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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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그 빵집은 제빵계의 제왕이야’라고 불리는 빵집입니다

로나가 언덕 위의 하얀 벤치에 앉아 노을 진 붉은 하늘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회색 머리카락을 노을에 주홍빛으로 물들인 모나한이 천천히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언덕 위에서 손을 흔드는 로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기다란 다리로 쑥쑥 올라온 그는 금세 로나 앞에 도달해 허리를 숙이더니 볼에 짧게 입맞춤하며 인사했다.

“저 마중 나오신 거예요?”

“아뇨. 노을 지는 거 구경하려고요.”

“오, 이런.”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짓궂게 웃으며 하는 말에 모나한이 슬프다는 듯이 눈썹을 내렸다.

로나가 그 표정을 보며 작게 웃다가 아공간에서 따뜻한 차를 꺼내 모나한에게 건넸다.

“옆에 앉아요, 모나한 주려고 가져온 차도 있으니까.”

“역시 절 기다리신 거네요. 그렇죠?”

“아니라고는 안 할게요.”

로나의 옆에 앉은 모나한이 따뜻한 차로 식었던 몸을 녹이며 그녀와 함께 노을이 지는 것을 구경했다.

해는 금방 사라졌고, 저택 뒤에서부터 검어지던 하늘은 완전히 새까맣게 변해 온갖 색의 별들을 뽐내기 시작했다.

“마을은 어때요?”

“많이 발전했죠. 200명도 안 되던 마을이 이젠 1,000명이 넘으니까요.”

언덕 위에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긴 했다.

저택 주위에나 겨우 모여 있던 집들은 이미 저 멀리 평야까지 들어선 지 오래였고, 도적들에 의해 망가졌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과수원은 점점 멀어지고 커져 초여름만 되면 마을 주위를 온통 오렌지꽃으로 동그랗게 뒤덮었다.

돌을 겨우겨우 쌓아 올려 만들었던 담장은 훨씬 커져서 내성의 벽이 되었고, 이젠 외성의 벽까지 쌓아 완공되기 직전이었다.

겨울에 농사를 마친 영지민이 달라붙으면 봄이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나리라.

“10년이나 지났으니까 발전할 만하죠.”

“생각보다 여기 더 오래 있었네요.”

로나와 모나한의 말대로 그들은 10년째 인디고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인간의 시간이라면 긴 시간이지만, 뱀파이어인 그들에겐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느긋하고 규칙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럼에도 많은 일이 있었던 10년이었다.

모틸라의 결혼식은 기본이었고, 영지가 부흥하자 다른 영주들 때문에 파티를 열어야 하질 않나, 가까이에서 영지전이 터져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해서 갑자기 영지가 바빠지기도 했다.

모틸라와 발터의 결혼식은 로나와 모나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쁘고 화려하고 정다웠고 조금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식 내내 모틸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발터의 모습에 한참이나 웃었었다.

그만큼 모틸라의 모습이 화려하고 우아한 데다가 고혹적이기까지 했으니.

더 많은 수식어를 붙여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신부였지만, 로나는 귀찮음에 그만두기로 했고 모나한은 원래부터 그녀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 매우 싫어했다.

영지 부흥은 로나의 한식에서 시작됐다.

비 오는 날 먹는 파전부터 시작해서 불고기가 전파되고, 곰탕이 유행하더니 가장 난리가 난 건 감자탕이었다.

한동안 마을에 감자탕 전용 냄비가 식을 날이 없을 정도였으니…….

여전히 겨울에는 즐겨 먹는 음식이었고, 왠지 특이한 음식으로 유명한 영지가 돼서 관광 사업이 잘되기도 했다.

영지전은 휘말리지 않게 최대한 노력한 게 다였다. 어차피 아직 영지민 수가 적어서 섞이기도 어려웠으니.

결국 멀리서 관망했고, 영지전 중간중간에 도망쳐 오는 난민들만 받아들였다.

그 영지전은 생각보다 크고 오래 지속되었고, 덕분에 영지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건물을 세우랴, 혹시 모를 범죄를 관리하랴, 사람 수를 세고 일자리를 만들고 등등등.

한동안 서류 일 못하는 모틸라와 모나한까지 달려들어 머리를 싸매고 낑낑거려야 했다.

“그리고 모틸라가 임신도 했고요.”

“뱀파이어는 임신이 힘든데 3년 만에 해냈죠.”

모나한은 모틸라가 임신했을 때, 뱀파이어는 수명이 긴 만큼 임신 확률이 낮다며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었다.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는 좀 더 확률이 높지만 그만큼 아이가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일 가능성도 크다고.

결국 그의 말대로 모틸라와 발터의 아이, 인디고 밀터는 남색 눈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

막 태어나서 엉엉 울 때부터 풍성한 검은색 곱슬머리가 모틸라와 똑 닮은 아이였다.

“발터 씨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죠.”

“뱀파이어가 유산할 확률은 정말 낮다고 말해도 모틸라를 어화둥둥 하느라고 바빴죠.”

“모틸라는 오히려 무서워했잖아요.”

