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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평온한 일상을 며칠 지내고 나면 주인공들이 우당탕하면서 이벤트를 여는 게 로나의 상태창 규칙이 아니겠는가.
상태창은 이벤트를 하라고 명령했고, 아리스는 눈물을 흘려 눈가를 빨갛게 만든 모습으로 로나의 저택에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로나. 이럴 때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이고, 아니에요. 달콤한 거라도 드실래요?”
이런 이벤트에 익숙했던 로나는 별로 당황하지 않고, 우선 먹을 것을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아리스가 조금 당황해하며 로나가 건네는 간식을 받았다.
처음에는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무언가 그리운 것을 생각했는지, 추억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로나 님은 언제나 먹을 걸 주시네요.”
“뱀파이어잖아요. 주위에 먹을 걸 좋아하는 이들이 널려 있어서 그만. 혹시 불편하시다면-”
“아뇨……! 아니에요. 어릴 때 돌아가신 할머님이 생각나서……. 할머님 저택에 놀러 가면 꼭 먹을 걸 챙겨 주셨거든요. 로나 님을 보면 할머님이 생각난다니 이상하죠?”
그 추억이 어린 시절 몇 개 되지 않은 따뜻한 기억 중 하나여서, 아리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로나에게서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제가 아리스 님의 할머님보다 나이도 더 많을 텐데요, 뭘. 자요. 우선 레몬 빵을 먹어요.”
로나는 그런 아리스의 생각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우선 손에 든 빵을 넘겨주기 바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마른 몸이 무엇보다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와! 정말 레몬 모양이네요! 이 노란 크림 같은 건 뭔가요?”
“레몬 버터 아이싱을 올려놓은 거예요. 상큼하고 꽤 괜찮답니다.”
아리스는 초췌해진 얼굴에 겨우겨우 밝은 표정을 지으며 로나가 건네준 레몬 빵을 입에 넣었다.
레몬 빵을 입에 가져가는 순간에도 입맛이 없는지,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던 아리스는 빵을 한입 먹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배가 많이 고팠던 건지, 앞에 로나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레몬 빵을 몇 개나 먹어 치웠다.
로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리스가 먹기 편하도록 우유만 한 잔 건네주었다.
그 우유를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아리스가 부끄러워 볼을 붉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잠깐만요. 여기 손수건이 있는데-”
“로나 님…….”
“네네. 자, 눈물 좀 닦고요. 모나한, 따뜻한 물 한잔 만 가져다줄래요?”
“그럴게요.”
로나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모나한에게 말하자, 모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리스는 모나한이 가자마자 숨죽이며 울던 것을 멈추고 작은 울음소리를 겨우 내며 눈물을 흘렸다.
계약 결혼 이야기의 주인공답게 안 좋은 가족 관계, 숨 막히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작은 소리만 낼 뿐이었다.
로나는 부드럽게 손을 꼭 잡아 주고는 살짝살짝 토닥였다.
“저, 저요…….”
“네, 아리스 님.”
“……요즘 갑자기 잠도 많이 오고요, 속이 울렁거렸어요. 데런의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줄 알았지만…….”
“혹시……?”
“네, 맞아요. 아이가,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더욱더 눈물을 흘렸다.
멈추려고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눈물이 마른 볼을 타고 흘러 로나의 손등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것에 당황한 아리스가 눈물을 닦으려 손수건을 급하게 가져다 댔지만, 로나는 그 손수건을 받아 아리스의 볼을 닦아 주었다.
사실 아리스가 방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의 배 속에서 들리는 작고 빠른 심장 소리에 임신을 알아차린 로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준 것도 신맛이 많이 나는 레몬 빵이었고.
“데런은 여전히 저를 의심 어린 눈으로 봐요. 처음 기억 상실에 걸렸을 때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차가워요.”
그래도 괜찮다고, 언젠가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아리스는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참고 버텼지만, 임신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 아이만은, 아이는-”
……차가운 곳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랑받게 하고 싶어요.
스러질 듯이 여린 목소리였다.
로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만을 느리게 토닥였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극적이었고, 그 말은 언제나 커다란 상처를, 억울한 일을, 아픈 갈등들을 겪게 된다는 말이었다.
로나는 이런 순간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다.
어떤 때에는 그냥 제삼자로 지나가 버리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이렇게 엮여 그들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보게 되기도 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져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도저히 갈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생각난 곳이 이곳이라…….”
“얼마든지 머물러도 돼요.”
“로나 님…….”
“다른 건 몰라도 할머니처럼 먹을 걸 많이 드릴 수는 있어요. 알죠? 뱀파이어가 식욕이 얼마나 좋은지.”
