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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기억 상실요!? 왜 그런 걸 걸리고 그래……?
“그, 그러니까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영애.”
“아, 아아아…….”
마치 깊은 심해 같은 녹색과 푸른색이 아름답게 섞인 머리 색을 가진 여성이 의사의 말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쓰러졌다.
마침 옆에 서 있던 로나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받으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 상실요?”
“예, 귀부인. 안타깝게도 두 분 모두…….”
“아하, 기억 상실요.”
“예.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두 부인분과 만나고 난 후의 기억을 잊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기억 상실요.”
“귀부인. 충격이 크신 건 알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로나는 의사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들의 많은 생쇼에 휘말린 적도 여러 번. 제삼자의 위치에서 온갖 이벤트를 겪기도 여러 번. 피해를 본 적도 많았고, 그만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적도 많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정말로 단 한 번도 이런 미래를 상상한 적은 없었다.
“모나한. 절 알아보겠어요?”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오……. 와우.”
모나한이 주인공들의 이벤트에 휘말려 기억 상실이 되었다.
* * *
주인공의 이야기 전개는 대충 이렇게 흘러갔다.
생활고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주와 냉철하고 계산적인 남주가 계약 결혼을 한다.
근데 생각보다 잘 맞았다.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쿵짝거리다가 사랑에 빠진다. 근데 남주가 악녀가 보낸 차를 마시고 저주에 걸려 기억 상실이 된다.
그리고 모나한이 그 차를 같이 마셨다.
“음,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로나예요. 당신 부인요.”
“……믿기 힘든 말이네요.”
머리가 아픈지 침대 위에서 이마를 매만지고 있는 모나한에게 다가간 로나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 소개에 모나한이 로나를 올려다보다가 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 대답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이 가려나……. 실리에게 연락이라도 해 볼까요?”
“……아뇨. 그 눈 색을 보니 적어도 저나 모틸라와 연관된 이라는 건 알겠네요.”
모나한이 로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선홍색 눈동자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로나가 무언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바로 옆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데, 데런. 절 알아보시겠나요?”
“그대는 누군데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심히 불쾌하군.”
“전 당신의 부인이에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요!”
“내가 사랑? 하!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거기 아무도 없나!? 누가 이 미친 여자 좀 끌고 가도록!”
“데런, 데런!”
“사모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우선은 진정하시는 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서 머리가 다 울리는군. 빨리 데려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던 로나와 모나한은 그 난장판을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많은 주인공의 이벤트를 겪어 왔던 로나가 반사적으로 기척을 확 죽이고 관망하고 있는데, 침대에서 막 정신을 차렸던 모나한도 엮이기 싫은지 기척을 죽인 채 침묵했다.
로나는 기억을 잃어버려도 하는 짓은 똑같다고 생각하며 눈만 데굴 굴리다가, 데런이라고 불린 남주가 이쪽을 쳐다보려 하자 그의 시선을 휙 피했다.
그리고 로나와 똑같이 남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모나한과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우선 집에 갈까요?”
“그게 어디든 여기보다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로나의 말에 모나한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지만 불쌍하게 끌려가는 여주를 보니 그보다는 그냥 두 발로 얌전히 나가는 게 나아 보였다.
얼굴 옆을 보는 남주의 시선이 따끔거리기도 했고.
원래 남주란 놈들은 여주에게만 다정하고 남들에게는 차가운 게 기본 사항 아니겠는가.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생각보다 커다랗군요.”
로나는 제국 수도에 있는 작은 숲이 딸린 5층짜리 저택에 도착해 말했다.
모나한과 결혼하고 제빵계를 휘어잡은 지 어언 200년.
로나는 세계적인 부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가끔 어쩌다 이 자리에 올라와 있는 걸까 고민하곤 했고, 이 저택에서 머물기보다는 주인공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긴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로나와 모나한의 집이었다.
로나는 모나한의 감탄에 땋은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생활하는 구역은 작아요. 그 외엔 거의 창고로 쓰고 있죠. 여기저기서 선물이 많이 들어와서.”
“선물요?”
“제가 제빵사라서요.”
“그거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종족들이 뇌물 겸 선물을 많이 바치거든요.”
더 좋은 레시피를 내려 주십시오, 로나 님.
제가 사는 곳에도 분점을 열어 주세요, 로나 님.
로나 님만이 구한다는 환상의 재료를 얻고 싶습니다, 로나 님.
로나 님, 로나 님.
로나는 그런 뇌물이나 선물이 부담스러워 돌려보내곤 했지만, 모나한은 달랐다.
모나한은 “이 녀석은 이 정도는 충분히 보낼 수 있습니다.”, “흠, 이 자식은 자기 재산에 비해선 질 낮은 걸 보냈네요.”, “오. 이건 힘 좀 쓴 것 같네요. 정성이 보여요.” 등등의 말을 하며 받아도 될 것, 받으면 안 될 것을 확실히 분류했다.
