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제안
“…….”
화이트는 생각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가.
글쎄, 어째서인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이게 제국의 황궁인가……. 쓸데없이 화려하기만 하군.]
“다물고 걷기나 하지.”
[나는 다리가 없다만.]
“……대충 알아들으면 안 되나?”
제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리치, 그중에서도 최고위급 위험도를 가진 엘더리치 루시펠이 버젓이 황궁 내부를 거니는 꼴을 말이다.
화이트가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뭐, 황실의 대마도사가 직접 진입을 허락한 시점에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화이트의 시선이 한 차례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프리드리히에게로 향했다.
그래.
그가 인정하였고, 동시에 너무 걱정하지 마라며 직접 언급할 정도라면.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으나…….
[화이트, 이건 무슨 그림이지? 해괴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 황궁의 중심부에 걸려 있는 꼴은 영 보기가 힘들군.]
“…….”
화이트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다른 건 다 차치해두고서라도, 이 리치는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가 가리킨 그림은 황실의 막내인 크리스가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예술의 재능은 없는 듯했으나, 그마저도 자랑스럽다는 듯이 황제는 그 그림을 박제하듯이 황궁 중심부에 걸어두었으니.
그녀가 이 복도를 지나가는 일은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이후로 아예 없다던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지.’
화이트가 한 차례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슬쩍 리치를 향해 눈길을 주는 화이트.
[왜 그러나?]
그에 리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그야말로 태연하기 짝이 없는, 아니, 천연스럽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 불멸의 엘더리치의 진짜 모습이 이런 형태일 줄은…….’
딱히 무언가 기대나, 환상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허무함이 밀려왔기에, 화이트가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쯤에서.
“다 왔네.”
[오.]
프리드리히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고.
끼이익-
그와 동시에, 회의실의 대문이 약간의 소음과 함께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
“…….”
황제, 그리고 크리스.
그 이외에도 일곱 가문의 가주들과 그 후계자들.
그 모두의 시선이 엘더리치, 루시펠에게로 향했다.
[이렇게나 많은 관심을 받는 건 오랜만이군. 새삼스레 과거의 한때가 떠오르는 기분이야.]
그럼에도 루시펠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고개를 두어 차례 까딱거리며, 루시펠이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대가 이번 대의 황제인가, 반갑네.]
“……!”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그리 말을 꺼내는 루시펠의 모습에, 회의실 내부의 모든 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바뀌었다.
“……감히!”
한술 더 뜨자면, 눈가를 찌푸리다 못해 분노를 터뜨리는 인물 역시 존재했으니.
콰앙!
율리안 슈나이더의 부친이자, 제국의 경계선을 지키는 변경백.
슈나이더 백작이 분개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껏해야 죽는 게 두려워 비참하게 되살아난 망자 주제에, 감히 누구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슈나이더 백작이 사나운 기세로 그리 소리쳤으나, 정작 그런 말을 듣는 당사자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했다.
[흐음.]
한 차례 턱을 괴면서, 루시펠이 안광을 흐릿하게 번뜩였다.
[나의 친우, 프리드리히여.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내게 저딴 망발을 지껄이는데, 지금은 참아야 하는 것이 맞겠지?]
“……잘 알고 있군.”
프리드리히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중얼거렸고, 그에 루시펠이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유일한 친우인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한발 물러서도록 하지. 크흐흐…….]
“…….”
그렇게 말하면서 진짜로 딱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루시펠.
잠시 프리드리히와 화이트의 표정이 오묘해졌으나, 루시펠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애써 그런 루시펠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프리드리히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슈나이더 백작. 진정하게.”
“에드발트 경, 허나……!”
그에 곧바로 슈나이더 백작이 반발했으나.
“…….”
“……!”
이윽고 서늘하게 다가오는 프리드리히의 눈빛에, 그가 한 차례 몸을 움찔거렸다.
“…….”
그러고는 이내, 조금은 감정을 누그러뜨린 듯이 슈나이더 백작이 자리로 돌아갔고.
“후우…….”
정말이지 기력이 빠진다는 듯이, 프리드리히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그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폐하.”
“음.”
“제 독단으로 이렇게 일을 처리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에…….”
“그만, 그만.”
프리드리히의 말을 끊고, 황제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그대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네. 다 뜻이 있었겠지. 안 그런가?”
“폐하…….”
황제가 드러낸 그 자신에 대한 신뢰에, 프리드리히가 한 차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아직 황제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으니.
“……그리고, 그에 대해 이제부터 설명할 대상은 그대가 아닐 테지.”
황제가 나름 진지하게 표정을 고치면서 꺼낸 한마디에, 프리드리히의 낯빛 역시 약간이나마 어둡게 변했다.
“예…….”
프리드리히가 탐탁잖은 기색으로 다시금 고개를 돌려 루시펠을 쳐다봤다.
“루시펠.”
[왜 그러는가, 나의 친우여.]
“…….”
잠시 자꾸만 ‘친우’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 프리드리히가 한 차례 의아함을 품었으나.
