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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처음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잊어버리지 않고 신경 쓰던 이름이었다.
한두 번 즈음은 다시 만나자는 편지가 왔던 것 같은데, 거절하고 나서는 조용히 사그라든 이야기이기도 했지.
과거 어느 순간에 받았던 편지에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어른스러운 글씨체가 꼭 그 글씨체와 닮은 문체로 이야기했었다.
자신이 이룬 것, 그러지 못한 것.
자신이 바랐던 것, 바뀌어 버린 것, 더 커져 버린 것.
가까운 곳에 로모나 빵집이 생겼다는 이야기, 이 편지를 받은 당신이 매우 의아해하고 있을 것 같다는 작은 짓궂음이 섞인 말.
로나의 아공간 한구석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는 편지는 이젠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되었다.
로나는 새삼 모나한이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들면서 미안해하던 표정을 돌아보았다.
오랜 세월을 살며, 많은 이들을 보내야 할 거라던 당연한 이야기.
그리고 보내야 했던 수많은 사람.
작게는 단골손님부터, 한때 도움을 받았던 사람과 도움을 주었던 사람. 상태창의 주인공, 친구와 가족, 모틸라와 발터까지.
나도 많이 울었었고, 모나한도 많이 울었던 순간들.
익숙해질 거라고 말하는 모나한이 가장 익숙해 보이지 않은 얼굴을 하던 순간.
그리고 또 하나,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죽음 앞에 로나는 조금 웃었다.
비석에 적힌 글귀가 그녀와 가장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가장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은 세르빈 아실라. 여기 잠들다.]
이 아이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방황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사실은 매우 흐릿해진 지 오래이긴 했지만, 이야기에서 벗어나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맑은 눈을 기억한다.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던 순간.
“로나 님?”
로나는 연한 하늘색과 분홍색 꽃잎들이 바람에 살랑이는 것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하얗게 세어 버린 곱슬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가 한평생 얼마나 많이 웃고 살았는지 말해 주는 것 같았고, 곧게 펴진 허리와 여유로운 자세, 깔끔한 옷은 꽤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로나와 마주친 녹색 눈은 그의 나이에 비해 여전히 밝게 빛나는 열정이 가득해 그를 젊어 보이게 했다.
노인은 조금 멋쩍다는 낯으로 앞머리를 긁적이다가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나 앞머리는 다시 내려와 노인의 둥근 이마를 간지럽혔고, 그는 그것이 매우 익숙한 하나의 버릇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그리고 로나는 저런 버릇을 가진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리앙?”
성은 기억나지 않게 된 지 오래였지만, 이마를 가리는 갈색 앞머리를 버릇처럼 쓸어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학생.
어린 나이답지 않게 여유로운 태도와 관록 있는 눈빛에 묘하게 나이 들어 보였던 소년은 이제는 반대로 묘하게 젊어 보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정말 로나 님이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전 아주 잘 지냈죠. 리앙은요?”
“머리카락이 하얀색이 될 만큼 많은 일이 있었죠.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겠군요.”
“전 시간이 아주 많거든요. 아직도 머리카락이 갈색일 만큼.”
“차라도 한잔하러 가시겠습니까?”
“유부녀라도 괜찮다면요.”
“마침 잘됐군요. 저도 유부남이거든요.”
로나는 리앙의 대답에 크게 웃고는 그가 내민 팔을 붙잡고 옆에서 길을 걸었다.
따가운 오후 햇살이 영원히 갈색일 머리카락과 하얗게 세어 버린 갈색 위에서 반짝였다.
“노년 미남과 데이트라니 영광이네요.”
“저야말로 로나 님과 데이트할 수 있어 영광이죠.”
로나가 리앙이 건네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작게 웃었다.
“절 보고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소식을 들었거든요. 제빵 업계의 가장 큰손인 로모나 빵집의 주인이 뱀파이어라고.”
“이제 신전에 신고하고 성기사들이 몰려오고?”
“그러기엔 시대가 많이 바뀌었잖습니까. 정체를 숨겨야만 살 수 있던 많은 종족이 이종족 차별 금지법이 제정된 이후로 열심히 자신을 알리며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여전히 차별적인 시선이 많죠.”
“시간이 필요한 일이죠. 점점 괜찮아질 겁니다.”
리앙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그만 장난기가 섞인 얼굴로 물었다.
“저보다 로나 님이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요. 절 만나서요.”
“음, 맞아요. 사실 지금도 꽤 놀라는 중. 거의 100살에 가깝지 않아요?”
“넘은 지 조금 됐죠.”
“제가 사람과 시간관념이 달라진 지 오래여서……. 근데 100살이 넘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제 조상 중 엘프가 있거든요. 덕분에 100살보다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죠.”
하지만 앞으로 몇 년 안 남았을 거라고,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100살보다 조금 더 산 어느 날 갑자기 확 늙더니 돌아가시더라고.
리앙은 매우 덤덤하게 말했다.
“엘프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어느 순간까지는 정정하다가 갑자기 확 늙어 버리시더군요. 저도 그러겠죠. 그 전에 로나 님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리앙의 소식은 못 들었지만, 아실라의 소식은 많이 들었어요. 편지도 좀 받았고요.”
