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9)장난이 섞인 고백
“…….”
황궁의 어느 복도.
환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가며, 화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회의는 우선 파하게 되었다.
에이단의 주장,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루시펠에 대한 일정 부분의 신뢰.
그로 인해 결국 루시펠의 정보는 반쯤 기정사실로 취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밤피르 후작가와 리이칸테르 후작가.
두 가문의 가주는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조금 더 뒤로 미루고, 황실 측과 좀 더 상세한 논의를 나누게 되었다.
뱀파이어의 피를 짙게 이어받았다는 밤피르 후작이나, 제국 최강의 기사라 불리우는 리이칸테르 후작이라 해도 12마왕이 그 상대라면 혼자의 몸으로서는 상대해낼 수 없을 터이니.
루시펠을 통해 정보의 우위를 잠깐이나마 점하게 된 지금, 조금 더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심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틈을 타서, 화이트는.
회의실을 재빠르게 빠져 나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으니.
“……어딜 가시는 걸까요?”
“…….”
순간적으로 측면에서부터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에, 화이트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슬쩍 틀었다.
“갑자기 나타나셔서 무슨 말씀입니까, 스승님?”
화이트가 아셰라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의 뻔뻔한 태도와 속내를 다 파악하고 있는 아셰라로서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시치미 떼지 마세요, 회의 내용은 저도 전부 엿들었으니까.”
아셰라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에 화이트가 살짝이나마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아 표정을 굳혔으니.
“……그거, 황실에 대한 반역죄나 다름없다고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
황제와 일곱 가문의 가주들 간에 오가는 대화를 제삼자가 엿들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그자는 예비 반역자로 취급될 터.
혹 그게 아니더라도 엄벌을 받게 될 것은 명확했다.
……그러나.
“후후, 제자님도 참. 저를 걱정해주는 그 모습은 보기 좋지만, 진심으로 그리 말하는 건 아니겠죠?”
“……음.”
아셰라의 말에 화이트가 미묘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예비 반역자니, 엄벌이니, 다 맞는 말이긴 하였으나.
이야기를 엿들은 제삼자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스승, 아셰라라면.
그 누가 그녀를 벌할 수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아마 어지간해서는 그녀가 엿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회의실 내부의 두 대마도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에드발트 경이나 루시펠이 무언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그들마저 속이기엔 무리가 있었을 텐데.”
“아, 그들 말인가요.”
아셰라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깜찍하게 한쪽 눈을 깜빡였다.
“뭐, 잘 넘어갔으니 된 것 아닐까요? 프리드리히는 암묵적으로 용인해 준 것 같고, 그 엘더리치는 프리드리히의 의사에 따른 듯하니까.”
“…….”
화이트의 표정이 심란한 기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내 한 차례 한숨을 푹 내쉬며, 화이트가 떨떠름하게 눈을 흘겼다.
“스승님, 조심 좀 하시죠.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여긴 제국의 중심입니다. 제국에서 작정하고 스승님을 노리면, 일이 많이 귀찮아질 겁니다.”
“흐응…….”
한 차례 묘한 비음을 흘리는 아셰라.
“……?”
그에 무언가 문제가 있느냐고, 화이트가 눈짓으로 묻자.
“아뇨, 그냥.”
아셰라가 묘한 기색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볼을 부풀렸다.
“……제가 위험에 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보네요?”
“아.”
이내 아셰라가 꺼낸 말에, 화이트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한 차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화이트가 다시금 입을 열었으니.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제국이라고 한들, 그들이 전력을 다한다고 해서 스승님을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건 그야말로 지당하기 그지없는 말.
화이트로서는 당연한 논리였고, 그렇기에 가벼운 어투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흐응, 그래요.”
정작 돌아온 반응은, 어째서인지 조금은 싸늘해진 아셰라의 미소였으니.
화이트가 저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이 반응은.
어딘가 모르게 기온이 차가워지는 감각을 느끼며, 화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스승님.”
“왜 부르시나요, 제자님.”
“아뇨, 별 건 아니고.”
묘하게 차가운 듯한 아셰라의 목소리에 떨떠름함을 느끼면서도, 화이트가 애써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바라는 게 있었던 겁니까? 제가 꺼내줬으면 했던 말이라던가.”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아셰라가 고개를 홱 돌리며 부정의 말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 반응으로 인해 오히려 확신을 가지게 된 화이트.
