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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는 로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한참을 축하의 말을 하다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신세를 지고 있는데, 로나가 임신까지 하니, 더 이상 신세를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특히 자신이 입덧으로 매우 고생하고 있으므로, 로나의 몸도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뱀파이어는 입덧도 없고 그냥 평소랑 같으니까 원하는 대로 머물다가 가도 되는데…….”
“그래도요. 이 이상 신세 지는 것도 아니다 싶고……. 데런을 용서해 줄 때도 된 것 같고요.”
요즘 계속 데런이 사과하러 오잖아요. 저택에 돌아가도 기억 상실에 막 걸렸을 때처럼 차갑진 않겠죠.
데런의 저택에서 나왔을 때보다는 살이 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른 모습인 아리스가 흐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로나는 자신은 괜찮다며 말리려다가, 마침 시종이 “데런 님이 오셨습니다.”라고 전하는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타이밍 좋게 자신의 저택에 데런이 또다시 사과하러 온 것이다.
“마침 또 사과하러 왔나 봐요.”
“그런 것 같네요. 이번엔 나가 보실 거죠?”
“그러려고요.”
아리스는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다며, 정말 감사하다 인사하고는 짐을 싸 데런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로나는 입덧에 힘들어하는 아리스의 모습이 안타까워 온갖 신맛 나는 디저트들을 만들어 마차에 바리바리 실어 주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들르라는 말과 함께, 아리스를 한번 꼭 안아 주고 보냈다.
“로나, 진짜 할머니 같은데요.”
“조용히 해요. 나이가 들수록 저런 아이들 만나면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으니까. 밥이라도 많이 먹여야지.”
“그거 진짜 할머니 마음이네요.”
모나한이 하는 농담에 로나는 짧게 콧방귀를 뀌며 비웃고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원래부터 로나를 졸졸 따라다니기 바빴던 모나한이 임신 후에는 완전히 껌딱지가 되어 있었다.
혹시 넘어질까, 어디 부딪히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로나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로나는 자신도 뱀파이어라며, 엄청난 운동 신경을 가졌다며 말했지만, 모나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평소에도 졸졸 따라다니던 모나한인지라 로나는 금세 포기해 버렸고, 그를 신경 쓰지도 않고 그냥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돌아다녔다.
잠이 많아진 걸 빼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날들이었다.
기억 상실에 걸린 모나한의 풋풋함이 즐겁긴 했지만, 그보다는 온몸이 나른한 게 더 신경 쓰이기도 해서 별로 즐기지도 못했다.
하루하루 졸음이 가득한 나날을 보내다가 침대에서 일어난 로나는 중천에 뜬 해를 보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일출과 동시에 일어나던 자신이 해가 중천에 이르고 나서야 눈을 뜬다는 것에 슬퍼하며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따뜻한 물 한 잔을 천천히 목 뒤로 넘겼다.
요즈음 몸에 달라붙는 옷이 싫어서 펑퍼짐하게 입고 있는 치마가 발목 옆에서 가을바람에 따라 살랑거렸다.
온종일 붙어 있던 모나한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가을바람은 선선하니 시원했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몸은 다시 나른하게 늘어졌다.
방금 잠에서 깼지만, 다시 잠들 것만 같았다.
로나는 다리를 살짝 움직여 흔들의자를 다시 움직이게 하다가, 이제는 거의 식어 가는 물을 전부 마셔 버리고는 잔을 옆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녀는 이왕 오는 졸음이니 다시 잠이나 잘까 고민하다가 ‘역시 그만 일어나자’라는 생각에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리고 방 안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모나한을 발견했다.
“뭐 해요?”
“로나를 보고 있어요.”
“왜요?”
“글쎄요. 기적 같아서?”
언제나처럼 조금은 느끼하고 조금은 장난기를 담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로나는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가 붕 떠 있다고 느꼈다.
생각이 다른 곳으로 가 있는데, 반사적으로 답하는 느낌이랄까.
“기억이 돌아왔어요?”
“……네. 맞아요.”
“데런과 아리스가 드디어 저주를 풀었나 보네요.”
“그랬나 봐요.”
로나는 멍한 목소리로 답하는 모나한을 한번 바라보다가 어느새 흔들의자가 멈춘 것을 깨닫고 다시 발을 굴려 의자를 흔들었다.
기름칠을 잘해 놓은 의자라 끼익하는 소리는 나지 않은 채, 의자는 앞뒤로 느리게 흔들리고, 그에 맞춰 로나의 풀어놓은 갈색 머리카락과 잠옷의 치맛자락이 같이 하늘거렸다.
모나한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현실 감각이 없어요?”
“매우요.”
“꿈인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정말 현실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당신만 보고 있었어요.
모나한이 마치 꿈결같이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나 또한 꿈속인지 헷갈릴 것 같은 분위기라 그녀는 부러 발을 한 번 더 굴러 의자를 더 세게 흔들었다.
