 위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
그의 상식으로서는, 그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소년’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아파르가 무언가의 상념을 이어가지도 못한 채 입을 쩍 벌렸고.
“너는 여기서 죽어. 이건 바뀔 일 없는 ‘진실’이다.”
그런 그를 향해 그저 무감정하게 중얼거리며.
“……무슨?”
“…….”
콰앙!
화이트가 재차 지면을 박차고 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
바로 직후, 아파르는 뒤편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척에 순간적으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쩌어어어엉!
다시금 아파르의 검과 화이트의 창이 맞부딪혔다.
쾅, 콰앙, 콰아아아앙!
리이칸테르 후작령.
그 중심부, 가문의 저택에서 연속적인 폭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 있는 화이트는, 그저 무아지경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으니.
그의 푸른빛 안광이 거친 궤적을 남기며 길게 늘어지기에 이르렀다.
‘더 빠르게, 이것보다도 더 아득한 속도로.’
창을 휘둘러라.
마나를 운용해라.
모든 기운을, 모든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려라.
방심해서는 안 되고, 잠깐의 틈조차 보여서도 안 된다.
12마왕이란 존재는 그 정도로 위협적인 괴물들이었고, 아직까지는 그들을 상대로 정면 승부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기란 무리가 있기에.
그저 상대로 하여금 무언가 유의미한 대응을 펼치지 못하게끔 만들며, 화이트가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다.
“하아…….”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짧게 숨을 고르며, 화이트가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쩌적, 쩌저적.
그에 반응하듯이,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어 갔고.
이내.
“─혹한이여.”
“……!”
화이트가, 작금의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영창을 읊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짧기 그지없게.
일말의 틈조차도 보이지 않기 위해, 모든 과정과 영창을 간결화하여.
“내 부름에 응해, 지금 이 자리에 그 가공할 만한 냉기를 현현시켜라.”
화이트가 그렇게 마법진을 한순간에 그려내었고.
“……무, 슨!”
아파르가 경악에 찬 눈을 번쩍이며 무어라 소리를 치려 하는 그 순간.
「블리자드」
“……!”
화아아아아아아아악!
대륙의 최북단, 그 혹한과 비교하여도 절대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냉기의 폭풍이.
그야말로 ‘강림’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정도의 변화를 현실에 만들어내며.
“크아아아아아악!”
회색의 마왕, 아파르를 한순간에 집어삼키기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