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척살 대상
“이제는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자님.”
“……현실적인 이야기요?”
화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새어 나오려는 침음을 참아내기에도 바쁜데, 갑자기 이 스승께서는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그의 표정에서 귀찮은 기색이 팍팍 묻어나왔다.
“……흐응?”
……그리고 그러한 불성실한 태도는, 그의 스승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으니.
콱!
“…….”
가슴팍을 짓밟아오는 아셰라의 발에, 화이트가 이를 악물고 신음성을 참아냈다.
……고통을 참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쉬운 일이기도 했고, 굳이 신음성을 흘렸다가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자극할 것만 같았기에.
“하아…….”
그저 깊은 한숨만을 푹 내쉬며, 화이트가 몸을 뒤로 눕혔다.
“……흐음, 음.”
그리고 그쯤에서 드디어 멈출 생각이 들었을까.
아셰라가 묘한 비음을 흘리며 슬며시 화이트의 가슴팍에서 발을 떼어냈다.
“만족하셨습니까, 스승님?”
화이트가 입매를 비틀며 대놓고 비꼬았다.
“아, 네!”
그러나 그런 비꼼도 크게 소용이 없었던 건지, 아셰라의 표정은 그저 환하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진실되게 즐겼다는 듯이, 그녀가 유려한 눈웃음을 그려냈다.
그건 정말이지, 미의 여신이 현신하기라도 한 모양새였으나.
“제자님이 고통받는 모습이 너무 짜릿했달까요? 솔직히 앞으로도 종종 부탁하고 싶을 정도인데.”
“…….”
그 입에서부터 튀어나오는 말들에, 화이트의 표정이 퀭하니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 짓을 또 한 번 더 하겠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고 보는 걸까.
“…….”
잠시 아셰라의 눈치를 살피는 화이트.
그리고 그리 늦지 않게, 화이트는 그녀의 진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셰라의 표정 위로는 감출 수 없는 흥분감이 떠올라 있었으니.
‘이 미친 사디스트 스승님이…….’
여전히 몸을 뒤로 눕힌 채로, 화이트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덮었다.
“아핫.”
그리고 그런 화이트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는 아셰라.
그녀가 한 차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눈꼬리를 휘게 만들었다.
“제자님, 제자님. 솔직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도록 하자고요.”
“……뭘 말입니까?”
화이트가 되물었고, 그에 아셰라가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제자가 스승의 취미에 어울려 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셰라가 한 차례 말을 끊었다.
이내 그녀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소는 분명한 미소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진지한 기색 또한 띄우면서 말이다.
“……하물며 하늘 같은 스승에게, 그 자신의 비밀을 꽁꽁 감추고 있는 괘씸한 제자님이라면 더더욱.”
“…….”
“네? 안 그래요, 제자님?”
“……그것이.”
화이트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취미에 어울려 주는 건 심히 귀찮고도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맞잖아요, 바로 조금 전만 해도. 제가 감추고 있던 정체를 사실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껏 말을 안 했었잖아요?”
“…….”
“음, 솔직하게 심각할 정도로 배신감에 휩싸였달까요? 물론 저도 제 정체를 제자님께 숨기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제자님은 조금 지나쳤어요. 이 스승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새겨놨으니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하나같이 합리적이기 짝이 없었으니, 도저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물론 반박하고자 하면 무슨 말이라도 꺼낼 수는 있겠지만.’
집요하게 노려봐 오는 아셰라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해내며, 화이트가 떨떠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반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니겠나.
자신은 분명 그녀에게 많은 걸 숨기고 있었고.
……그 숨기고 있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긴 하다지만.
‘그 비밀들이랑, 스승님의 성벽에 어울려 주는 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냔 말입니다…….’
한 차례 그리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화이트.
내심 그 말을 곧장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심정도 없지는 않았으나.
“…….”
……만약 그럴 경우, 바로 그 자신의 스승님이 응징을 가해오지 않을까.
그렇기에, 자신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꺼내고 싶어 해도 도저히 꺼낼 수가 없는, 그런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에 한 차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그래서, 스승님.”
화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화제를 돌릴 필요도 있고, 애초에 원래의 주제는 이딴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아니었으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이나 해주시죠.”
“아, 그거 말인가요.”
화이트의 질문에 아셰라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라기보단, 꺼내야 할 말들을 정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냐면.”
그리고 그리 늦지 않게, 아셰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금은 진중한 기색을 그 표정 위로 띄운 채로.
“제자님은 12마왕 전원을 죽이겠다고 했었죠.”
“…….”
갑작스레 분위기가 확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은 가벼운 분위기에서, 점차적으로 진지한 느낌으로 말이다.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자신을 직시해오는 제자를 향해, 아셰라가 한 차례 그 금안을 선명하게 빛냈다.
