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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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로나가 발 옆에 튄 불똥을 밟아 꺼트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떠날 때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로나 님.”

“10년이면 오래 있었죠. 조금도 늙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최대한 사람들 눈을 피하거나 저택에만 머물렀지만…….”

“그걸 오히려 증거인 듯이 소문이 돌더군요. 인간이 아니라든지, 영주가 악마에게 홀렸다든지…….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고 있는 거라든지.”

발터가 모나한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자 억울함이 가득 담긴 표정이 드러났다.

“이대로 가 버리셔도 신전을 세워줄 때까지는 이상한 소문이 돌 겁니다. 증거도 없는데……!”

“저희 존재 자체가 증거가 돼 버리죠. 실제로 인간이 아닌 건 사실이니까.”

“모틸라는 차라리 늙어 가고 있으니까 의심에서 벗어나 다행이지만…….”

“신전이 세워지면 그냥 적을 집 안으로 들인 거나 마찬가지고요.”

세워지지 않으면 어떻게든 저희의 정체를 알아내서 그 핑계로 들어올 거라고, 신전의 술수는 많이 보아 왔다며 모나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진짜 신력이 있는 기사나 신관이 오기 전에 저희가 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신력이 있는 기사나 신관이 오면 모틸라 님도 위험하잖습니까.”

“모틸라는 마법사인 데다가 발터 씨의 부인이니 귀족으로 생각해서 검사하기엔 귀족들의 눈치가 보일 겁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발터 씨 눈에서 더더욱 벗어날 테니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테고요. 하지만 저희는…….”

“귀족도 아니고 평민으로 알려진 데다가, 평범한 제빵사로 알려져 있잖아요.”

“원래 있던 영지민은 마법의 제빵사다 뭐다 하고 있지만, 나중에 들어온 이들은 그냥 영주 직속 제빵사인 줄 알고 있고요.”

역시 떠나는 게 좋겠다는 로나와 모나한의 말에 발터와 모틸라가 인상을 한가득 찌푸렸다.

“……더 있었으면 좋겠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우리도 좀 둘이서 좋은 나날을 즐겨 보자.”

“평소에도 둘이서 잘 즐기면서 무슨 헛소리래. 밀터도 아쉬워할걸?”

“우리가 들르기는 눈치 보이니까, 너희가 가족 휴가다 뭐다 해서 놀러 와. 혹시 오래 정착하게 되는 곳 생기면 편지 보낼 테니까.”

모나한이 하는 말에 모틸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두 알고 있었다. 슬슬 로나와 모나한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걸.

오히려 원래 있겠다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있었다는 걸.

“밀터가 울어도 달래 주지 않을 거야.”

“제가 모틸라보다 밀터를 더 잘 달랬던 것 같은데요.”

“밀터가 네 다리에 매달려도 말리지 않을 거야.”

“애를 앞세워 협박하는 거냐?”

모틸라가 그 말에 발터의 품에 자고 있던 밀터를 들어 올려 로나와 모나한의 앞에 들이밀면서 말했다.

“이모랑 대부가 밀터를 두고 가 버린대! 밀터야, 울어!”

모틸라의 손에 들린 밀터가 완벽하게 안정적으로 잠든 모습 그대로 들이밀어졌다.

이상한 데서 뱀파이어의 우월한 신체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잠든 밀터의 뽀얀 볼살이 모나한의 볼에 닿아 뭉개졌다.

“애 가지고 잘하는 짓이다. 이리 줘. 안고 집에 가게.”

“내가 안고 갈 거거든! 가 버리는 대부에겐 주지 않을 거야!”

“하……. 너 언제 철드냐?”

“죽기 직전에?”

“아이고.”

모나한과 모틸라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로나와 발터가 모닥불을 끄고 자리를 정리했다.

모닥불을 끄자마자 주위는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곧 달빛에 적응된 눈이 밤 특유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 주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어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평범한 눈을 가진 발터를 위한 등불이 따뜻한 주황색으로 아롱져 흔들리며 길을 밝혔다.

말의 투레질 소리와 발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모틸라의 품 안에 잠든 밀터가 깨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잠결에 들었어도 행복한 추억이 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함께했다.

* * *

모나한이 마지막 짐을 마차 위에 올리고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있는데, 작은 발걸음이 빠르게 다가와 모나한의 한쪽 다리에 찰싹 붙었다.

허벅지 부근이 뜨겁고 축축이 젖어 가는 게, 밀터가 달라붙어서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었다.

모나한은 모틸라가 말한 대로 자신의 다리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밀터를 내려다보았다.

“밀터.”

“대부우…….”

“기사가 될 거라면서, 그러니까 이제 울지 않을 거라면서?”

“하지만 필요할 땐 눈물을 흘려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누가 그런 걸 가르쳤어.”

“대부가요.”

“……나한테 이상한 것 좀 그만 배워 갈래?”

모나한이 하는 말에도 밀터는 고개를 휙휙 저어 눈물 자국을 더 번지게 할 뿐 모나한의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달랜 걸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밀터에게는 첫 이별일 테니 슬픔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나한. 어린 함정에 꽉 잡혔네요.”

“어린 함정이 워낙 딱 달라붙어 움직이기 힘드네요.”

