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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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한은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탁자에 허리를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그는 로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두세 번 걷어 올려놓았던 소매를 짜증이 서린 손짓으로 대충 내려 버렸다.

그가 바란 대로 근육조차 잘생긴 팔이 드러났지만, 이미 로나는 산책이 하고 싶다며 정원으로 가 버렸고 부엌에는 모나한 혼자뿐이었다.

우글거리는 주름이 가득한 소매가 자신의 기분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다가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한 번 털었다.

자신이 상실했다는 200년간의 과거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다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짜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과거 따위가 뭐라고.”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대로 그는 과거 따위 한 번도 기억해 내려 한 적도, 과거의 인연을 이어 나가려 한 적도 없었다.

잊어버린 것은 잊어버린 대로. 동굴 속에 틀어박혀 오랜 잠을 자고 나서 잃어버린 인연은 잃어버린 대로.

그는 반쯤 흐르는 듯이 살아왔고 그건 거의 모든 뱀파이어가 하는 행동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가면을 쓰고 섞여 사는 게 뱀파이어였다.

자신보다 먼저 죽는 이들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건 당연한 거였고, 변하지 않는 외모에 오랜 세월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럴 바에야 과거 따위, 흘러 가 버리면 신경도 쓰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기억의 한 자락이라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로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것들에 어색함을 느끼는 자신이 아쉽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알고 싶었다.

눈만 마주쳐도 반사적으로 웃는 사람과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었다.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잠든 그 순간조차도 함께한 것이 분명한 사람이 알고 싶었다.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는데, 품에 안고 자는 건 어떻게 그렇게 당연했는지.

왜 당연하다는 듯이 시선은 따라가고, 그것을 넘어 진득하게 훑어보게 되는지.

적당한 정보를 알고 나면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고 생각했던 마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어떻게 해야 더 옆에 오래 있을 수 있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건지.

모나한은 과거를 기억해 내려 생각에 생각을 덧붙이다가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불을 끄고는 뜨거워진 주전자를 한번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주전자와 레몬청, 예쁜 찻잔을 쟁반에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가을이었고, 단풍이 하나둘 떨어져 정원은 온통 울긋불긋했다.

로나는 가을에 피는 작은 꽃들과 허브들이 모여 있는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모나한은 작은 발소리로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졸고 있었는지, 로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들고 모나한을 바라보더니 손을 대충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모나한.”

“……안녕하세요, 로나.”

가벼운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조차 당연하다는 듯 보여서, 모나한은 이상하게도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벤치 옆에 있는 작은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준비해 온 따뜻한 레몬티를 타자, 허브향과 꽃향기 사이에 달콤한 레몬차 향이 섞이기 시작했다.

로나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모나한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나한은 로나에게 담긴 나른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하품하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근심 걱정 없는 사람 같았다.

“걱정 안 되십니까?”

“네?”

모나한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날 선 목소리로 물어보았다가, 놀란 듯 자신을 보는 로나의 눈에 작게 헛기침했다.

모나한도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날 선 목소리에 놀란 것이었다.

헛기침이 끝나자 침묵이 찾아왔고, 모나한은 차를 다 타고 찻잔을 로나에게 넘겨주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잖아요. 로나 입장에서는 결혼한 남편이 기억을 잃어버린 거죠.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을 전부요.”

“뭐, 그렇죠?”

“언제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태평하신 것 같아서요.”

오히려 기억을 잃어버린 제가 불안해하고 있다고, 기억 한 가닥이라도 찾으려고 낑낑거리고 있지 않냐고.

모나한은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 말하다가 자신의 목소리에 투덜거림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남에게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신이 투정 부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다니.

정말 2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길래 바뀐 부분이 툭툭 튀어나오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 그렇죠. 흠…….”

그에 반해 로나는 ‘그런 일이 있었지’ 같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기만 했다.

표정에는 고민이 살짝 곁들어 있어서 모나한은 그만 손끝을 탁자 위에 몇 번 두드려 초조함을 나타내고 말았다.

