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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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는 서류를 사락사락 넘기며 멍하니 생각했다.

질문한 사항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말해 주는 실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뇌 한구석에서 현실인지 헷갈려 이상한 농담만 톡톡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모나한을 만나지 않고 그냥 시골 마을에 살았더라도 어느 순간 휘말려서 계약이 체결되고 빵집이 생기고…….

잘생긴 미남은 아니고 돈 많은 이종족들이 주위를 둘러싸 식빵을 두 손 위에 올리고 찬양받고…….

내가 아니라 빵을 향한 역하렘이 형성되고……. 아이고! 내 사랑스러운 단팥빵아, 좋은 남자를 골라야 한다! 남자는 입을 봐야 해! 얼마나 한입을 크게 베어 물 줄 아는가를 봐야지!

그건가? ‘이 세계에 갔더니 제빵계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내 빵이 만드는 역하렘에서 최고 권력자인 황제 포지션인 거지. 내 사랑스러운 빵과 결혼할 남편을 골라라!

로나는 온갖 드립이 떠오르는 머리에 고개를 휙휙 젓고는 다시 실리의 설명에 집중했다.

실리가 그런 로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특히 모나한의 지인이 많은 돈을 냈어. 결혼식 축의금을 좀 적게 줬다든가, 모나한에게 빚진 게 많은데 이 김에 좀 줄여야겠다든가.”

“가끔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모나한 도대체 어떤 인맥을……?”

“저 녀석 우리 무리의 원로 중 하나잖아. 초창기 구성원인 데다가 초대 왕인 모틸라하고 막역한 사이고.”

로나는 실리의 말에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모나한을 돌아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방긋 웃는 그의 모습에 눈만 몇 번 깜박였다.

“우리가 수평적인 무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모나한은 꽤 높은 직급이지? 재산 쌓는 취미가 없어서 그렇지 권력은 꽤 있는 편.”

이를테면 젊은 시절 전쟁 영웅이었던 은퇴한 공작님 느낌?

“모틸라도 은근히 돈은 잘 안 모았지? 모이면 그냥 무리 자금으로 넣어 버리는 편. 원로들은 그런 이들이 많긴 하지만.”

전쟁을 겪어서 그런가? 원로 중 돈을 많이 모으는 이들은 별로 없단 말이야.

실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좀 극단적이라 해야 하나. 모으는 이들은 어마무시하게 모으기도 하거든.”

구하기 힘든 재료라도 얼마든지 구해다 주겠다는 무역 왕 뱀파이어가 그중 한 명이라며 실리는 그분이 주도한 계약이라고 계약서에 적힌 이름을 톡톡 쳤다.

“아, 이 녀석 목숨을 몇 번 구해 주긴 했었죠.”

모나한이 서류를 보며 기억나는 이름이라고 상큼한 얼굴로 말했다.

이 자식! 세계적인 부호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한 과거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아무튼 들어 보니까 로나 너는 어차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한다면서? 그래야 제빵 실력이 는다고 들었는데.”

“어……. 비슷하기는 하죠?”

제빵이 아니라 한식 실력이 느는 거기는 하지만.

아닌가? 새로운 주인공을 만나면 경험치랑 빵 코인이 많이 들어오니까 제빵 실력도 느는 건가?

“그러면 여행하는 도중에 한 번씩 빵집에 들러서 관리해 주면 되겠다. 우선은 제빵에 관심 있는 뱀파이어나 다른 이종족을 제빵사로 훈련해 놨는데, 거기에 참여해서 레시피를 좀 교육해 주면 좋겠어.”

“아, 네네. 그럴게요.”

“하고 싶은 레시피하고, 그에 따른 재료 좀 알려 주고. 레시피에 대한 값은 제대로 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 감사합니다.”

“황실 제빵사의 레시피값 정도로 측정할 예정이거든?”

“……그, 그 정도로요?”

“너랑 오래 같이 일하고 싶기도 하고, 실력도 있으니까 대우하는 거지. 게다가 뱀파이어잖아! 오래오래 살면서 수많은 레시피를 개발해 줬으면 좋겠어!”

실리가 미래를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며, 정말로 침을 꼴깍 삼키며 시종일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펼쳐질 빵 색 미래에 행복하기만 하다나 뭐라나.

사실 인디고 영지에 머물 때부터 서류를 들고 찾아가 계약하고 싶었는데,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안 됐기도 하고, 휴식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데다가, 모틸라가 있으니 조용히 있었다고.

“10년 동안 진짜 끙끙 앓았지! 가끔 보내 주는 빵을 먹으면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버텼지만……. 역시 갓 만든 따끈따끈한 빵이 먹고 싶어!”

많이! 왕창! 가득히!

묘하게 광기가 번뜩이는 눈빛이라 조금 겁먹은 로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않으면 어딘가에 묻힐 것 같았다.

아니지, 어딘가에 갇혀서 군만두만 먹으며 빵을 구울 것 같은 예감…….