마침 바람이 불어와 로나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을 거세게 흔들고, 모나한에게까지 닿아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로나는 그 모습을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바라만 보았다.
꼭 모나한이 모든 감정을 추스르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모나한은 그런 로나의 모습을 보며 멍한 얼굴로 아침부터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침 햇살이 눈에 들어와, 모든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눈이 부셔서 잠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잤기 때문에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와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는 멍하니 새소리와 날벌레들의 날갯짓,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같은 것을 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나를 바라보았다.
기억은 순차적이 아니라 이리저리 뭉쳐져 돌아왔다.
마치 가장 거대하고 인상적인 순간들만 모아 뇌 속에 뿌려지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먹던 순간, 로나를 종속으로 만들기 위해 했던 헛수고들.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와 그녀의 종속이 되었던 순간부터 시작하여.
갑자기 최근에 계곡에서 웃으며 뛰놀았던 그녀가 나오기도 하고.
모틸라의 장례식에서 로나의 볼 위로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이 떠올랐다가.
마지막 남은 가족이던 언니가 삶을 마쳤을 때, 숲속 오두막에서 하염없이 창문 밖을 보기만 하던 로나이기도 했다.
“기억이 엉망진창으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어요.”
프러포즈를 했던 순간의 반지가 끼워지던 손가락이기도 했다가, 갑자기 밀터가 웃는 얼굴로 튀어나왔지.
겨울밤 벽난로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였다가, 여름 햇살에 밀짚모자를 쓰고 뒤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로나이기도 했다.
“가끔 모틸라가 나오기도 하고, 밀터도 나왔고.”
반죽이 묻은 끈적이던 손가락이기도 했고, 찡그린 미간이기도 했다가, 살포시 내려앉은 속눈썹이기도 했다.
“발터와 실리, 그란도 한 번씩.”
선홍색 눈동자가 수없이 반짝이다가, 따뜻한 갈색이 자신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다른 이들도 가끔. 혼자 겪었던 순간들도 간간이.”
온통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로나와 오븐에서 빵을 꺼내며 웃는 로나가.
모든 따뜻한 감정을 담아 놓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들이.
“그러나 거의 모든 기억이 당신이더라고요.”
200년간 온통 반짝이는 것들이 당신이었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기만 해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황홀한 꿈이었는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멍하니 그녀가 자는 얼굴을 보기도 한참.
로나가 잠에서 눈을 떠 움직일 때야 비로소, 현실이란 걸 체감할 정도로.
“당신이 그랬죠. 기억이 돌아오면 알아보라고. 행복했는지, 어땠는지.”
“그랬죠.”
“물어볼 필요도 없었어요.”
“행복했나요?”
로나의 물음에 모나한은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흐르던 순간조차도.”
웃을 때만이 행복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던 순간들도, 하염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지루한 순간들도.
아무것도 아닌 나날과 별것 아닌 작은 것들에도.
“당신이 저에게 그런 걸 가르쳤어요. 그런 순간들조차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
“예전엔 몰랐으니까, 너무나 무서웠거든요. 내가 모르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 줄 수는 없으니까.”
이젠 알려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모나한이 눈물이 섞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이에게요. 지금 들리는 작은 심장 소리에게.”
로나는 귓가에 들리는 작고 빠른 심장 소리와 함께 모나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조금 눈부신 것 같기도 하고, 가서 꼭 안아 주고 싶기도 하고.
볼을 쓰담아 주고 싶다가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싶기도 했다.
“고마워요.”
로나는 모나한의 감사 인사에 웃음소리를 조금 흘렸다.
“이제 기억이 돌아온 모나한의 감사 인사를 셀 차례인가요? 기억 상실 모나한은 서른두 번쯤이었는데.”
“평생을 들어야 할 텐데요?”
“그렇게나 많이요?”
“그렇게나 많이 해도 부족한 말이잖아요.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꼭 해야 할 말이기도 하고.”
“지금이 그 순간인가요?”
“조금 늦은 것 같긴 하지만, 네. 지금이 그 순간이에요.”
로나는 모나한의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졌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모나한은 그런 로나의 웃는 눈을 바라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침도 좀 늦은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식사를 하러 가 볼까요?”
“오랜만에 그거 먹을까요?”
“촉촉한 소시지?”
“반숙 계란 프라이.”
“하얀 쌀밥에.”
“이젠 김치도 있네요.”
모나한이 웃으며 내미는 손을 로나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며 맞잡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손가락이 엮이고, 둘은 발맞추어 부엌으로 내려갔다.
계란 프라이가 프라이팬에서 익어 가는 소리와 물속에 소시지가 퐁당퐁당 떨어지는 소리가.
하얀 쌀밥이 익어 가는 소리와 도마 위에 김치가 잘리는 소리가.
탁자 위에 놓이는 수저와 접시, 의자가 당겨지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작은 농담들과 웃음소리가 부엌 가득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