그 소리에 로나가 고개를 들고 모나한의 표정을 바라보았다가, 초조함을 읽고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옆에 앉으라며 벤치를 토닥였다.

모나한이 벤치에 앉자 로나가 발끝을 두세 번 까딱이다가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어떤 사건에 잘 휘말리는 체질이에요. 운명이라고 해도 되고, 어떤 임무에 잘 휘말린다고 해도 되고요. 중요한 건 꼭 사건에 휘말려서 무언가 일어난다는 거죠.”

“……무언가요?”

“그래요. 이번엔 모나한의 ‘기억 상실’ 정도네요.”

로나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는 모나한은 자신이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는 그만큼 조곤조곤했고 조금은 나른한 느낌을 들게 하였으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평화로웠고 주위에 떠다니는 향기와 따뜻한 가을 햇살은 평온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풀려 버려요. 모나한의 기억 상실도 그런 거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고요.”

“확실히요.”

확실하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장난기를 조금 담은 채 키득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모나한은 불안했던 마음이 안심되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돌아다니던 자신에게 이렇게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문득, 200년간의 자신이 매우 평화로웠을 거고 매우 안정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나한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200년간 저는 어땠나요?”

“모나한요?”

“네. ……안정돼 보였나요?”

“그런 편이죠.”

로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모나한은 더 진심으로 느껴졌다.

떠돌아다니기만 하던 제가 정말로 한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행복해…… 했나요?”

모나한은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행복이란 건 들꽃 같은 거였다. 아니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은 것.

상투적인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그런 거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

닿지 못한 곳에서 예쁜 색으로 환상처럼 반짝이는 것.

날이 차가워지면 꽃이 지듯이, 해가 떠 버리면 별빛이 사라지듯이-.

자신에게 행복이란 잠깐 있다가 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과거를 돌아볼 때야 비로소, ‘아, 그때 반짝이던 게 행복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것도 과거를 돌아볼 때뿐이지, 과거를 잘 돌아보지 않는 자신이니 겪어도 모른 채 지나가 버린 것들을 얼마나 많겠는가.

모나한은 왠지 손끝이 떨리는 것 같아 따뜻한 찻잔을 꾹 쥐고 로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나한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나는 방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죠.”

“……네?”

모나한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라 노란 레몬차를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로나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선홍색 눈동자가 나른한 눈빛으로 깜박였다.

가을 햇살에 조금 반짝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모나한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요.”

“……부부잖아요.”

“부부라고 해서 마음을 다 알면 세상에 이혼은 왜 있대요.”

“사이 좋은 부부 아닌가요?”

“사이야 좋았죠.”

모나한은 로나의 대답에 자신이 모르는 부부간의 갈등이 있었나 고민했다.

사실은 200년간의 자신이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거나, 그냥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위장 부부였다거나.

상상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주 쉽게 어두운 쪽으로 빠졌다.

그리고 모나한이 그 상상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전에 로나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덜 가볍고, 조금은 더 나른한 목소리였다.

“전 행복했어요.”

“……네?”

가을 햇살에 졸음을 가득 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전 모나한과 함께하는 내내 행복했다고요. 조금은 느끼하고, 조금 많이 달콤했고.”

“…….”

“대화는 즐거웠고, 농담은 웃겼고. 함께하는 시간은 따듯했고, 스킨십은 짜릿했고?”

짜릿했다고 이야기할 때의 로나의 목소리는 장난기와 웃음을 담았다.

그러나 그 웃음조차 느리고 잠결 같았다.

“모나한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전 그랬어요. 평생 그러고 싶을 만큼. 어쩌면 평생 이후에도?”

당신이 기억 못 하는 프러포즈 대사처럼요.

속삭이는 목소리였고, 몽롱한 목소리였고, 잠들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기억이 돌아오면 알아봐요. 행복했는지, 어땠는지.”

그러니까, 마치. 꿈결 같은 목소리였다.

모나한은 자신이 이 여자를 사랑해 마지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목소리에 섞인 장난기를, 나른함을 사랑했을 거라고.

평화와 평온을 온통 둘러놓은 것 같은 사람을 사랑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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