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턴 오버
“…….”
밤이 다가왔고, 달이 떠오르자 공기가 점차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밤의 냉기도 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이었으니.
연신 불어오는 삭풍에도 불구하고, 화이트와 아셰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로를 쳐다보지는 않고, 그저 정면을 오롯이 직시한 채로.
“…….”
“…….”
두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야말로 똑같기 그지없었다.
그저 이 불편한 정적을, 그 누구라도 괜찮으니까 풀어주기를.
그렇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미 밤이 찾아온 황궁,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어든 두 사람이 있는 장소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정말 부득이하게.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스승님.”
화이트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고.
“어, 네?”
그에 아셰라가 지나칠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두 눈동자를 잠시 이리저리 굴려대다가, 이내 화이트를 향해 슬그머니 시선을 향하게끔 했다.
반쯤 흘겨보는 형태로 자신을 바라봐 오는 아셰라의 모습에, 화이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뭡니까, 그 태도는. 새삼스레 부끄러워지기라도 한 건지.”
“윽, 으으…….”
화이트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정작 아셰라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을까.
그녀가 기껏 가라앉은 얼굴을 다시금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그리고 그런 그녀를 잔잔한 미소와 함께 내려다보는 화이트.
그의 표정 위로 어딘가 모르게 아련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굳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스승님.”
“……?”
아셰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눈가만 겨우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 아셰라를 향해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이트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말 그대로의 뜻인 거죠. 저는 당신이 소중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아으.”
당당하게,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없이 말해오는 화이트의 모습에 아셰라의 목덜미가 화악 달아올랐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연신 떨려대고 있었다.
‘진, 진정해야만…….’
애써 속으로 그리 중얼거려 보았으나, 어째서인지 심장의 박동은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하여 대마도사 급의 마법사인 그녀가 이리도 감정 조절에 실패하게 되었는가.
그건 그녀 자신이 제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왜, 왜? 왜 이렇게도 진정이 되질 않는 거죠?’
아셰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혹은 감각.
그 자신의 제자님을 힐끗 쳐다볼 때마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마구 박동하고 있었다.
그 익숙지 않은 감정에, 감각에.
아셰라는 그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다가, 이내.
“─아.”
……이내, 그리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인지하자마자.
“……!”
그녀의 얼굴이 마치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으니.
아셰라가 급히 소매로 그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아, 으. 잠, 잠시만……. 이건, 이 감정은. 아니, 아니죠?’
그녀의 머릿속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었을까.
화이트가 재차 입을 연 것은 그쯤이었다.
“스승님은 아닌가요?”
“……네, 네?”
갑작스럽고도,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에, 아셰라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화이트가 그녀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에 아셰라의 몸이 마치 목석처럼 굳어지기에 이르렀으니.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든 감정이 그녀의 속을 연신 흔들어대기 시작했고.
그러한 아셰라를 향해, 화이트가 다시금 말문을 떼어냈다.
“스승님은 제가 소중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스승님이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데.”
“……아.”
아셰라가 저도 모르게 작게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한 의미였나, 그 질문은.
“……후, 후우.”
우선은 한 차례 심호흡을 통해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혀보고자 하는 아셰라.
이내 그리 늦지 않게, 그녀가 조금은 진정된 기색으로 화이트를 쳐다봤다.
“물론, 소중합니다. 제자님처럼, 저 역시 제자님이 그 누구보다도 소중해요. 이건 제 분명한 진심이에요.”
힘겹게 말을 끝맺고는, 아셰라가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말했을까.’
그녀의 표정 위로 약간의 불안감이 떠올랐다.
솔직히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기억이 살짝 애매했기에.
그녀가 슬며시 떨리는 눈동자를 화이트에게로 향하게 했고.
“……하하.”
그런 그녀의 떨리는 시선을 받는 화이트의 표정이란, 그야말로 알기 쉽기 그지없었으니.
한 차례 작은 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화이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탁 덮었다.
“……?”
그에 순간적으로 의문을 품는 아셰라.
‘……얼굴을 가려?’
잠시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였으나.
‘─아.’
이내, 그녀의 뇌리에 하나의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제자님, 제자님.”
아셰라가 어느새 깔끔하게 진정한 기색으로 화이트를 불렀고.
“……무슨 일이신지, 스승님.”
여전히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채로 화이트가 대꾸했다.
“…….”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바라보는 아셰라의 눈동자 위로, 서서히 야릇한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자님.”
툭-
“……!”
아셰라가 조심스레 뻗은 손길이 화이트의 오른손에 닿았다.
“스, 스승님?”
화이트가 깜짝 놀라며 급히 중얼거렸으나, 그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셰라가 천천히 화이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 자신의 쪽으로.
“……!”
“……후후.”
반쯤 아셰라가 화이트를 끌어안은 듯한 구도가 형성되었고.
아셰라가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움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가요, 제자님?”
“……어떻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제게 또다시 안기게 된 이 상황에,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해오는 아셰라의 태도에, 화이트가 미묘하게 몸을 굳혔다.
“후후…….”
