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특이한 이름
“…….”
서쪽의 엘더리치.
그 존재에 관해서, 화이트가 천천히 회귀 전의 기억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분명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고, 클리포트의 가주직에 오른 이후에는 제국의 정보기관을 통해 훨씬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스승님이 폭주한 이후로도 서쪽 지역에 처박혀 있었던 건가?’
화이트의 표정이 살며시 의문으로 물들어갔다.
설마, 아무리 마법에 미쳐 인간이기를 포기한 리치라지만.
세계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와중에도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을 수는 없을 터.
애초에 서쪽 지역이라면, 자신의 스승인 아셰라가 폭주하기 시작한 지역이었을─
“……음?”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가능성에, 화이트가 미묘하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설마?
“…….”
천천히 하나의 가설이 화이트의 머릿속에서 정립되고 있었다.
서쪽 지역, 아셰라의 폭주.
서쪽 지역, 불멸의 엘더리치.
그 두 개를 동시에 겹쳐두고 생각해 보자면.
“……허.”
화이트의 입술을 비집고 허탈한 감정이 담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스승, 아셰라의 폭주는 서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안광을 번쩍이는 이 엘더리치의 영역 역시 대륙의 서쪽이었고.
“하하.”
……그래서 끝끝내 등장하지 않았던 건가?
폭주한 아셰라에 의해, 가장 먼저 소멸을 맞이해서?
“……아하하!”
묘하게 우스운 형태로 드러난 진실에, 화이트가 한 차례 폭소를 터뜨렸다.
‘……아, 안쓰럽기도 하지.’
화이트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리치에게로 향했으니.
[……?]
그에 엘더리치가 의아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웃기지?]
“아니, 그냥…….”
평탄한 어조로 엘더리치가 물었고, 화이트가 손을 살며시 내저었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쳐지기 시작했다.
‘……왜 종말의 끝자락이 되어서도 안 나타나는지 궁금했는데.’
애초에 자신의 스승에 의해 세계가 멸망의 길로 들어설 즈음에는, 은둔해 있던 대마도사 급 마법사나 잠적한 여러 강자들 역시 반강제적인 형태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야만 했기에.
어째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쪽의 엘더리치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건 회귀 이후로도 화이트가 가끔씩 품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숫제 우습기 그지없는 형태로 드러났으니.
어찌 웃음이 안 나올 수 있겠나.
“별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
의아해하는 엘더리치를 향해 화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슬며시 표정을 편안하게 바꾸며,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통성명이나 하자고 했던가. 좋지, 내 이름이 알고 싶나?”
[……그래, 클리포트의 아이야.]
엘더리치가 영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그런 엘더리치를 향해, 화이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그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이후 엘더리치가 보일,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은 생각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나는 화이트라고 한다. 화이트 클리포트.”
[……?]
화이트의 자기소개에 엘더리치의 두개골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한 차례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금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엘더리치.
“……?”
그 묘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화이트 역시 의문을 느낄 즈음.
[……화이트, 라고? 그게 너의 이름인가?]
엘더리치가 재차 입을 열었으니.
“……그런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묘하게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화이트가 툭 대꾸했다.
[허…….]
엘더리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안광을 흐릿하게 빛냈다.
그리고 이내, 화이트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어떻게 사람의 이름이 화이트지? 혹 나를 속이고자 가명을 댄 건 아니겠지?]
“…….”
엘더리치가 진심을 담아 그리 말을 내뱉었고.
파직-
바로 직후, 화이트의 손끝에서 다시금 푸른빛의 뇌전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화이트의 푸른 눈동자가 살벌한 기세로 번뜩였다.
“남의 이름을 가지고 함부로 떠들어대지 말라고 배우지 않았나? 리치.”
[으음…….]
그에 화이트의 진심을 느꼈을까.
[미안하군. 설마하니 진짜로 이름이 ‘화이트’일 줄은 상상조차 못 한 나머지.]
“…….”
엘더리치가 진지한 기색으로 사죄의 말을 꺼내 들었고, 그에 화이트는 묘하게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뭐지, 뭘까.’
……화이트, 라는 이름에 새삼스레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는 자신이었으나.
자신 이외의 자에게서 그러한 말을 들으면, 어쩐지 미묘하게 불쾌해지고 만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사죄하지. 의아함을 느꼈어도 속으로 감추었어야 했는데, 내 실책이다. 화이트……. 화이트 클리포트.]