이내 별로 중요치 않다고 판단했을까,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에 모인 자들은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가문의 주인들이네. 나뿐만 아니라, 클리포트 공작과 리이칸테르 후작 역시 그대를 상대로 교전이 성립되는 강자란 말일세.”
[…….]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마치 자신의 말을 이해했냐는 듯이 쳐다보는 프리드리히의 시선에, 루시펠이 한 차례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금방 정리한 듯이, 루시펠이 고개를 작게 까딱거렸다.
[허튼 생각은 품지 말라는 말이군, 굳이 어렵게 돌려 말할 것 있나.]
“…….”
[크흐흐,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말했을 텐데, 나는 오늘 싸움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루시펠의 말에, 프리드리히가 그 진의를 꿰뚫어 보고자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나, 루시펠 역시 그와 동급인 9서클의 대마도사였기에.
“후우…….”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프리드리히가 한 차례 얕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 한숨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의 암묵적인 허용이었다.
[여기에 앉으면 되겠나?]
루시펠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의자 하나를 뒤로 끌어당겼다.
“…….”
그리고, 그런 루시펠을 향해 지긋한 시선을 던지는 소년이 한 명 있었으니.
소년, 화이트가 한 차례 눈을 의미심장한 빛으로 번뜩였다.
‘……의자에 앉을 수는 있나? 뼛조각으로 몸이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닌 건가?’
……속으로는, 그런 눈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도 아니면, 형식적으로만 앉는 자세를 취하고 계속해서 허공에 떠 있는 다던가?’
루시펠이 뒤집어쓰고 있는 저 검은 로브를 한 차례 치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으며.
화이트가 집요한 시선으로 루시펠을 직시했다.
[……?]
그쯤에서, 연속적으로 느껴지는 묘한 시선에 루시펠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흐음…….]
결국 시선의 근원지는 찾지 못한 채, 루시펠이 허탈한 기색으로 두개골을 긁적거렸다.
*****
[제국의 황제여,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찾아왔다.]
“제안이라.”
루시펠이 짐짓 진지한 어투로 말을 꺼내 들었고, 그에 황제의 눈빛이 진중하게 바뀌었다.
제안.
그 단어 자체는 그야말로 가볍기 그지없었으나.
그런 말을 내뱉는 대상이, 다름 아닌 최고위급의 위험도를 가진 엘더리치라면?
그 말의 무게 역시 한층 남달라지리라.
황제가 약간은 긴장하는 기색으로 루시펠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계속 말해보게.”
[나의 제안은 단순하다.]
루시펠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국, 나아가서는 대륙이라고 표현해야겠지.]
한 차례 말을 끊고는, 루시펠이 그 어두운 안광을 섬뜩하게 빛냈다.
[현재 대륙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대들이 잘 알고 있겠지.]
“…….”
루시펠이 내뱉은 그 한마디에, 황제는 물론이고 회의실 내부의 전원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물론 그의 말대로, 현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그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긴 하였으나.
그 말을 내뱉는 루시펠의 의도, 혹은 숨겨진 진의를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모두가 각자의 의미를 담은 눈동자로 루시펠을 직시했고, 그쯤에서 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국에 하고 싶은 말이 뭐란 말인가. 이 혼란스러운 대륙의 정세를 틈타 세계정복이라도 꾀하려는 건가?”
[크흐흐…….]
그에 마치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루시펠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안타깝지만 내게 세계정복의 야망은 없다. 그딴 쓸모도 없는 일에 신경을 소모하고 싶지는 않군.]
루시펠의 턱과 입이 맞물리며, 한 차례 끼긱거리는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에 대부분의 인물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루시펠은 그런 반응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고요하게 안광을 흔들리게끔 하며, 루시펠이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
“…….”
묘하게 진지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회의실 내부의 모든 자들의 이목이 루시펠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루시펠이 기꺼운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이윽고.
[─12마왕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의 협력.]
“……!”
루시펠이 그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입 밖으로 꺼내들기 시작했다.
[……만약 그대들, 제국이 12마왕을 상대할 때 나와 합을 맞추겠다면.]
천천히, 루시펠의 목소리가 음울하고도 낮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그 자신의 안광을 살벌하게 빛내며.
[나는 그대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하나 제공하겠다.]
루시펠이 무기질적인 음성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정보, 라고? 그건 무슨 정보를 말하는 거지?”
[크흐흐…….]
황제의 물음에 루시펠이 다시 한번 그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알고 싶은가?]
“…….”
황제를 비롯한 대다수의 인물이 긍정의 의미를 담아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진지한 태도로 자세를 낮추며.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루시펠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건 그야말로 진중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고.
이윽고, 루시펠의 입을 통해서.
[……12마왕 중 2명, 나는 그들의 위치를 알고 있다.]
“……!”
그 진중한 태도에 걸맞은 말이 튀어나왔으니.
황제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고, 그에 루시펠이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들도 그들 개개인의 강대하기 짝이 없는 무력이 거슬렸을 터.]
“……그 말은.”
[그래…….]
목소리를 한 차례 늘어뜨리며, 루시펠이 광기가 서린 안광으로 사방을 훑었다.
[어떤가, 나와 함께 그들과 정면으로 대치해보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