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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모나한이 기억 상실에 걸리긴 했지만, 먹을 걸로 꼬셔 놔서 그런지 옛날의 그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히려 약간 연애 초반으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그때의 아슬아슬하게 서로 밀고 당기던 그 느낌은…….
“없죠. 밀당 안 했으니까요.”
“제가 열심히 당겼나 보죠?”
“네. 모나한이 엄청 당겼죠.”
로나가 모나한의 입에 간식을 넣어 주며 말했다.
둘은 응접실에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기억 상실이야 남주인 데런이 알아서 잘 해결할 거로 생각한 로나는 나른한 가을을 즐기고 있었고, 모나한도 로나를 따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기억이 금방 돌아올 거라는 로나의 말을 믿는지, 더 이상 기억 상실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가끔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표정은 로나가 입에 먹을 걸 먹여 주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굳어 있는 표정이 사르륵 풀리며 맛있다며 휘어지는 눈가가 간식을 먹여 주는 재미를 느끼게 했지.
오늘도 불안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길래, 다가가 입에 초코칩 쿠키를 넣어 주었다.
사실 바로 넣어 준 건 아니고 구경을 한참 한 후에 넣어 줬다.
화려한 소파에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회색 머리 미남의 머리카락 위로 노을빛이 붉게 머무르다 점점 어두워지고, 수심에 찬 선홍색 눈동자가 회색 속눈썹 사이로 가라앉은 채,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여 손끝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상당한 눈요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라만 봐도 참 흡족해 보이는 구경거리였지.
200년간 너무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서 보기 힘든 표정이어서 더 실컷 구경했다.
로나는 완전히 어두워져 전등 빛이 창백한 볼에 아른거리는 모습까지 구경한 후에야 모나한에게 다가가 쿠키를 먹였다.
소파 앞, 자신의 다리 사이에 서서 쿠키를 먹여 주는 로나의 모습에 모나한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얌전히 입만 벌렸다.
그는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로나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로나의 배에 턱을 올린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로나는 그런 모나한의 코를 장난스레 검지로 한번 쓸어내리고는 이번엔 한입 크기로 만든 레몬 잼이 들어간 페이스트리를 먹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맛있는 걸 주는 사람이라면, 매일 당기기만 한 과거의 제가 이해되네요.”
“그리고 제가 모나한이 당기는 걸 좋아했거든요.”
“지금도 좋아하시고요?”
“당기기만 하는 사람이랑 결혼까지 했으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로나는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이번엔 모나한의 눈썹을 장난스레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모나한이 눈을 휘며 웃었다.
“로나의 아공간에서는 언제나 간식이 끊기지 않네요?”
“제 간식을 너무나 좋아하는 이와 결혼해서요. 요즘은 레몬이 들어간 간식을 주로 만들고 있긴 하지만…….”
“아리스의 입덧이 심해지긴 했죠.”
“그동안 겨우 찌워 놓았던 살이 다시 빠진다니까요. 신맛 나는 간식이나 겨우겨우 먹고.”
“인간의 임신은 언제나 조마조마 하다니까요. 출산은 더 그렇고…….”
“목숨 걸고 하는 거니까요.”
아직 의료 발전이 느린 이쪽 세상은 더욱 그랬다.
그래도 귀족들은 신관들이 있으니 괜찮지만 낮은 계급으로 갈수록 출산은 정말 목숨을 거는 행위였고, 사망하는 여성들도 매우 많았다.
로나는 아리스를 생각하다가 데런에게까지 생각이 뻗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데런은 요즘 저주를 풀려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던데요.”
“우리 집에도 자주 들르잖아요. 아리스가 만나 주지 않지만.”
“입덧이 심하다는 말은 해 줬어요. 신 간식만 겨우 먹는다고 했더니, 요즘은 그런 쪽 음식들을 가져오더라고요.”
“아리스도 약간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하던데.”
“조금만 더 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 같더라고요. 그게 좋죠. 우리 집은 신관이 안 오니까.”
로나는 “망할 신전 놈들…….”이라고 작게 중얼거리고는 모나한의 다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나한이 움찔하며 놀랐지만, 그는 이내 조심스레 로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기억 상실 때문에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몰라 조심하면서도, 부부라는 걸 알고 있으니 하고 싶은 스킨십은 하는 모습이랄까.
로나도 그의 생각을 뻔히 알고 오히려 그 움찔거리거나 망설이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모나한의 망설임이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다가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그러고는 손장난을 치며 옷깃을 만지작거리다가 길게 하품했다.
“요즘 잠이 많아지셨어요.”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서 그런가? 잠이 달콤하긴 해요.”
“많이 졸리시면 주무시러 가실래요? 새 이불을 꺼냈는데.”
“지금 자면 너무 일찍 일어나게 되는데.”