그리고 그런 그 자신의 제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아셰라가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
천천히, 그녀가 조심스럽게 팔을 펼치며 화이트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한 형태로 울려 퍼지는 심장소리는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너무나도 가까이 몸을 붙인 상태였기에, 화이트도 아셰라도 그 진실은 알지 못하였으나.
대충이나마 짐작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기에.
그저 양 뺨에 얕은 홍조를 띄우며.
아셰라가 슬며시 화이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
그때까지도 화이트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우고 있는 상태였으니.
“아핫, 아하하.”
그런 그가 마냥 귀엽다는 듯이, 아셰라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
그리고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는 화이트를 향해, 아셰라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문을 떼어냈다.
“이만 돌아가죠, 저희도. 가주께서 저택에서 기다리실 겁니다. 제자님도, 내일의 회의에 참석할 의무가 있으니까.”
“…….”
“저야 뭐 오랜만에 제도를 나돌아다닐 계획인데, 회의가 끝나면 한 번 찾으러 와봐요. 제자님이랑 같이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테니까.”
“…….”
아셰라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으니.
“……제자님?”
그쯤에서 아셰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바로 그다음 순간에, 그야말로 갑작스레.
“─아셰라.”
“……!”
화이트가 아셰라를 향해 조심스런 손길을 뻗어왔다.
“제자님……?”
“…….”
아셰라의 의문 섞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자신의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아셰라의 뺨을 쓰다듬으며.
화이트가 어딘가 모르게 흔들리는 눈빛을 한 차례 빛냈다.
그리고, 이내.
“──.”
화이트가 아셰라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어, 어……?”
그쯤에서 드디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을까.
아셰라가 한 차례 약간의 당황이 섞인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고.
그러한 아셰라의 목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화이트가 아셰라를 향해 어딘가 모르게 사나운 눈빛을 번뜩였다.
그건, 그래.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과 닮은 느낌이었으니.
“……읏.”
점차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 자신의 제자의 모습에, 아셰라가 얼굴을 화악 붉혔다.
……그녀도 마냥 이런 쪽에 문외한인 것만은 아니었기에.
지금 그 자신의 사랑스런 제자님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그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고.
“……안 된다고요, 제자님.”
그렇기에, 아셰라는 그런 화이트를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싱그러운 미소를 그 입가에 건 채로, 아셰라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 들어 화이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스승님?”
그쯤에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걸까.
화이트가 몸을 작게 움찔거리며 동공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오기라도 하는 걸까.
목덜미부터 서서히 붉게 변해가는 화이트의 모습에, 아셰라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근, 두근.
‘……아아, 한 번 더인가요.’
다시금 두근거려오는 심장 소리에, 아셰라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묘하게 긴장되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설레이는.
그런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면서.
톡-
“……!”
화이트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던 손가락을, 이번에는 반대로 그 자신의 입술에 부딪히게끔 하는 아셰라.
그녀가 어딘가 묘한 색기를 느끼게 만드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승님.”
“이번에는 여기까지. 턴 오버랍니다, 제자님.”
“예?”
당황하는 화이트를 눈앞에 두고, 아셰라가 다시금 쿡쿡 웃음을 흘렸다.
“왜요, 혹시 제자님은 이 이상을 원하나요?”
그리고 곧바로 그녀가 도발적인 언사를 날렸고.
“……!”
그에 화이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만큼 매혹적인 어투였고,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미소였기에.
화이트가 몸을 굳히며 연신 두 눈을 깜빡대기만을 반복했고.
“……자,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셰라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제자님이 제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줄게요. 그만큼 저를 즐겁게 해주셨으니까.”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건지, 어느새 허공에 반쯤 뜬 모양새로 화이트를 내려다보는 아셰라.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화이트가 멍하니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스승님.”
“왜 부르시나요?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님.”
달빛을 등지고, 아셰라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화이트에게 있어서, 그런 그녀의 모습이 미의 여신이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여졌으니.
“……하하.”
왜인지 모르게 긴장이 확 풀리는 감각을 느끼며, 화이트가 허탈한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은 모습으로, 화이트가 재차 입술을 떼어냈다.
“……턴 오버, 라고 하셨던가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죠?”
아셰라가 턱에 손을 가져다대며 귀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라고 묻는 듯한 아셰라의 표정에, 화이트가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별 건 아니고요. 그냥 궁금한 게 하나 생겨버린 탓에.”
“궁금한 거라면, 어떠한 걸 말하는 걸까요?”
“…….”
아셰라가 즉각 되물어왔고, 그에 한 차례 말을 멈추는 화이트.
그러나 그리 늦지 않게, 그 푸른 눈빛을 선명하게 반짝이며.
“……그렇다면, 만약에 말입니다.”
화이트가 다시금 입술을 떼어내며 말문을 열었고.
“네?”
그다음 순간,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만약, 만약에.”
그야말로 아셰라로 하여금, 그 이상이 없을 정도로 당황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적인 한마디였으니.
화이트가 어딘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제가 그다음을 원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네?”
……지금껏 줄곧 몰아붙이기만 하던 아셰라가, 그제서야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야말로 진심으로 당황한 듯이, 그녀가 두 눈을 잠시 깜빡여댔고.
“……네에?!”
이내, 그녀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이 섞인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