그리고 받아도 될 만한 것은 차곡차곡 모아 수도에 있는 저택에 쌓아 놓고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상한 목록까지 만들어 와서 재산을 쌓아 올리더라.
진짜 비서라도 고용한 줄 알았지. 아니면 집사.
모나한은 실제로 예전에 그쪽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방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기 재산 쌓는 건 관심 없지만, 내 재산이 많아지는 건 행복하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모나한?
내가 뭔가 사악한 악당이나 음흉한 짓으로 뇌물을 받은 사람 아니냐는 의심에 찬 눈초리잖니!
네가 받은 거라고, 네가!
“제가 좀 실력이 뛰어난 제빵사여서요.”
“……그렇군요.”
로나는 당신이 열심히 모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냥 자신이 뛰어난 제빵사라 뇌물을 받는다고 말했다.
말하고도 이상한 이유인 것 같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자, 모나한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말하니까 넘어가지만 믿을 수 없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로나는 대충 넘어가자며 고개를 저어 버리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튼 아까 설명한 대로 우린 부부고, 만나서 같이 산 지는 약 200년 정도 되었고요.”
“200년이나 같이 살았다고요?”
“네. 무슨 문제라도?”
“……아뇨. 제가 남과 오래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래요?”
아닌데, 당신. 1분이라도 떨어지면 그리웠다고 울상으로 달라붙던데.
이때다 하고 온갖 아양과 주접을 떨면서 혀에 버터를 바르려고 하던데.
“절 만나기 전의 모나한은 잘 몰라서요. 뭐라 하기 좀 그렇네요. 그런 건 나중에 정리하도록 하고, 우선 밖에서 돌아왔으니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어요.”
차를 마시고 쓰러지기까지 했고.
“저쪽이 욕실이니까 따뜻한 물에 몸 좀 푹 담그고 와요. 그 후에 제대로 된 이야기를 좀 해 보자고요.”
로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모나한에게 옷장에서 옷을 꺼내 쥐여 주고는 욕실을 가리켰다.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최소한의 대화만 한 채 조용하게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던 모나한은 로나의 말에 소리도 없는 발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로나는 그 뒷모습에 작은 한숨을 쉬곤 방의 소파에 앉아 아공간을 뒤적였다.
아공간에 가득 쌓인 빵 중에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를 생각이었다.
모나한의 과거는 잘 모르지만, 뱀파이어들이 힘든 상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다 버려 두고 훌쩍 떠나가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모나한의 모습이 딱 그러기 직전이라는 것도.
우선은 저 경계심 많고 의심 가득한 모나한을 어떻게든 자신의 옆에 붙여 놔야 한다.
지금까지 주인공들을 겪어 온 경험에 의하면,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땅에 삽질 좀 하고 남주인공이 후회 남주가 되기 위한 무덤 좀 파고 드디어 여주인공이 포기하고 ‘그래! 무덤에 들어가라, 들어가!’라고 소리칠 때쯤에 모든 저주가 풀리면서 기억이 돌아오게 될 거다.
그리고 그때 모나한의 기억도 돌아오겠지.
그러니까 로나는 그때까지 저 의심 가득한 회색 머리를 어떻게 저렇게 잘 요리해서 데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
그동안 달달 느끼한 모나한을 보지 못하겠지만……. 흠, 그건 또 새로운 맛일지도?
“붙잡아 두기는 아주 쉽지.”
기억을 잃어버렸다 해도 식욕의 노예일 뿐인 것을.
케이크 좀 만들어다 입 안에 쑤셔 넣어 주고, 쿠키 좀 구워다가 손바닥에 놓아 주면 좋다고 졸졸졸 쫓아올 놈이었다.
지금도 봐라. 좋다고 남주가 주는 차를 마셨다가 기억 상실에 걸렸잖아!
네가 다섯 살짜리 어린애야!?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먹지 마세요! 맛있는 거 준다고 따라가면 안 돼요!
로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가 뱀파이어들에게 저런 충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날 말해 봤자 맛있는 게 있다면 따라가다 못해 온갖 유혹술을 펼쳐서 만든 사람까지 홀라당 먹어 버릴 식욕의 노예들이었으니까.
로모나 빵집이 생긴 지 약 200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온갖 선물과 뇌물을 받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이종족과 계약할 때 직접 케이크나 빵을 만들어 가는 게 기본사항이었으니까.
그걸 넘기면 헤벌쭉하고 서류에 도장을 찍는 걸 몇 번이나 보아 왔으니까.
서류에 도장 찍은 걸 후회하다가도 결국 입에 빵이 들어오면 ‘괜찮은 거 아닐까……?’ 하는 표정이 되는 걸 몇 번이나 봐 왔다.
로나는 모나한에게 ‘누가 맛있는 거 준다고 해도 받아먹지 말아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며 치즈 쿠키가 든 봉지를 허공에 던졌다 받으며 모나한이 씻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