“그 이유는 아직 말을 못 해준다고 했고…….”
“……그랬죠.”
“제 정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또 제 과거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말하지 않을 셈이죠?”
“…….”
아셰라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화이트의 표정이 죄책감으로 물들어 갔다.
서서히 식은땀마저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와,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까 진짜 너무한 거 아니예요? 어떻게 정말로 하나를 안 가르쳐 줄 수가 있지?”
아셰라가 키득대며 눈을 샐쭉하게 떴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부디 자비를.”
분명 잘못은 잘못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아셰라의 분위기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기에.
화이트가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고개를 연신 숙여댔고, 그에 아셰라가 약간은 기분이 좋아진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흐흥. 그러니까 좀 이 스승이랑 어울려 달라고요, 제자님. 그 정도도 못해주면 어떻게 해요?”
아셰라가 은근한 기색을 담아 팔꿈치로 화이트를 쿡쿡 찔러댔다.
“…….”
그러나 그에는 또 바로 즉답을 하지 못하는 화이트.
“뭐예요? 정말 안 어울려 줄려고요?”
그에 아셰라의 표정이 약간이지만 싸늘하게 바뀌려 하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승님. 제자된 도리로써 당연히 스승님의 성벽에 맞춰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이트가 곧바로 고개를 휙휙 가로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핫. 그래야죠, 제 사랑하는 제자님!”
그에 아셰라가 한 차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그러나, 이내 무언가를 눈치챘을까.
“잠시만요.”
아셰라가 미묘하게 눈썹을 까딱거리며 화이트를 향해 다시금 살벌한 눈빛을 번뜩였으니.
“지금 혹시 성벽이라고 표현한 건가요?”
“……그럼 아닙니까?”
“하?”
화이트의 즉답에 아셰라의 표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그러고 잠시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금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아셰라.
“……음, 으음.”
이윽고, 그녀의 낯빛이 살짝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건 부끄러움 때문일까, 혹은 수치심 때문일까.
‘혹은 둘 다일지도.’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표현 아니겠나.
“읏차.”
속으로 그렇게 마무리 지으며, 화이트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뭐,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현실적인 이야기, 한 번 들어나 보고 싶은데.”
“……제자님, 말투가 영 불손한데요. 그보다 그렇게 가볍게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안 넘어가면 뭐 어쩌려고요? 뭐, 또 눕혀 놓고 짓밟으시려고?”
“읏, 으윽…….”
화이트의 직설적인 표현에 아셰라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에 조금은 허탈한 듯이 헛웃음을 흘리는 화이트.
“뭡니까, 스승님. 아까는 그렇게나 짜릿하다는 듯이 달뜬 숨소리를 내뱉어놓고, 새삼스레 이제와서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겁니까?”
“다, 닥치세요. 제자님.”
“안 따르면 뭐 어쩔 겁니까?”
“…….”
연신 이어지는 화이트의 반항에 아셰라가 침울한 기색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딘가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삐진 것 같기도 하였다.
“……오늘은 충분히 즐겼으니 봐주는 거에요. 다음에도 건방지게 기어오르면 진짜 죽을 줄 알아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스승님의 명에 순종합니다.”
“……하아, 제자님은 꼭 헛소리를 해도 장황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요.”
아셰라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신경을 끄겠다는 듯이 고개를 한 차례 가로저었다.
“뭐어……. 애초에 꺼내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제자님 때문에 자꾸만 주제가 이상하게 비틀리잖아요.”
아셰라의 질책 아닌 질책에도 화이트는 그저 태연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전부 스승님의 특이한 성향 탓이죠.”
“아, 좀 닥치라니까요?”
“그러니까, 싫다니까?”
“……지금 반말한 거에요?”
“아닙니다만?”
“아닌데,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장담해요? 제가 방금 전에 스승님께 반말을 썼다고?”
“……이 건방진 제자님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짜 제대로 조교를 시켜야 하나.”
“그게 정말로 제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니, 잠깐. 지금 뭐라고요?”
“아, 교육이요. 교육.”
“……다른 단어를 들은 것만 같은데?”
“잘못 들은 거랍니다.”
“스승님? 아니죠? 스승님?”
*****
“그러니까아, 제가 원래 하려던 말이 뭐였냐면요.”
“네, 스승님.”
어째서인지 한층 순종적으로 변한 듯한 화이트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향해 완드를 이리저리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아셰라가 말을 이어나갔다.
“12마왕을 죽이려는 이유, 그 이외에도 제게 감추고 있는 비밀들 전부.”
“…….”
“일단은 좋다 이거에요. 언젠간 말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재촉할 생각은 없어요.”