“그분은 당신을 은사님으로 여겼으니까요.”
“전 그녀에게 해 준 게 없는데 말이죠.”
로나는 아직도 그게 가장 의아하다면서 멋쩍다는 표정을 했다.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이 오히려 남들보다 차갑게 대했던 것 같은데, 아실라는 자신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래서입니다.”
“네?”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서요.”
그분 주위에는 뭔가 해 주려고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죠.
리앙은 아주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가 버린 사람을 회상하듯 조금은 흐려진 눈동자로.
“로나 님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저 계속 어린 아이였을 거라고, 그녀가 몇 번이나 말했답니다.”
로나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침묵했다.
오래 살다 보면 이러한 순간이 오곤 한다.
내가 한 아무런 의미 없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아주 큰 의미로 남아 그의 생애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시스템 창과 함께하고 있는 로나는 그런 순간들이 비교적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오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로나는 그 순간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리앙도 그것을 느꼈는지 그는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가벼운 내용으로 말을 이었다.
“로나 님이 떠나고 나신 후에도 아실라 님을 향한 구혼이 멈추지 않긴 했죠.”
“여전히요?”
“심하면 더 심해졌지 줄지는 않았답니다. 그분이 많은 제도와 법률 같은 것을 공부하면 할수록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죠. 음,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딱 맞는 귀족의 표본 같은 여성이라던가?”
“와우.”
“아실라 님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도망 다니셨지만요.”
리앙은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모두에게 친절하시던 분이 차가워지시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절벽 위 도도한 한 떨기 꽃’ 같은 이야기가 돌아서 아예 도서관과 기숙사만 왔다 갔다 하던 시절도 있으셨고요.”
“아실라도 고생이었겠네요.”
“정말로요.”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리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꿋꿋이 공부하시고 마음이 맞는 학생들을 모아 동아리도 만드시고, 성인이 되셔서 작위를 얻으셨을 때는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하고 그러셨죠.”
그리고 저랑 결혼하고요.
“……네?”
로나는 지나가는 이야기인 듯이 훌쩍 말해 버리는 리앙의 가벼운 목소리에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리앙이 씨익 이빨을 보이며 웃는 얼굴에 헛웃음을 지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네요. 리앙 씨랑 아실라 님이랑 결혼했다는 거죠?”
“결국 자신에게 돈을 많이 써 줄 남자랑 결혼했다는 소문이 실컷 돌았죠.”
“으윽…….”
“뭐, 사실이었으니까요. 제가 벌고 아실라 님이 썼거든요.”
자기 자신에게 쓰신 건 별로 없으시지만요.
“그래도 많이 쓰시긴 하셨죠. 한동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고. 그 후에 독이 넘치도록 돈이 들어오던 시절도 있었고요.”
리앙은 오히려 파란만장하고 엉망진창이라 재밌었던 삶이었다고, 환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 얼굴이 꼭 마지막에 봤던, 아실라를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과 똑같아서 로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로나 님도 많이 달라지셨네요.”
“그래요? 뱀파이어가 되면서 외모가 예뻐지긴 했죠.”
“그것 말고……. 눈요.”
로나는 리앙의 말에 반사적으로 눈가에 주름이라도 있나 만지작거렸지만, 여전히 탱탱하고 솜털이 느껴지는 피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앙이 로나의 모습을 보고 조금 웃다가 말을 이었다.
“눈이 좀……. 늙으셨다고 하면 좀 그렇고, 깊어지셨네요. 눈빛이랄까, 시선이랄까.”
“아……. 뭐, 100살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다른 이종족 분들도 몇 분 만나봤는데, 그들은 안 그러던데요?”
“100살 즈음 되었을 때는 그런 눈을 하는데, 그 이상이 넘어가면 다시 점점 젊어진대요. 나이를 거꾸로 먹게 된다고 막 웃더라고요.”
“음…….”
“포기하는 방법이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찾고 나면 다시 유치해질 수 있다나 뭐라나.”
로나는 리앙의 말대로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말했다.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것에 점차 익숙해진 사람의 표정.
많은 것들을 겪고, 그것을 지나 보낸 사람의 차분한 분위기.
리앙이 그녀의 깊어진 눈동자를 보며 무언가 말을 걸려고 했을 때, 그들이 앉아 있는 카페의 유리 창문에 그림자가 졌다.
톡톡- 톡.
드리워진 그림자와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들기는 소리에 두 사람이 옆을 바라봤다.
창문 밖에는 회색 머리를 가볍게 넘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로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선홍색 눈동자를 살짝 휘며 웃었다. 그러고는 옆의 리앙을 가리키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옆의 남자는 누구냐는 불만이 선명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보는 로나의 얼굴은-.
“모나한-”
입가를 환하게 올리고, 눈가를 휘고, 선홍색 눈동자가 따뜻하게 반짝이고.
그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 못 말리겠다는 듯이 키득거리고.
차분히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생기있게 반짝이며 온갖 아름다운 물감이라도 뿌려놓은 듯이 생동감 있게 바뀌는 순간.
리앙은 자신에게 언제나 그런 표정을 짖던 사람을 떠올리면서 웃고 말았다.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이 무색하게 한가득 생기를 머금은 이가 저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