모나한이 말과는 다르게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장난스럽게 털었지만, 뱀파이어의 피가 섞이긴 섞였는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튼튼하고 힘도 센 밀터는 미동도 하지 않고 꼭 붙어 있었다.

모나한은 결국 포기하고는 한쪽 다리에 밀터를 달고 짐을 옮겼다.

“가지 마세요.”

“갈 거예요.”

“안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됐던 문답이 또 시작됐다.

처음엔 밀터를 무릎 위에 앉혀 두고 차분히 어르던 모나한도 나중에 가서는 대충 대답하며 다리나 휙휙 저어 댔다.

밀터도 한두 번이 아닌 문답이라 입을 삐죽거리며 계속 말을 걸 뿐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너희 집에 놀러 온 거니까 이젠 네가 우리 집에 놀러 와.”

“대부 집이 어딘데요?”

“나중에 정해지면 말해 줄게.”

“대부 거지예요? 거지들이 보통 집 없이 돌아다닌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배운 건지.”

“대부한테요.”

“그런 건 안 알려 줬어.”

“알려 주고 잊어버렸나 보죠.”

“내 기억력은 아직 짱짱해.”

묘하게 짝이 잘 맞는 대부와 대자였다. 로나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며 웃다가 입은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그러고는 아직 그대로 모나한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밀터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우리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

“아이구, 우리 강아지. 또 우네? 볼이 축축하다 못해 불었다.”

“흐이잉…….”

“또 보면 되잖아. 그땐 키가 얼마나 커졌을지 벌써 기대되는걸?”

“흐이이이잉…….”

“누구 닮아서 우는 얼굴도 이렇게 귀여울까?”

“모나한 대부요.”

밀터가 작은 손가락으로 모나한을 가리키며 하는 대답에 로나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다가 어느새 다가온 발터에게 아이를 넘겨 주었다.

밀터도 말리지 못하는 걸 알았는지 발터에게 꼭 매달려 눈물을 닦았다.

눈물은 멈췄어도 삐죽거리는 입술이 옆에 서 있는 모틸라와 똑같아서 로나는 한 번 더 웃고 말았다.

“잘 있어요. 편지할게요.”

“혹시 돌아오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돌아와.”

“방을 깨끗이 정리해 놓고 그대로 두겠습니다.”

“뭘 그래요.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써요.”

“어차피 구석진 곳이라서 잘 쓰지도 않는 방이거든? 가끔 놀러 와. 몰래 오면 되잖아.”

모틸라가 툴툴거리며 하는 말에 결국 로나와 모나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끄는 말이 발터가 수소문해서 구한 좋은 말이라 마차는 옛날에 타던 때보다 아쉬울 정도로 손쉽게 앞으로 나갔다.

로나는 마부석을 밟고 일어나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결국 다시 눈물이 터졌는지, 밀터가 아빠에게 매달려 엉엉 울고 있었다.

“음……. 모틸라도 우는 것 같은데요.”

“우는 얼굴하고 삐진 얼굴이 밀터하고 똑같아요.”

“밀터가 모틸라를 닮은 거겠죠.”

“가끔 보면 반대 같다니까요.”

로나는 세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보며 모나한과 이야기했다.

그런 로나의 목소리도 살짝 잠겨 있어서 모나한은 마차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많이 아쉬우세요?”

“그러긴 하지만……. 새로운 주인공을 만나러 갈 때도 되었죠.”

“새로운 한식 레시피가 아니라요?”

“10년이면 많이 참았죠?”

“그동안 이상한 것만 나왔잖아요. 마시멜로라든지, 반건조 오징어라든지.”

“반건조 오징어는 맛있었어요. 한식은 아니지만.”

“발터는 보고 촉수 괴수를 말린 거냐고 물어봤잖아요.”

“저는 오히려 촉수 괴수가 있다는 걸 알고 놀랐는데 말이죠.”

로나가 다시 마부석에 앉으며 하는 말에 모나한은 그녀를 보고 살짝 웃어 주고는 다시 마차 속도를 올렸다.

가을이라 단풍이 가득 든 풍경이 화려하게 아름다웠다.

단풍이 잔뜩 깔린 길조차 온갖 색으로 화려했고, 마른 낙엽에 마차 바퀴에 밟혀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는 로나를 기분 좋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침 노란 은행잎 하나가 떨어져 로나의 치마 위에 내려앉았다.

“어디로 가 볼까요?”

“이젠 뱀파이어 신체도 완전히 익숙해졌으니까……. 제국의 수도?”

“마침 실리가 제국 수도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죠. 로나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도 했고.”

“안 그래도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가는 길에 관광 도시를 들르게 조금 돌아가자고요.”

“마을 세 개 즈음 지나면 정원을 아주 멋있게 꾸며 놓은 곳이 있다던데.”

“가을이라 더 멋있겠네요.”

로나가 은행잎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은행잎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마자 머리 위로 온갖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단풍이 다 떨어지기 전에 가야겠네요.”

“그러게요. 잘못하면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겠어요.”

둘은 온몸에 단풍잎을 묻히고 서로 모습을 보며 크게 웃다가 이야기했다.

모나한이 마차 속도를 빠르게 올렸고, 마차 바퀴가 형형색색의 단풍잎을 밝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풍의 달콤한 냄새가 주위에 온통 퍼지고 있었다.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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