“……네. 소문을 들었어요.”
“보통 사람보다 최소 5인분은 더 먹는답니다? 풍성한 식탁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뭘요. 푹 쉬다가요.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요. 지금은 그냥 푹 쉬면서 몸을 좀 회복하는 게 좋겠어요.”
로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야기가 끝난 걸 눈치채고 응접실로 들어온 모나한에게서 따듯한 물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린 만큼 마셔야 한다고 농담하며 아리스에게 컵을 넘겨주었고, 아리스는 작게 웃으며 물을 목 뒤로 넘겼다.
로나는 아리스를 손님방으로 안내하며 저녁을 같이 먹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들었죠?”
“이 상황에 임신이라니, 충격받을 만했죠.”
“한동안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여야겠어요. 안 그래도 마른 사람이 아예 뼈밖에 없던데.”
“볼도 홀쭉하고, 힘도 하나도 없어 보이던데.”
“원래 임신할 때 마르면 큰일 나요. 아직 입덧이 심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이때 많이 먹여야겠어.”
입이 짧을지도 모르니까 열량이 높은 것들로 골라서…….
이 세계에서 엽산을 알약으로 먹을 순 없을 테니까, 엽산이 많은 음식으로…….
로나는 정말로 손녀가 찾아온 할머니같이 아리스를 챙겼다.
한국인은 밥을 먹여야 한다는 명목하에 아리스의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먹이고, 간식도 챙겨 먹였다.
임신했으니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는 명목하에 열심히 산책도 시켰다.
덕분에 아리스는 조금씩 살도 오르고, 얼굴빛도 점점 좋아졌다.
원래부터 여주인공 같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힘든 와중에도 이슬비 맞은 꽃 같은 외모였으나, 로나의 보살핌을 받은 아리스는 반짝반짝 빛나는 여신이나 정령 느낌이 났다.
초록빛과 푸른빛이 섞인 깊은 바다 같은 머리 색도 한몫을 했다.
로나가 흐뭇함을 느끼며 양쪽에 모나한과 아리스를 끼고 ‘이게 양손의 꽃인가. 나는 양손의 꽃에 물을 주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번갈아 간식을 주고 있을 때, 저택 입구에서 소란이 이는 소리가 들렸다.
일반 사람인 아리스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태평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밝은 로나와 모나한은 소란 속 데런의 발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아리스가 쉬도록 안심시킨 후에 시종이 오기 전에 데런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데런.”
“……오랜만입니다, 로나 님. 모나한 님.”
데런 또한 마음고생을 꽤 했는지, 눈가가 거뭇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는지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 제 부인이 와 있습니까?”
“네, 맞아요.”
로나는 딱히 숨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긍정했다.
그 대답에 데런의 표정이 확 밝아지며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럼 제 아내를 데려가겠습니다.”
“싫은데요.”
“……네?”
“그녀가 가고 싶다고 할 때까지 보낼 생각이 없어서요.”
“……그건 매우 무례한 행동입니다만.”
“어떤 사람의 행동을 억압하는 게 더 무례한 행동 아닐까요?”
“이 일이 당신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협박이 분명한 이야기에 모나한이 표정을 딱딱히 굳혔지만, 로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 권력과 부가 귀족들이나 신분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전 뱀파이어라고요.”
“…….”
“당신이나 몇몇 귀족들과의 관계가 악화한다고 쳐도 과연 몇백 년간 그럴 수 있을까요? 빵집 로모나는 몇백 년 동안이나 세계 1위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큰데.”
“……제 아내를 돌려주십시오.”
데런은 권력을 이용한 협박이 통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로나의 감정에 호소하며 말했다.
그러나 로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전 당신 아내를 뺏어 간 적도 없죠. 아리스 님께 이야기는 전해 줄게요. 그녀가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만나도 좋아요.”
“……지금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런이 하는 말에 로나는 시종을 불러 아리스의 의사를 물어보고 오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시종은 그들의 눈치를 슬쩍 보고 입을 열었다.
“저……. 아리스 님께서는 만나기 싫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여기 머무르고 싶다고…….”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말했잖습니까. 이건 사고가 아니라 저주나 마법 같은 거라고.”
데런이 아리스의 대답에 입술을 짓씹으며 말하자, 모나한이 입을 열었다.
“범인을 찾아서 저주나 마법을 해제하면 기억이 돌아올 겁니다. 당신이 지금 할 일은 그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데런은 모나한의 말에 침묵하다가 겨우 대답하고는 저택을 나섰다.
남주인공답게 무겁고 우아한 발걸음이었지만, 묘하게 축 처진 부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로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택 테라스에서 푸른색 머리카락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