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마왕이 숨어든 가문
[자,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
다과를 혀로 휘감아서 흡수해버리며, 루시펠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애초에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비록 내가 9서클의 경지에 오른 대마도사라지만, 혼자의 몸으로서는 한계가 있지.]
“……그래서 우리, 제국에 협력을 요청했다?”
케실 공작의 질문에 루시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12마왕과 대적하는 국가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게 그대들이 아닌가.]
협력이 필요하다면, 그건 반드시 제국이어야만 했다고 덧붙이며.
루시펠이 말을 이어나갔다.
[결론적으로 그대들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지. 그럼,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 역시 있어야 하지 않겠나?]
“…….”
오는 게 있으면 가야 하는 게 있어야만 한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엘더리치, 루시펠이 협력을 제안하면서 협상 카드로 꺼내 든 하나의 정보.
12마왕 중 둘의 위치.
그 정보에 담긴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좌중의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시선을 감상하듯이 훑어보며, 루시펠이 다시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 휘하의 불멸의 군단이 파악해낸 정보이지.]
이번에는 차를 혀로 집어삼키듯이 하는 루시펠.
마치 그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루시펠이 안광을 한 차례 번쩍였다.
[향을 보고 예상했지만, 차 맛이 참으로 좋군. 비록 술은 아니지만.]
“…….”
말을 하다가 다른 길로 새는 그의 대화 방식에, 화이트의 이마에 한 차례 힘줄이 돋아났다.
대체 뭐하자는 건지.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가, 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고.
엘더리치, 루시펠은 진정으로 태연하게 차의 향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부아가 치미는 것은 당연하게도 제국 측의 인물들이었고.
“……그래서? 그 불멸의 군단이 파악해낸 정보라는 건 12마왕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겠지?”
[아, 그랬지.]
화이트가 구태여 다시금 입을 열자, 그제서야 본론으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루시펠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 또다시 말을 흐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화이트였으나.
[……내가 파악한 그들의 위치. 그건 그대들에게 있어서 천금보다도 귀한 정보일 테지.]
“…….”
이내 루시펠의 표정 위로 떠오른 진중한 기색에, 그러한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흐려졌다.
……안면근육이 없어서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알려주도록 하지, 제국의 황제여.]
루시펠이 황제를 직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진지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반응을 즐기려는 듯한.
[……12마왕 중 둘, 그들의 위치는 바로.]
그런 기묘하고도 의미심장한 기색으로, 루시펠이 끝내 그 ‘정보’에 대해서 입에 담았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제국의 중추에 자리를 잡고 있다.]
“……!”
황제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며, 서늘한 기색을 풍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쉽사리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에.
만약 그 말을 내뱉는 당사자가 제국의 신민이나 귀족이었더라면, 황제는 필시 그자를 엄벌에 처했을 터.
……그러나.
그 말을 내뱉는 장소와 때, 그리고 당사자가 그 엘더리치 루시펠이라면.
그 말은 서서히 무게감과 진실성을 가지게 된다.
“……제국의 중추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황제가 짐짓 심각한 기색으로 고민을 시작할 때 즈음.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말,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내뱉는 말은 아닐 테지?”
[…….]
슈나이더 백작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루시펠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황제와, 제국 그 자체에 충성하는 슈나이더 백작으로서는 루시펠의 말을 그냥 그대로 듣고 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 위로 살벌한 기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답해라, 리치. 제국의 중추에 12마왕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그 말, 정확하게 무슨 뜻이지?”
[……크흐흐.]
슈나이더 백작의 질문에 한 차례 기분 나쁜 그 특유의 웃음을 흘리는 루시펠.
이내 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다. 12마왕 중, 정확하게 두 명. 그들은 그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감추고, 제국의 일곱 가문에 숨어들어 있으니.]
“…….”
그쯤 되자, 슈나이더 백작은 금방이라도 분개할 듯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루시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믿기에 더욱 분노하는 것인지.
그 진정한 속내는 그 스스로가 아니라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분명한 건 그가 진심으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기는 하는 것일까.
슈나이더 백작이 있는 대로 붉어진 표정으로, 그럼에도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
한 차례, 고요하고도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입을 열어야 한다면 황제, 혹은 프리드리히가 되야할 테지만.
그 둘 역시 나름대로의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긴 기색이었고.
자연스레, 회의실 내부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크큭.]
그리고 그런 정적을 깨는 역할을 맡은 것은, 다름 아닌 루시펠이었으니.
[기분이 어떠한가? ‘제국의 중추’들이여. 그대들 사이에 마왕이 끼여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저릿하던가? 그도 아니면, 긴장으로 등이 축축하게 변했나?]
“……루시펠.”
비꼬는 것이 분명한 루시펠의 말에, 프리드리히가 싸늘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렸다.
