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황실, 그리고 일곱 가문
“클리포트 공작 각하와, 그 후계자인 화이트 클리포트 공자께서 드십니다.”
“…….”
시종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고, 테이칸과 화이트가 알현실 내부로 들어섰다.
짙은 붉은 색의 카펫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끝부분에 옥좌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이 제국의 정점에 존재하는 자이자, 제국의 태양인 황제였다.
“클리포트 공작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음.”
테이칸이 우선 황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예의를 갖추었다.
“……화이트 클리포트가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화이트 역시 예를 갖추는 모습.
그러나 그런 그의 표정이 영 떨떠름해 보이는 것은 과연 착각일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화이트는 상당히 탐탁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
‘……새삼스레 내가 황제에게 예를 갖추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속으로만 혀를 차며, 화이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나, 알현실 내부에 먼저 존재하고 있던 선객들에게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끔.
……과거, 그러니까 회귀 전에는 새삼스레 황제에게 충성을 표시할 이유가 없었기에.
화이트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자면, 그래.
제국의 신민, 그리고 귀족으로서 아득한 상급자인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12마왕이 본격적으로 마수를 뻗어오고, 아셰라가 폭주하며 세계를 종말로 몰아넣던 그 시절, 그 시기였다면.
오히려 황제가 화이트에게 고개를 숙였으면 숙였지, 화이트가 황제에게 예를 갖출 일은 없을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사라진 시간대라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던 일이었고.
그렇기에 화이트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제국의 대마도사 급 마법사들이 모두 폭주한 아셰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유일하게 남은 대마도사 급 마법사인 그 시절의 화이트 클리포트였다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설령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을 테니.
……그렇지만.
‘그렇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미 그 시절의 내가 아니게 되었고.’
화이트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쯤에서는, 테이칸과 황제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내 앞에서는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테이칸. 내 유일한 친우인 자네라면, 자네가 나에게 어떠한 언사를 던지든 간에 그 누구라 하더라도 뭐라 할 수 없을 테지.”
황제가 옅은 미소와 함께 그리 말했으나, 테이칸은 그저 우직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폐하.”
우선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테이칸.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사방을 훑기 시작했다.
“……하물며,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이러한 공적인 자리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
테이칸의 의미심장한 말에 황제의 표정이 살며시 굳어졌다.
그리고 그 좌우에 황제를 둘러싸고 서 있는 몇 명의 인물들 역시, 낯빛이 심상치 않게 변하는 모습.
‘……아무래도 아버지와 내가 제일 늦게 온 것 같군.’
화이트 역시 어느새 고개를 들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 존재들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갔다.
‘총 일곱 가문, 인가.’
화이트가 테이칸을 따라 천천히 굽혔던 무릎을 펴며, 살며시 흥미로운 빛을 눈동자 위로 띄우기 시작했다.
‘……과연 어떻게 진행될련지.’
한 차례 입꼬리를 얕게 끌어올리며, 화이트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어디 한 번 내게 보여줘 봐라.
제국의 7대 가문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과연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갈까.
그들은 과연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금의 마왕이 죽은 이 시점, 대륙이 요동치는 이 시점에서.
황실과 7대 가문의 인물들은, 끝내 어떤 태도를 취하도록 결론을 내릴까.
현재 제국을 이끌고 있는 황제, 그리고 가문의 가주들과.
앞으로의 제국을 이끌어 나가야 할 그 후계자들은.
과연 자신이 만족할 만한 인물들인가?
그게 아니라면, 혹은─
‘……하하.’
그렇게 한 차례, 어쩌면 오만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생각을 속으로 품으며.
화이트가 찬란한 눈웃음을 유려한 궤적과 함께 그려냈다.
“…….”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바라보는 금빛 시선이 하나 있었으니.
‘……하아, 제자님도 참.’
그 누구도 모르게, 화이트와 테이칸이 알현실 내부에 들어선 시점부터 같이 존재하고 있던 아셰라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전생에는 정말 어떻게 지내왔던 걸까요. 어쩜 아직까지도 중2병이 다 낫질 않은 건지……. 저렇게 진짜로 중2병 환자 같은 표정까지 지어 보이면서.’
“……아.”
아니, 아니지.
아셰라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차례 가로저었다.
‘진짜 중2병 환자가 맞긴 했죠, 일단은?’
설마하니 자신이라는 사람이 그 간단한 명제를 잊어버리고 있을 줄이야.
“아하.”
그랬다.
자신의 제자님은 명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중2병 말기 환자가 틀림없었으니.
한 차례 가볍게 다가온 깨달음에 아셰라가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제자님이, 앞으로도 저렇게 흑역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건가.
훗날, 언젠가는 그 흑역사들로 가득찬 기억에 의해 괴로움에 몸부림칠 날이 올 텐데.
‘죽을 때까지 때려팬다고 해서 고쳐질 것도 아닐 것 같고.’
그랬으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주먹으로 때리든, 마법으로 폭격을 갈기든 간에.
“으음…….”
아셰라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
그러나 이내, 왠지 모를 귀찮음이 몰려온 탓에.
‘……에이, 뭐. 알아서 하겠죠, 제 제자님이.’
한 차례 상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셰라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훗날 그녀 자신의 제자가 흑역사에 고통받을 그날이 기대되기도 하였고.
