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그 후 모나한은 알 수 없는 익숙함들을 어색해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한 번씩은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문득문득 떠올라 불안하기도 했지만, 로나의 평온한 일상을 함께하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곤 했다.
참 규칙적인 생활이었고, 그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갈 곳이 없어 고민할 일도, 이루고 싶은 것이 없어 괴로워할 일도, 하고 싶은 것이 없어 멍하게 죽은 듯이 보내는 시간도 없었다.
한 번씩 생기곤 하는 아무것도 할 것 없는 무료한 시간에는 로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면 되었다.
그러면 보상이라도 되는 듯이 농담과 수다, 웃음과 간식이 따라왔지.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길들였는지 잘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모나한과 같이 기억 상실에 걸렸던 남주가 보낸 시종이 저택에 찾아왔다.
로나의 저택에 있는 몇 안 되는 시종이 그걸 알리러 왔을 때 마침 로나와 모나한은 휴식 시간이었다.
로나가 모나한에게 다시 밀크커피의 맛을 알려 주다가 그들은 소식을 듣고 남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한 저택에는 혼란이 가득한 얼굴인 남주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안 그래도 가는 몸을 더 가늘게 만들어 초췌한 인상이 된 여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나한은 문득 그들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다.
자신은 불안이란 게 어디 있냐는 듯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200년 전이라지만, 자신에겐 며칠 전으로 느껴지는 과거와 비교하자면, 더 안정된 느낌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충만하고 행복하게 보내는 느낌이랄까.
로나도 저기 앉아 있는 푸른색 머리의 여자와는 다르게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요즘 가을 햇살과 선선한 바람 때문에 졸린 건지, 나른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로나 님. 오랜만이에요.”
“네, 아리스 님. 여기 복숭아 파운드케이크예요. 아리스 님이 좋아하시는 게 생각나서 구워 와 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여주인 아리스는 로나가 건네는 케이크를 받으며 스러질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정말로 힘들었는지, 눈가가 거뭇하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로나가 자신이 편하게 지낸 게 미안해질 정도의 모습이었다.
물론 로나는 ‘흠, 좀 미안……? 하군’이라고 잠깐 생각하고 넘겨 버렸지만.
그만큼 두 사람에 비하면 로나와 모나한의 얼굴은 반짝거린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남주인 데런도 그걸 눈치챘는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듣기로는 기억 상실에 같이 걸렸다는데.”
“아, 초반에는 조금 고생했죠.”
“조금?”
“갑자기 모르는 부인이 생겼으니까요.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런은 모나한의 말에 더더욱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모나한은 신경도 쓰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과거의 제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할 정도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혹시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죠.”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그 가능성은 포기했습니다만.”
“저도 어떤 기억도 돌아오지 않더군요.”
모나한은 데런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200년간의 과거는 마치 가위로 싹둑 잘라 내기라도 한 듯 깨끗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느껴지는 것은 이유 없는 익숙함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심이 가고 마는 감각이라서 데런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과거의 제가 사랑하게 될 정도의 사람이면, 현재의 저도 사랑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귀족의 결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질 것 같습니까?”
“오, 전 사랑으로 결혼한 거라서요.”
모나한은 그건 그쪽 사정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도 사실 사랑에 빠지는 중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는 로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로나가 그 눈웃음을 받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지만, 모나한은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채 더더욱 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로나는 기억은 그대로인데 뻔뻔함만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모나한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네?”
로나는 아리스가 다급한 얼굴로 물어보는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런은 기억 상실에 걸린 순간부터 절 쫓아내려고 하더군요. 저희가 결혼 전에 서로 약속한 게 있어서……. 그러니까, 결혼 서약서 같은 거요.”
아리스는 급한 마음에 전부 말해 버리려다가, 이게 ‘비밀 결혼 계약’인 것을 기억해 내고 당황하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혹시 캐물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얼굴로 로나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상황을 한 두 번 마주친 것도 아닌 로나는 충분히 눈치를 챘지만, 대충 넘기는 게 속이 더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쪽은 신경도 안 쓴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요?”
“아, 아아……. 그래서 본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게 증거가 되었거든요.”
“다행이네요.”
“……그렇죠. 다만……. 예전과 너무 달라져서. 물론 결혼 전에는 차가운 사람이긴 했어요. 그러나 결혼 후에는 따뜻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렸다 해도 너무…….