명백한 경고의 성질을 띠고 있는 부름이었기에, 루시펠 역시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적어도 이 자리에는, 12마왕은 물론 그 수하조차 존재하지 않고 있으니.]
“……그 말은 진실인가?”
황제가 물었고, 루시펠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금 고요한 침묵이 회의실에 내려앉았고.
그 분위기가 그리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던 걸까.
루시펠이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그들이 숨어 있는 가문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
그리고 그렇게 루시펠이 가벼운 어투로 꺼내 든 한마디는, 그렇게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루시펠. 네 의도가 우리들을 의심암귀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크흐흐…….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 새삼스레 두려움에 떨기라도 한 건가, 프리드리히.]
“헛소리를.”
루시펠의 말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일축하며, 프리드리히가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리고 그 뜻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기에, 루시펠 역시 옅은 미소를 건 채 재차 입을 열었다.
[나와, 내 휘하의 불멸의 군단은 언제나 12마왕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우웅-
루시펠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고, 그에 따라 마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자그마한 검은빛의 구체가 루시펠의 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구체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드디어 그 일말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대한 금색의 탑이, 무참하게 깨부숴지며 쓰러져 있는 광경이었다.
“…….”
……자연스레, 화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설마.’
하나의 가능성이 화이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그 무력 자체는 하위권에 속한다고 평가받기는 하나, 분명하게 12마왕의 일원인.
금색 마탑의 주인, 금의 마왕.
그를 죽인 건 다름 아닌 화이트 그 자신이었으니.
“…….”
화이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눈빛을 빛냈다.
하나의 가능성은, 이내 또 다른 가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왕의 죽음.
그건 대륙을 한 차례 뒤흔들 정도의 대사건임이 틀림없었고.
그건 12마왕 그 본인들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금의 마왕의 죽음이 그들에게 전해진 뒤, 그들이 무언가 큰 움직임을 보였더라면.
……아마, 루시펠이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터.
‘만약 정말로, 일곱 가문 중에 12마왕이 섞여들어 있다면.’
화이트의 눈동자 위로, 섬뜩한 살의가 조심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누구든 간에.’
어떠한 신분을 가지고 있고, 그 가문 내에서 어떤 위치에 올라있더라도.
……자신은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다.
12마왕의 몰살.
그것은 화이트의 지상 목표이자,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돌아올 만큼 그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화이트가 살며시 의자를 뒤로 끌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그리고 그즈음에서, 루시펠의 설명이 다시금 이어졌다.
[금색 마탑이 무너지고, 금의 마왕이 죽은 이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12마왕 중 몇이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마 금의 마왕의 죽음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에 있어서 대회의라도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덧붙이면서, 루시펠이 안광을 한 차례 흩날리게 했다.
[그리고 나는 끝내 찾아낼 수 있었지.]
“……무엇을 말이지?”
[…….]
프리드리히가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고, 한 차례 침묵하는 루시펠.
그러나 그리 늦지 않게,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12마왕 중 둘, 그들이 각자 최종적으로 향하는 장소가 어디였는지를 말이다.]
“…….”
사아아아-
한 차례, 다시금 의미심장한 정적이 회의실에 맴돌았고.
창밖을 통해 가벼운 바람이 불어올 즈음에는, 모두의 표정이 굳어져 있는 상태였으니.
[……지금부터 그 두 마왕이 향한 가문을 밝히고자 한다.]
그렇게 말하며, 루시펠이 황제에게 한 차례 시선을 던졌다.
“…….”
그리고 황제는 그 시선의 의미를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12마왕이 숨어든 가문, 그 이름이 밝혀진다면 필시 한 차례 난리가 일어날 터.’
그에 대비해서 가주들과 그 후계자를 통제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저 리치의 시선은.
“……일곱 가문의 가주들은 들으라.”
그렇기에, 황제는 말문을 떼어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한 차례 씁쓸한 기색으로 흐릿하게 일렁였다.
“지금부터 엘더리치, 루시펠의 입에서 어떠한 가문의 이름이 튀어나오더라도 경거망동하게 움직일 일이 없도록. 알겠는가?”
“…….”
그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가주들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으니.
그것으로 대답은 되었을 것이다.
“……되었는가? 불멸의 엘더리치여.”
[…….]
어딘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황제의 말에, 루시펠이 진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내.
결국에는 엘더리치, 루시펠의 입을 통해서.
[……밤피르 후작가.]
“……!”
12마왕, 그중 두 마왕이 최종적으로 향한 가문의 이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언급된 가문의 이름에, 밤피르 후작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고.
[그다음으로는, 리이칸테르 후작가.]
“…….”
두 번째로 언급된 가문의 이름에, 리이칸테르 후작이 이마를 짚었으니.
다른 가주들 역시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분명하게.
싸늘하기 짝이 없는, 그런 정적이 회의실 내부를 감돌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