“……아핫.”
어딘가 모르게 살벌한, 그렇지만 살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런 모순적이고도, 묘하게 가학적인 느낌을 주는 미소와 함께.
아셰라가 따뜻한 시선으로 화이트를 계속해서 직시해 나갔다.
‘언젠가 깨닫게 되겠죠, 제자님도. 중2병이라는 건 그리 매력적인 게 아니라는 걸.’
얕은 웃음을 잔잔하게 흘리는 아셰라.
“후후.”
……그러나.
그녀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녀 자신의 단 하나뿐인 제자는, 그녀의 예상 이상으로 심각한 수준의 중2병을 앓고 있었으니.
지금은 사라진 시간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중2병이라는 요소를 놓지 않았던 화이트의 모습을 그녀는 전혀 모를 것이다.
아마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
그 중2병이라는 요소가, 화이트로 하여금 ‘시간’마저 되돌리는 궁극의 마법을 개발하게끔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그러니까, 우선은 12마왕들의 움직임에 유의하고 수동적인 태세를 취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제국의 검술명가, 리이칸테르 후작가의 가주가 그리 말했고.
“그렇지만 그렇게 할 경우,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대대로 제국의 재상 자리를 맡아왔던 케실 가문의 가주가 그리 대꾸했다.
“…….”
그에 한 차례 리이칸테르 후작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으나.
“……그럼 우선, 제국의 모든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동원해 12마왕의 동태를 살펴보는 건 어떻습니까. 애초에, 지금의 사태의 원인이 된 금의 마왕이 죽은 이유도 파악할 겸.”
올라오려는 화를 힘겹게 참아내고 리이칸테르 후작이 그렇게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쯤에서는 슬슬 어느 정도 의견의 골이 좁혀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후작이었으나.
“그렇지만 그렇게 할 경우, 12마왕들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
다시 한번 날아든 케실 공작의 반박에, 리이칸테르 후작은 이성의 끈이 끊기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콰앙!
후작이 탁상을 거세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럼 공작 각하께서는 어쩌자는 겁니까, 대체? 자꾸 부정적인 반응만 내놓으시는데, 그럼 어디 한 번 의견을 밝혀 보시지요. 각하께서!”
케실 공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지금 무어라 했나, 자네? 말투가 어쩐지 영 언짢아 보이네만?”
“하.”
그에 한 차례 코웃음을 치는 리이칸테르 후작.
이내 그가 당당하게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각하의 착각으로 사료됩니다.”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그쯤 되서는 케실 공작도 열이 올라온 걸까.
후작과 마찬가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케실 공작이 눈빛을 형형하게 빛냈다.
“이 사안은 그렇게 간단히 결론이 나올 만한 것이 아닐세! 그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최소한 대화가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공작 각하께서 하시는 행동은, 그저 논의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리이칸테르 후작!”
“허어!”
……무척이나 길게 이어지는 논의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론이 나오지 않자, 가장 의견을 활발하게 교환했던 두 사람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리이칸테르 후작과 케실 공작이 살벌한 눈빛을 한 차례 교환했고.
“……참으로 골치가 아프군.”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말싸움을 지켜보며 이마를 턱 짚었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논의에는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피로가 쌓였던 걸까.
“……후우.”
황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직후.
“두 사람 다 그만하게.”
“……!”
황제가 짤막하게 읊조리듯 한마디를 중얼거렸고.
격렬하게 말을 주고받던 리이칸테르 후작과 케실 공작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금 내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들인가.”
황제의 눈빛이 서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폐하.”
“으음…….”
그렇게나 열정을 다해 언성을 높이던 두 사람이 한순간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점점 고조되던 회의의 분위기가, 황제의 한마디로 한순간에 차분하게 변하는 모습.
‘호오…….’
그에 테이칸의 뒤편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화이트가 한 차례 눈빛을 빛냈다.
그의 얼굴 위로 나름대로 흥미로운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위엄이라는 게 존재하긴 한다는 건가, 황제 역시.’
화이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회귀 전에는 이런 광경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황제의 저러한 모습 또한 목격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요소들은 화이트로 하여금 황제를 쉽사리 판단하지 못하게끔 만들었고, 그건 자연스레 선입견으로 이어졌다.
지금껏 화이트가 현 황제에게 가지고 있던 인식이란, 그저 말 그대로.
평범하기 그지없던 황제.
그뿐이었다.
‘……내가 너무 과소평가한 건가?’
화이트가 황제를 살짝 흘겨보며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회귀 전, 그가 클리포트 가문의 가주 자리에 오를 즈음에는 황실 역시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기에.
현 황제에 대해서는 그저 기록이나, 혹은 전해 들은 말로만 판단했을 뿐이었다.
비록 단순하게 한 차례 짤막한 한마디로 열을 올리던 두 사람을 진정시킨 것에 불과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화이트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자신의 아버지, 테이칸 클리포트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이유를.
‘어쩌면, 기대 이상으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화이트가 어딘가 모르게 음험한 느낌을 주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하아. 제자님, 제발.”
그에 또다시 아셰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화이트는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일단은.
“우선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여기서 더 회의를 진행해봐야 합리적인 결론이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황제의 한탄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첫 번째 날의 회의는 반쯤 엉성한 형태로 끝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