아리스는 눈물은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로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모나한 님이 로나 님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셨나요!?”
“어, 음…….”
로나는 해 줄 말이 없어 눈을 데굴 굴렸다.
먹을 걸로 꼬셨어요.
뱀파이어는 식욕의 노예라 맛있는 거만 주면 졸졸졸 따라와요?
그냥 옆에 두고 맛있는 걸 먹였더니 갑자기 다시 사랑에 빠졌다고 하네요. 잘 모르겠어요?
빵을 먹이란 말이야, 빵을?
“로나는 그냥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답니다.”
“네, 네?”
로나가 말없이 곤란해하고 있자, 모나한이 방긋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처음엔 저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어디론가 가 버릴까, 아는 이를 찾아서 돌아다녀 볼까 고민도 했지만…….”
모나한은 그때 느꼈던 불안과 혼란을 떠올리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하다가 다시 평온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어쨌든 결혼했다고 하니까요. 과거의 제가 결심할 만큼 잘 맞는 사람일 테니까, 기다려 보자. 정보라도 얻어 보자 싶었죠. 그리고 그 결정이 정답이었고요.”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한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오히려 불신만 생겼습니다만.”
“저도 로나를 믿을 수 없었지만……. 제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지금 차갑게 대하면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거나-”
모나한은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데런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다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잖습니까? 그럼 그때 지금 한 행동들을 후회하게 될 게 분명하잖아요.”
“……그건, 그렇죠.”
데런도 그 말에는 동감했는지, 옆에 앉은 아리스를 슬쩍 보면서 답했다.
처음에는 무작정 홀대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살짝 바뀐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돌아올 확률이 높잖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머리를 다쳐서 기억 상실에 걸린 것도 아니고, 차를 마시다가 기억 상실에 걸렸다는데. 그럼 다른 무언가가 작용해서 그런 거겠죠. 그걸 찾으면 기억도 돌아올 확률이 높잖습니까.”
모나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로나가 차를 마시다가 쓰러져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했으니, 저주나 마법의 일종일 테고.
그런 건 저주나 마법을 풀면 기억이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 차를 선물한 사람이나, 그와 연관된 사람을 찾으면 되겠네요. 설마 지금까지 찾지도 않아 보신 건 아니겠죠?”
모나한의 말에 아리스와 데런이 침묵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기억 상실로 인해 서로 상처 주고 싸우고 혼란스러워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모나한은 그들의 침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태창으로 인해 이야기에 휘말리는 것에 익숙한 로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차나 홀짝였다.
남주와 여주의 갈등이 심화하여야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렇겠지.
문제 해결은 나중이고 우선 갈등을 심화시켜 고구마를 많이 먹여야 사이다가 시원할 테니까.
지금은 신나게 고구마를 쌓아 올리는 중이지, 뭐.
“그, 제가 조금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데…….”
아리스가 모나한의 표정에 부끄러워하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오셀리 영애가-”
“그녀는 나와 오래된 친구라고 몇 번을 말했잖나. 그녀는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이 아니야.”
“……저와 결혼하고 나서 본성을 드러냈다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사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고, 제 자리를 노렸다는 걸요.”
“그럴 리가. 나랑 몇 년을 친하게 지냈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어.”
“하……. 그렇겠죠. 그런 기색을 보이는 순간 당신과 멀어질 테니까!”
“당신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게-”
워. 부부 싸움한다.
로나와 모나한은 반사적으로 기척을 확 죽이며 소파에 달라붙었다.
저런 싸움에 끼지 않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둘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로나와 모나한은 서로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부부 싸움을 모른 척하며 차만 소리 없이 홀짝였다.
마음 같아서는 둘만 남기고 로나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 간식을 조금…….”
티타임을 위한 간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왔던 시종이 부부 싸움에 한참 눈치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끼어들었다.
그제야 이 공간에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아리스와 데런이 싸우던 걸 멈추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에 로나와 모나한은 나중에 더 이야기하자고 말하고는 주인공들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의견 일치가 오래 걸릴 것 같죠?”
“으음. 뭔가 나오면 부르지 않을까요?”
주인공 둘과 달리 조금도 급하지 않은 로나와 모나한은 저택에 돌아와 밀크커피나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모나한의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는 건지 그는 금방 노란색 밀크커피의 맛을 다시 재현해 냈다.
로나는 그의 뿌듯해 보이는 얼굴에 온갖 칭찬을 건네며 하루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