등줄기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환하게 웃으며 계약서를 내밀던 실리는 광기에 찬 모습과는 다르게 그래도 계약서는 꼼꼼히 읽어 봐야 한다며 시간을 주었고, 로나는 일주일 동안 계약서를 주의 깊게 읽고 마침내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로나는 그렇게 이세계 제빵계의 프랜차이즈 회장이 되었다.

“……진짜인가.”

“네?”

“삶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지금 제가 가진 빵집이 도대체 몇 개죠?”

“각 나라 수도에 있는 3층짜리 건물하고, 주요 도시에 있는 2층짜리 건물들을 세면-”

“1층짜리도 있잖아요.”

“그건 작은 마을인데 휴식하는 뱀파이어들이 지어 달라고 하도 그래서 해 준 거잖아요. 늑대인간 마을에 있는 건 건물도 아니고 천막이고.”

말 그대로 땅이 이어진 곳이라면 어디든지 퍼진 로나의 빵집 ‘로모나’였다.

평민들도 빵집인 걸 알 수 있게,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조각 모양의 간판을 가진.

세계 최고의 제빵 브랜드.

결국 로나는 이후 전 대륙의 빵집을 돌아다니며 관리 감독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각 나라 수도와 주요 도시, 관광 도시에 있는 빵집이라 여행하는 재미가 있기도 했다.

가끔은 시골을 돌아다니며 한적한 풍경들을 감상하기도 하고, 화려한 관광 도시의 거리를 신나게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힘들면 제국 수도에 돌아와서 쉬다가, 또 여행을 떠나고.

그러다가 주인공을 만나면 그 마을에 한참을 머물다가 또 떠나고.

로나가 그렇게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로모나 빵집을 관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면서 세상은 조용히 바뀌었다.

마법 혁명이 일어나 산업용 마법진이 많이 생겼고, 덕분에 우후죽순으로 마법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공장에서 일하고, 노동 시간과 관련된 사건과 법들도 생기고, 전기 마법의 발전으로 인해 각 도시에 마법 가로등이 전기 가로등으로 바뀌고…… 등등등.

전생에 있었던 많은 사건이 이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달까?

어딜 가든지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때로는 두 사람만 따로 동떨어진 체 숨 막힐 정도로 빠르게 변해 가는 거리를 둘이서 구경하며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수명이 긴 만큼 예정된 이별들이 그들에게 찾아오곤 했다.

모나한이 모든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동굴 속에 잠들었다는 말이 이해되던 순간들.

모나한이 동굴 대신 숲속의 작은 오두막이라도 짓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그 아담한 오두막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슬픈 순간들이었다.

모틸라가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을 때와 발터가 마지막으로 밀터의 볼을 쓰다듬고 떠났을 때도.

로나의 부모님이 조용히 돌아가시던 순간들과 친구들이 숨을 거두던 시간들에.

로나는 알고 있던 이별임에도 마음 아파했고, 슬퍼했고.

힘든 마음에 어쩔 줄 몰라 숲속에서 며칠을 창밖만 바라보며 멍하니 울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문밖을 나서고, 웃으면서 농담을 건네고, 길을 걸었다.

한때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아무와도 인연을 쌓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로나가 그러지 못했던 건, 그녀가 아주 오랜 세월을 살며 아주 조금씩 이별에 익숙해지고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알게 되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상태창이 어떻게든 사람들과 그녀를 엮었기 때문이었다.

상태창과 엮이는 이들이 특히 새로운 기술을 만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법률을 만들거나 하는 커다란 일에 휘말리는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온갖 슬픔에 잠식되어 우울하게 있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나 빵을 구워야 했다.

상태창은 꼭 슬픔이 살짝 가시고 ‘이제 괜찮아진 걸까?’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즈음에 어이없거나 웃긴 짓으로 주인공과 만나게 하곤 했다.

피식거리며 몇 번 웃고, 주인공들의 황당한 짓에 정색하고, 모나한이랑 소곤거리고 나면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평소의 로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언제나 묘하게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하는 제삼자의 포지션이긴 했지만.

빵집 로모나가 프랜차이즈화 되면서 ‘로모나 회장님과 만난 이들은 전부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라는 소문이 나돈달까…….

세계의 흐름에는 로모나 회장님이 있다고 다들 수군거린달까…….

상태창, 이 무서운 아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는 거야!

아무튼 이제 로나는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이 아이는 또 어떤 연애를……?’이 아니라, ‘이 아이는 또 어떤 혁명을……?’이라고 생각하게 된 지 오래였다.

뭐,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 가서야 ‘아!’ 하고 깨닫긴 하지만.

그런 걸 보면 세상의 어떤 영웅이라도 평범하던 시절이 있구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죽음 또한 어쩌면 매우 당연하다는 사실도.

로나는 아주 오랜만에 본 이름 위에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이루어진 풍성한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죽은 사람에게 누가 하얀색 꽃만을 주라고 하였나.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언제나 꽃잎 같았던 분홍과 연한 하늘색이었으니까.

[세르빈 아실라]

로나는 비석 위에 쌓인 낙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털어 냈다.

그것도 모자라 주위에 있는 것들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왠지 낙엽의 진한 색감보다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드러운 색감이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 같았으므로.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만큼 누군가는 땅 아래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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