“그럼 같이 아침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요. 새벽에 해 뜨는 거 구경하면 되죠.”
“그것도 괜찮네요. 해 뜨는 거 구경한 지도 오래됐네.”
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나한의 다리 위에서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자신의 배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뭐랄까……. 조그만 드럼 소리? 아니면 휴대전화기의 진동 소리?
로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모나한을 뒤돌아보았다.
모나한도 매우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배를 보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선홍색 눈이 서로 마주치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 소리가-”
드럼 소리니, 진동 소리니 다른 비유를 붙여 봐도 이 소리가 배에서 들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모틸라가 임신했을 때 들렸던, 100년 전 실리가 임신했을 때 들렸던.
지나갔던 많은 임산부와 임신한 주인공들에게서 들렸던.
그리고 지금 저택 어딘가에 있는 아리스에게서도 들렸던 소리.
배 속의 태아에게서 들리는 심장 소리였다.
“우와! 와! 우와!”
“잠, 잠깐만요. 너무 작으니까 제가 배에 귀 좀 대 보고-”
“빨리 해 봐요!”
로나의 재촉에 모나한이 바로 바닥에 무릎 꿇으려다가, 로나가 “소파!”라고 소리치는 말에 다급하게 소파에 다시 앉았다.
로나가 배를 내밀자 모나한이 귀를 대고 집중했다.
기대감이 가득한 침묵이 방 안에 흘렀고, 곧이어 모나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나를 바라보았다.
그 올려다보는 선홍색 눈동자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로나는 그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들려요.”
“맞죠? 저 임신한 거죠?”
“네. 아마도-”
모나한은 ‘아마도’라고 말하다가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확실히요. 확실히 아기가-”
목소리가 얼마나 떨리는지, 또 입술은 얼마나 떠는지.
진동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올려다보는 선홍색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혼란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기쁨인지, 감동인지.
구별되지 않고 전부 흔들리고만 있었다.
로나는 가만히 서서 모나한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이 열려 나올 말을 기대하면서.
“……아리스처럼 도망가시면 안 돼요.”
“푸핫!”
“아니, 음. 이 말을 먼저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하하하하! 그게 제일 걱정됐어요?”
“집에 임신하고 도망 온 사람이 있다 보니…….”
“푸흐흐흐흐…….”
로나는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모나한의 무릎 위에 주저앉아 웃음을 흘렸다.
모나한은 이번엔 망설임 없이 로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우선, 우선 하고 싶은 말은-”
“말은?”
“고마워요, 감사해요……?”
“뒤에 물음표는 왜 붙어요?”
로나의 물음에 모나한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렀다.
방황하는 시선은 로나의 웃음 섞인 눈동자를 한 번, 웃고 있는 입술을 한 번, 그녀의 배를 한 번 돌았다가 다시 허공 어딘가를 배회하길 반복했다.
몇 번을 그랬을까? 그는 여전한 당황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가득 실린 얼굴로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 상실 중이잖아요.”
“네, 그렇죠.”
“기억이 있다면, 더 진심으로, 더 완벽하게 고맙다고 할 수 있고, 더 많은 기쁨을 느끼고 당신에게 그걸 전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럴지도 모르죠.”
“더 완벽하게, 이런 미안함이 아니라 그냥 기쁨만을-”
“괜찮아요.”
“……네?”
로나는 모나한의 볼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리는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괜찮다고요. 뭐, 예상한 일은 아니고, 완벽보다는 좀 엉망진창인 거 같긴 한데.”
“그렇죠? 너무 엉망진창이고-”
“완벽한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
모나한은 로나의 말에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로나는 그 시선에 키득거리며 웃고는 장난스레 턱 끝을 간지럽혔다.
모나한이 조금 부르르 떨고, 로나가 다시 웃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도 없는데, 날 좋아하게 되고 있는 모나한에게 받는 축하와 기억이 돌아와서 한 번 더 난리를 칠, 날 사랑하는 모나한. 흠, 축하를 두 번 받겠네요.”
“……원하신다면 매일 축하해 드릴 수 있는데.”
“오, 그렇게까지 하면 귀찮아서 도망칠지도.”
“제발 그러지만 말아 주세요.”
로나는 반쯤 농담과 반쯤의 진심을 담은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의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모나한의 손을 잡았다.
손장난을 치듯이 깍지 낀 손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가만히 내려놓는다.
모나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발도 장난스럽게 몇 번 동당거리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래서 졸렸나 봐요. 아이가 생겨서. 가을 때문이 아니었네.”
“그렇네요. 혹시 입덧은-”
“뱀파이어가 입덧하나요?”
“……아뇨. 안 할 거예요. 아마.”
모나한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집안에 입덧 때문에 고생하며 말라 가는 아리스가 있어서 그런지, 혹시 뱀파이어도 입덧할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