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복수의 길
“…….”
과연 자신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글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썩 볼 만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속으로 품으며.
화이트가 붉어진 얼굴을 소매로 가렸다.
“…….”
그리고 그런 화이트와 완전히 똑같은 행동을 하는 소녀가 한 명 있었으니.
“……으, 읏.”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아셰라가 고개를 홱 돌렸다.
평소라면 붉어진 화이트의 낯빛에, 무슨 말이라도 꺼내 놀리고자 했을 그녀였지만.
적어도 지금이라면, 그야말로 똑같이 붉어진 얼굴이라면.
도저히 그러지는 못하겠던 걸까.
그녀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
“…….”
한동안 기묘한 침묵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화이트도, 아셰라도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모두가 묘하게 기쁜 기색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으니.
이 어색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은 걸까.
화이트와 아셰라, 두 사람이 은근하게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거면서.”
“……아, 몰라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무슨 말을 했던가요?”
“말을 흐리기는…….”
화이트가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셰라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으나, 애써 그런 기색을 숨기려 하는 그녀.
“……아, 날씨가 제법 덥네요. 왜 이렇게 얼굴이 뜨겁지?”
열을 식히려는 듯이 아셰라가 애써 손을 파닥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마저도 귀엽다는 듯이, 화이트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고.
“아. 그보다, 제자님?”
“네, 스승님. 듣고 있습니다.”
아셰라의 부름에 화이트가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으니.
아셰라가 화이트를 향해 흔들리는 시선을 던지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 다른 건 다 치워두고서 말이에요. 원래 어딜 갈 생각이었던 거죠?”
“……흐음?”
뻔한 말 돌리기.
화이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다른 걸 다 치워두고서 얘기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네, 네?”
그런 대답은 차마 생각지 못했던 걸까.
아셰라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런 아셰라를 향해, 화이트가 슬며시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먼저 시작한 건 스승님이지 않습니까.”
“……그, 그건.”
집요하게 노려봐 오는 화이트의 시선에, 아셰라가 힘겹게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댔다.
그러나 그마저도 끝까지 쫓아가며, 화이트가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으니.
“뭘 마음대로 끝내시려고. 제가 우습게 보이셨나 봅니다?”
“으, 으으…….”
화이트의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아셰라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
이미 충분히 붉어졌다고 생각했으나, 역시 한계라는 것은 없었던 걸까.
한없이 붉어져만 가는 그 자신의 스승의 낯빛에 그런 생각을 품으며.
화이트가 한 차례 비웃음을 흘렸다.
“……한 번 넘어가 주길 바라나요?”
“제, 제자님?”
화이트가 아셰라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고, 그에 아셰라가 흠칫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읏, 으으.’
원래대로라면 건방지다거나, 어딜 하늘 같은 스승의 몸에 손을 대느냐며.
그렇게 내뱉고, 동시에 가학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제자를 벌할 아셰라였겠지만.
어째서인지 도저히 그 자신의 제자가 뻗어오는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기에.
쿵, 쿵.
“하으으, 하으…….”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어떻게든 감추고자 애쓰며, 아셰라가 반강제적으로 화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척이나 요동치는 눈동자로, 떨리는 시선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아셰라의 시선에, 화이트의 미소는 짙어져만 갈 뿐이었다.
“넘어가 주길 바라면, 아무 말 말고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세요. 스승님.”
“……네, 네?”
“어서.”
“…….”
점점 건방짐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나, 차마 그런 생각은 품지도 못한 채.
아셰라가 그 붉은 입술을 잘게 떨며, 끝내는.
“…….”
한 차례, 얕게 고개를 끄덕였고.
“……하하.”
그 자신의 말대로 행동하는 아셰라의 모습에, 화이트가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으니.
그야말로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이,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가학적인 기색 역시 함께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 그럼.”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말해 보세요, 스승님. 제발 넘어가 달라고, 한 번만 넘어가 주면, 무엇이든 해주겠노라고.”
“……네, 네?”
그리고, 그렇게 내뱉은 화이트의 한마디에.
아셰라의 표정은 그야말로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멍하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제, 제자님?”
아셰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녀가 간절한 기색으로 화이트의 손을 맞잡았다.
“이러지 말아요, 제자님.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글쎄요.”
그러나 화이트는 그저 완고했다.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화이트가 그 자신의 스승을 향해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그것만 확실하게 정하면 될 일입니다, 스승님.”
“……으, 으읏.”
아셰라가 몸을 움찔거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꺼내야, 무슨 행동을 해야만 자신의 제자님은 이런 짓궂은 짓을 멈춰줄까.