“…….”
상당히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러나 애써 그러한 기색을 숨기려고 하는 엘더리치의 모습에.
화이트는 그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내 화이트가 손가락에 머금었던 푸른빛의 뇌전을 흩어지게 하며, 한 차례 뒷목을 짚었다.
‘……이름으로 태클을 받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조금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
[말했듯이, 나는 대화를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러냐?”
[그래, 그러니까 프리드리히가 직접 나서게끔 만들어 보아라. 아니면 제국의 황제를 내 앞에 데려오던가.]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되겠냐, 이 아둔한 리치야.”
[크흐흐……. 아둔하다는 말을 듣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로군. 그것도 너 같은 어린 아이에게라면, 그야말로 긴 삶 중에서도 처음 겪는 일이야.]
“아, 그랬구나. 정말 알고 싶었던 정보였는데, 알려줘서 고맙다.”
화이트가 영혼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굳이 말하자면 비꼬는 어투에 가까웠으나.
[크큭.]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더리치의 미소는 그저 연신 짙어질 뿐이었으니.
“…….”
“…….”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이 화이트와 엘더리치, 루시펠에게로 넘어간 상황을 지켜보며.
“아들이 참으로 대단하군요. 음, 여러 의미로 말입니다.”
“……그러지 말아 주게. 괜히 내가 다 수치스러워지려고 하니까.”
리이칸테르 후작과 테이칸이 묘하게 떨떠름한 태도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쩌다가 저희가 이렇게 병풍 신세가 되고 만 건지.”
“나에게 묻지 말게나. 나도 허탈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예에…….”
그리고, 그동안에도 화이트와 루시펠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친우가 찾아왔는데 마중조차 나오지 않고.]
“이봐, 리치. 혹시 그 사고방식부터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펠을 향해, 화이트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그저 너 혼자서만 에드발트 경을 친우로 여기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이다.”
[……!]
루시펠의 안광이 커다랗게 변하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진실되게 놀란 기색으로, 루시펠이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그랬던 건가? 그래서 이리도 나를 피하는 건가?]
“……?”
그리고, 생각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루시펠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는 건 화이트였으니.
‘뭐야, 비꼬는 말을 저런 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화이트의 표정 위로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저 잠시 대화나 해볼 겸, 약간의 신경전을 펼쳐보고자 했던 것뿐인데.
[흐음……. 아니, 그래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는데. 굳이 말하자면 악우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터.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라, 나름 신선한 해석이군…….]
“…….”
무척이나 진지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고심하기 시작하는 루시펠의 모습에, 화이트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화이트가 허탈한 기색으로 한 차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워낙에 자주 상념에 빠진다지만, 저건 정도가 심했다.
그야말로 가볍기 그지없는 어투로 내뱉은 한마디에 저 정도로 고민을 거듭할 줄이야.
“……하하.”
화이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연신 홀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루시펠을 쳐다봤고.
[음?]
루시펠이 묘한 반응을 보인 건 그쯤이었다.
[오, 왔는가!]
“……?”
갑작스레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루시펠의 모습에, 화이트가 의문을 품으며 뒤를 돌아봤다.
“……아.”
그리고 그제서야 화이트는 어느 한 노인의 존재감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
“…….”
황실의 유일한 대마도사, 프리드리히 에드발트가 직접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동안 눈치를 못 챘다고?’
화이트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쓴웃음을 흘렸다.
‘마법사’로서, 그 누구보다도 높은 경지에 한 차례 올랐었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었으나.
‘……아직까지는 어린 신성에 불과한가.’
루시펠과 마법을 섞을 당시, 그가 꺼냈던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프리드리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에드발트 경.”
“화이트.”
프리드리히가 화이트의 인사를 받으며 얕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
프리드리히의 시선이 우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리이칸테르 후작과 테이칸 클리포트에게로 향했다.
“……?”
그다음으로는, 그보다도 뒤편에 위치한 밤피르 후작과 핏빛 물방울에 가둬져 있는 두 소녀를 쳐다보는 프리드리히.
그의 눈동자 위로 슬며시 의문의 빛이 떠올랐으나.
“흐음…….”
이내 대충 납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프리드리히가 마지막으로 정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다름 아닌 엘더리치, 루시펠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오랜만이군, 나의 친우여.]