“……하하.”
화이트가 묘하게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입가에 걸쳐 보였다.
“뭘 웃어요, 건방지게.”
그에 아셰라가 눈빛을 사납게 번뜩이며 화이트를 노려봤으나.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런 그녀의 위협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에.
“스승님, 혹시 제 걱정을 원하셨던 겁니까?”
“……!”
정말이지 짓궂은 미소와 함께, 화이트가 아셰라의 허를 찌르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당연하게도, 아셰라가 곧바로 눈에 띄는 반응을 보였고 말이다.
“무, 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인지 모르기는.”
화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셰라를 향해 슬쩍 몸을 기울였다.
“뭐, 뭔가요.”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런 화이트의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아셰라.
그녀의 속눈썹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귀엽다.’
그리고 그런 아셰라의 빤히 보이는 속내에, 화이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속눈썹도, 애써 부정하고자 하는 목소리도, 그럼에도 흔들리는 눈동자도.
그 모든 것이 귀여웠고, 또 사랑스러웠기에.
“……스승님.”
자연스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짓궂기 그지없는 미소와 함께.
“좋아합니다, 진심으로.”
“……!”
그런 미소와는 별개로, 장난기가 일절 섞이지 않은 화이트의 목소리에.
아셰라가 심할 정도로 몸을 흠칫거리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으니.
“……잠깐, 지금 뭐라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찬찬히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아니, 방금 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딱 그러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운 채로.
“좋, 좋아한다고요? 누구를요?”
아셰라가 화이트를 향해 어딘가 모르게 상기된 시선을 향하게끔 했고.
“…….”
그런 그녀를 향해.
그야말로 아련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제자로서, 스승님을.”
“……네?”
……그리고.
그가 꺼낸 말은,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아셰라로 하여금 한순간에 표정을 멍하니 바꾸게 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니.
아셰라가 조금은 넋이 나간 기색으로 허공을 한 차례 응시했다.
그랬다가 고개를 좌로 갸웃하고, 또 우로 갸웃하고.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듯이,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어디서 헛수작을.”
퍼억!
“컥.”
작은 타격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화이트가 힘없이 몸을 무너뜨렸다.
“……제자님, 제자님.”
어느새 꺼내 든 완드를 한 차례 휘저으며, 아셰라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완드에 가공할 만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떠보려고 한 건가요, 그도 아니면, 그저 장난에 불과했나요? 혹은 장난기로 포장한 진심이었나요.”
“……아, 아하하.”
화이트가 한 차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아셰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살벌한 눈웃음을 받아내며, 화이트가 애써 입을 열었다.
“……떠보다니요. 저는 그저, 진실되게 제자로서 스승님을─”
“닥쳐요, 화이트.”
“아, 잠시만─”
후욱!
“커헉.”
다시 한 차례 완드가 휘둘러졌고, 화이트는 복부를 타격하는 무형의 기운을 느껴야만 했다.
“자, 다시 한번 말해봐요. 화이트.”
“……뭘 말입니까?”
묘하게 스위치가 눌러진 듯한 기색의 아셰라를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화이트가 한 차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건드리고 말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으면서.
“누가, 누굴, 어떤 식으로 좋아한다고요?”
“…….”
아셰라가 환한 눈웃음과 함께 질문을 던졌고, 그에 화이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한 차례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해야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는 화이트.
그러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참고로, 이번에는 진짜로 대답을 잘해야 할 거예요. 다음은 없다고요, 화이트?”
“……스승님?”
“다르게 말해 볼까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화이트를 향해, 아셰라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이트가 그렇게 바라던, 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권리.”
“…….”
“만약 지금이 그 마지막 기회라면, 어떨 것 같아요? 잘 대답하는 게 좋을걸요?”
“……스, 스승님.”
화이트의 표정이 숫제 심각한 기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어째서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말을 꺼내 든단 말인가.
잠시 장난 좀 쳤다고 해서.
아니, 물론 좀 짓궂은 장난이긴 했지만.
“…….”
한 차례, 화이트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 장난을 치긴 쳤다지만.
……그게 지금 당장 진심을 고해야 할 정도로 심한 장난이기라도 한 건 아니지 않았나?
화이트의 낯빛이 실시간으로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바뀌어 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흐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