“…….”
평소라면 조금 더 나은 방법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겠으나.
요동치는 머릿속, 잘게 떨리는 손, 연신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에.
“제, 제자니이임…….”
도저히 떠오르는 방안이 없었기에, 아셰라가 그저 간절한 어투로 화이트를 연신 불러댔고.
“……하하.”
그쯤에서, 진심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걸까.
화이트가 그야말로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환한 미소를 한 차례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스승님.”
그리고는, 아셰라와 맞잡은 손을 조심스레 놓으며.
화이트가 싱그러운 웃음을 한 차례 흘렸으니.
‘……원하던 대답을 못 들은 건 조금 아쉽지만.’
……당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번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 드리죠.”
그래,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그렇지만, 만약 다음에 또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빚으로 남겨둘 테니까, 잊어버리지 말라고요. 스승님.”
그때는 과연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장담하지는 못하겠다는 감상을 느끼며.
화이트가 마치 자비를 베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내뱉었고.
“아……!”
그 한마디에, 아셰라가 반색하며 대꾸했으니.
“네, 제자님!”
……뭔가, 입장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생각은 도저히 품지 못한 채.
‘……으음?’
아주 약간의 위화감만을 느끼며, 아셰라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데…….’
“…….”
잠시 한 차례 그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는 아셰라였으나.
‘……뭐, 상관없나요. 한 차례 위험을 넘겼으니까.’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품으며,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래서? 진짜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거죠?”
“…….”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아셰라가 물었고, 그에 화이트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물어오기는.’
한 차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며, 화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디로 향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화이트가 짤막하게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궁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가주께도 얘기는 안 하고 나온 것일 테죠?”
“물론이죠.”
고개만 살짝 틀어 아셰라와 눈을 맞추는 화이트.
그가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진지해 보이는.
그런 모순적인 미소를 한 차례 지어 보였다.
“12마왕을 죽이러 가는 것에 있어서, 아버지께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
12마왕.
다시금 언급된 그들의 존재에, 아셰라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알고 있겠지만, 이건 지나치게 위험한 행동이에요.”
“…….”
그녀가 올곧은 눈동자로 화이트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 리치를 통해 위치를 전해 들었다지만, 정확한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는 건, 도저히 추천하지는 못하겠네요.”
“……그래서요?”
화이트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아셰라를 흘겨봤다.
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걸음을 계속해서 옮겨가면서.
“어리석은 제자를 막을 겁니까? 스승님.”
“……하아.”
화이트의 말에 아셰라가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쓴웃음이었으니.
“제자를 이기는 스승은 없다고 했던가요, 제가 어찌 제자님을 막겠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가 아니고요?”
“……아.”
화이트가 일침을 날렸고, 그에 아셰라가 한 차례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내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리며 화이트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
“……자잘한 문제는 그냥 넘어가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하하.”
화이트가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읏.”
당연하게도 아셰라의 표정이 수치심으로 물들었으나, 어쩌겠나.
“……뭐, 뭐. 어쩌라고요. 그보다 걷기나 하세요!”
“네, 네.”
아셰라가 속내를 감추고자 소리를 빽 질렀고, 그에 화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져주겠다는 듯이 걸음을 옮겨나갔다.
황궁을 빠져나가고.
이내 제도마저도 빠져나가서.
‘밤피르, 그리고 리이칸테르.’
……속으로는 마왕이 숨어있을 두 가문의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장난스러운 기색을 싹 지워내고는, 화이트가 그 푸른 눈빛을 한 차례 살벌하게 번뜩였다.
“…….”
……그리고.
조금 떨어진 뒤편에서, 그런 화이트를 뒤따르며.
아셰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으니.
‘……협정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설 수는 없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 위로 결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만약, 만약의 일이지만.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만약의 가능성이라도, 그 자신의 제자님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
천천히, 그녀의 눈동자 위로 섬뜩한 살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협정을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제자님을 지키겠습니다.’
그건, 굳이 말하자면 심하게 무리를 하게 될 일일 것이다.
12마왕 간의 협정을 깨부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분명 크나큰 손실, 혹은 페널티를 안고 가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제 제자님이 위협에 맞닥뜨린다면.’
자신은 분명, 그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가장 좋은 것은, 그 어떤 일도 없이 그 자신의 제자님이 원하던 바를 이루는 것이지만.
……만약에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경우.
그 위협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라도, 그 상대가 설령 그 적의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아셰라의 금빛 눈동자에, 화이트의 그것과 비슷한 살벌한 기세가 떠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