그리고 자신에게로 올곧은 시선을 보내오는 프리드리히를 향해, 루시펠이 기쁜 기색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왜 이리도 늦었는가. 하마터면 진심으로 결계를 파괴하고자 마음을 먹을 뻔했지 않나.]
“……아직 파괴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프리드리히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크흐흐. 생각외로 저항이 거셌던 탓에.]
“저항?”
루시펠의 말에 프리드리히가 살며시 의문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그리고 그에 루시펠이 한층 미소를 짙게 만들었으니.
[현세대의 리이칸테르, 그리고 클리포트. 아직 부족하지만, 그들이 나의 상대를 하고 있었지.]
“…….”
한 차례 프리드리히가 리이칸테르 후작과 테이칸을 향해 눈을 흘겼고.
그 시선에 두 사내가 가볍게 묵례했으니.
“후우…….”
두 가주의 인사를 받으며, 프리드리히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루시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네.]
“……아직 남았나?”
루시펠이 재차 입을 열자 프리드리히가 귀찮은 기색을 팍팍 드러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불쾌함조차 느끼지 않는 듯이, 루시펠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자네의 옆에 서 있는 그 아이 말인데, 혹여 자네의 직속 제자라도 되나?]
“…….”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살짝 틀어 화이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화이트 역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는 모습.
“……경지가 드러났나 보구나, 화이트.”
“하하…….”
프리드리히의 한숨 섞인 말에, 화이트가 실없는 웃음을 한 차례 흘렸다.
“어쩌다 보니, 말입니다. 다행히 제가 저 리치에게 직접 번개를 꽂는 모습을 본 자가 몇 없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몇 없는 자들이라 함은, 리이칸테르 후작과 테이칸을 뜻하였으니.
그들보다도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는 밤피르 후작이나, 핏빛 물방울에 갇혀 있는 세레나와 오르카는 아마 이 현장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을 터.
다행이라면 다행인 부분이었다.
“그러느냐?”
“예.”
화이트가 즉각 대꾸했고, 그에 프리드리히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그건 다행이구나. 적어도 네게 있어서는 말이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발트 경.”
화이트 역시 밝은 미소로 화답했고,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한 차례 감돌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 역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그래서, 내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는 건가?]
“음…….”
언짢은 듯이 물어오는 루시펠의 모습에, 프리드리히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화이트 역시 미묘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루시펠을 직시했다.
‘들리느냐?’
‘……?’
그리고 그쯤에서, 화이트는 머릿속에서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내 화이트는 그리 어렵지 않게 그 목소리의 정체가 프리드리히의 전언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려지지 않기를 원할 테지? 네 스승인 그 소녀의 존재를 말이다.’
‘…….’
프리드리히의 배려심 깊은 한마디에, 화이트가 무겁게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고.
‘알겠다, 그럼.’
그에 프리드리히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니.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닐 텐데, 루시펠.”
[…….]
지나칠 정도로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프리드리히가 그 눈빛을 한 차례 번뜩였다.
우웅-
이내 아공간에서 그 자신의 거대한 스태프를 꺼내 드는 프리드리히.
그가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제도까지 발걸음을 옮긴 목적, 그 의도를 밝혀라. 그러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사라지도록.”
프리드리히의 스태프에 마나가 태풍처럼 휘몰아쳤고, 동시에 그건 그가 내뱉은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던 엘더리치, 루시펠.
그가 차분하게 안광을 가라앉히며, 프리드리히를 올곧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한 차례, 부자연스러운 삭풍이 두 대마도사 급 마법사를 훑고 지나갔고.
[흐음…….]
이내, 루시펠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태도로 작게 침음을 흘렸다.
“…….”
꺼낼 말, 혹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프리드리히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좋지.]
그리고 그리 늦지 않게 루시펠이 재차 입을 열었으니.
그의 칠흑과도 같은 안광이 한 차례 살벌하게 휘날렸다.
[프리드리히, 나의 친우여.]
“…….”
[12마왕이 준동하고자 하는 이 시기에, 나, 엘더리치 루시펠은 정식으로 제국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제안, 이라고?”
[그래, 제안이다. 어떤가, 들어볼 텐가……?]
프리드리히의 되물음에 루시펠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고.
“…….”
잔잔한 침묵, 그러나 언제 그 형태를 폭풍 전야의 그것으로 바꿀지 모르는.
그러한 침묵이 한 차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