우선은 한 차례 그리 말을 끝맺은 아셰라가, 이내 완드를 원 모양으로 휘저어 공간에 자그마한 틈을 만들어냈다.
마도사 급 이상의 마법사라면 누구나가 사용할 수 있는 평범한 아공간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 아공간으로 한 차례 손을 집어넣어 이리저리 헤집는 아셰라.
“아마……. 여기 어디쯤에 있었을 텐데.”
그 후로도 몇 초간 아공간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이내 그리 늦지 않게 한 차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여기 있다.”
그러고는 아공간에서 쭉 팔을 빼내며 무언가를 꺼내드는 아세라.
“스승님, 그건…….”
“네에.”
그녀가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하나의 노트였으니.
조금은 오래됐는지, 약간 낡은 듯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대의 비밀문서라도 됩니까? 뭐가 그리 낡답니까?”
“제 일기장인데요.”
“그만큼 유서가 깊고, 고풍스럽다는 말이었습니다.”
“…….”
곧바로 태도를 전환시키는 화이트의 모습에, 아셰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표정 위로 미소를 띄우며,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일단은 기다리겠다고 다짐했어요. 제자님이 먼저 입을 열어주기를.”
“……그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화이트가 약간의 부채감이 담긴 눈빛으로 아셰라를 힐끔거렸다.
“아하하. 그러니까 앞으로 잘하라고요? 사랑하는 제자님.”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후후.”
아셰라가 기분 좋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고, 그에 화이트 역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차례 훈훈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가, 이내 아셰라가 다시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이다음부터인데.”
그렇게 말을 흐리며, 아셰라가 아공간에서 꺼내든 노트를 조심스레 펼쳤다.
“…….”
그리고 드러나는 글자들에, 화이트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으니.
“……스승님, 그건.”
화이트가 아셰라와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아셰라 역시 그런 화이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게 마주치는 모습.
이내 그녀가 진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건, 제가 파악한 12마왕들의 목록이에요. 저도 나름 한때는 그 일좌를 차지한 마왕으로서 활동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 말은.”
“네.”
화이트의 되물음에, 아셰라가 조금은 씁쓸한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자님의 목적, 제가 돕겠습니다.”
“──.”
“……그러니까, 12마왕의 몰살 말이에요.”
이내 그녀가 꺼내든 짧은 두 마디에, 화이트의 표정이 심란한 기색으로 가라앉았으니.
“……스승님, 그건.”
짤막하게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이 아랫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뭐, 그리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화이트를 향해 아셰라가 한 차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간이나마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얘기일 뿐이지, 어차피 제가 직접 나서서 12마왕과 대적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나름대로의 배려였을까.
그녀가 화이트의 머리를 슬며시 쓰다듬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애초에 저는 직접적으로 12마왕을 공격하기에는 곤란하기도 하고. 그런 제약이 있거든요.”
그런 그녀의 말에 화이트가 한 차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 가지 떠오른 개념이 존재했으니.
“……‘협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에?”
이내 화이트가 그 개념에 대한 말을 곧바로 입에 담았고, 자연스레 아셰라의 표정이 황당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상한 놈을 보듯이 하는 그녀의 눈빛에, 화이트가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려 그녀의 시선을 피해내고 말았다.
“……협정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다고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화이트가 저도 모르게 우선은 변명을 하고자 하는 스탠스를 취했으나.
“얘기 안 해줄 거잖아요, 그냥 말을 말아요.”
“…….”
그야말로 마땅하기 그지없는 아셰라의 말에, 화이트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셰라의 표정 위로 약간의 어이없는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알고 보니 제자님도 마왕의 일원이었다던가? 혹은 마왕의 직속 제자라거나.”
“하하, 농담도…….”
우선은 그리 대꾸하고 보는 화이트였으나.
“…….”
직후 그가 반쯤 진지한 기색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그가 ‘엇’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제 스승님인 당신께서 흑의 마왕일진대.”
“아.”
그건 고려를 못했다는 듯이, 아셰라가 한 차례 미묘하게 혀를 찼다.
“……그것도 그렇네요.”
“…….”
“…….”
한 차례 떨떠름한 분위기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잠깐의 침묵.
슬며시 서로의 눈치를 보기만 하다가, 이내 아셰라가 다시금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요. 결론이 뭐냐면.”
여전히 꺼림칙한 시선으로 화이트를 흘기며, 아셰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펼쳐진 노트를 검지로 한 차례 슥 쓸어내리는 아셰라.
이내 그녀가 그 금안을 슬며시 빛내며, 화이트를 향해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 노릴 대상은 누구로 할 건가요? 제자님.”
무척이나 진지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녀가 읊조리듯 중얼거렸고.
“…….”
바로 직후, 12마왕의 명단을 읽어내려가던 화이트의 표정이 곤혹스러움으로 침식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