“그전에는 피임을 꼭 했거든요. 아이 낳는 건 괜찮지만 키우는 게 무섭다고.”

“그래도 결국은 저렇게 잘 키우고 있으면서.”

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로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 키우는 건지, 엄마가 아니라 친구처럼 지내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모나한이 그 작은 발소리를 맞이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발터의 남색 눈과 모틸라의 까만 곱슬머리를 닮은 하얀 피부의 남자아이가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로나 이모!”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머니.”

“조용히 해요.”

아이는 발터를 똑 닮은 무뚝뚝하고 말 수 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이가 웃는 얼굴은 모틸라하고 닮아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유혹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을 풍겼다.

게다가 조용할 때는 발터랑 닮았는데, 원하는 게 있을 때는 모틸라 같아서…….

아직 어린데도 온갖 예쁨을 다 차지하고 다녔다.

로나랑 모나한이 육아에 참여해서 그런지 이상한 곳에서 모나한의 느낌도 묻어났다.

그러니까-.

“저 오늘 로나 이모가 보고 싶어서요, 공부도 빨리 끝냈고요, 검술 훈련도 다 했구요-”

“응응, 그랬어?”

“해가 지기 전에 끝내려고 했는데, 못 해서……. 히잉……. 그래도 저랑 놀아 주시면 안 돼요?”

“아이구! 이모가 놀아 줘야지! 그럼!”

대놓고 속셈이 보이는 애교 짓 하는 거.

온 얼굴을 써서 원하는 걸 쟁취하는 거.

필요할 땐 뻔뻔해지는 거.

“……애가 저한테 이상한 걸 배워 갔어요.”

“모나한이 절 보면 매일 하는 거잖아요.”

“애 앞에선 뭐든지 조심해야 한다더니.”

로나는 아이를 안은 채로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로나의 목덜미에 제 곱슬 머리카락을 비비다가 고개를 빠끔히 들어 모나한을 보며 말했다.

“대부도 같이 놀아 주실 거죠?”

“내가 네 놀이 시종이냐?”

“하지만 언제나 로나 이모랑 같이 놀아 주시잖아요.”

“잔망스럽게 웃기는.”

밀터의 대부는 모나한이, 대모는 실리가 되기로 해서 그런지 밀터는 둘에게도 한껏 애교를 부렸었다.

결국 모나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가 히히히 웃는 밀터의 젖살 가득한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솜털이 가득한 보드라운 볼이 귀엽게 뭉개졌다.

“뭐 하고 놀 건데?”

“원래는 같이 말 타러 가고 싶었는데…….”

“해가 졌지만 가 볼까? 별도 보고, 모닥불도 하나 피우고-”

“닭 꼬치 먹을래요!”

“그래그래. 엄마 아빠도 불러서 같이 가자.”

로나는 모나한과 밀터가 나누는 대화에 흐뭇하게 웃었다.

모나한이 언제나 툴툴거리곤 했지만, 밀터랑 이야기할 때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행동은 부드러웠다.

결국 그날 밤, 다섯 명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닭 꼬치를 굽고, 차를 데우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밤이 더 어두워지고 잠을 참지 못한 밀터가 눈을 비비며 자기는 졸리지 않다고 중얼거리다가 모틸라의 무릎 위에 머리를 떨궜다.

모두가 키득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발터가 밀터를 담요에 둘러싸 품에 안았다.

“똑같은 얼굴이 둘이네.”

“자는 얼굴은 진짜 발터랑 똑같다니까.”

“저번에 봤는데 자는 모습도 똑같더라. 같은 자세로 자던데.”

“내가 봤을 때는 모틸라 너랑 똑같은 자세로 자던데? 이상한 데서 엄마를 닮았구나 싶었지.”

“뭔가를 유혹하는 얼굴은 모나한 너랑 똑같더라. 심지어 강아지한테도 눈웃음치던데. 네가 로나한테 하는 얼굴이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잖아.”

모나한이랑 모틸라가 키득거리면서 소곤거리는 말에 로나가 발터에게 차를 넘겨주며 피식 웃었다.

발터도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잠든 밀터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옛날에는 어색하게 올라갔던 발터의 입꼬리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런 발터의 표정에는 피곤함이 머물러 있었다.

“요즘도 신전이 난리 쳐요?”

그 피곤함을 보고 로나가 묻는 말에 발터가 조그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가 망해 갈 때는 가장 먼저 도망가 놓고, 영지가 부흥하자 어떻게든 다시 들어오려고 난리더군요. 이쪽에서 안 받아 주니까 압박이 심해지고 있어서…….”

“신전을 원하는 영지민도 점점 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원래 있던 이들은 배신감 때문인지 싫다 하는데, 새로 온 이들이 원하더군요.”

은근히 부추기는 세력이 있는 걸로 봐서 신전 쪽에서 사람을 심은 것 같다고 발터가 눈가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에 피곤이 가득 담겨 있어서, 모틸라가 다가와 발터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사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제가 영주인 데다 원래 있던 신전은 무너진 지 오래라서 다시 지어야 하는데 그건 제 허가가 있어야 하니.”

“신전 지을 때 드는 돈도 영주가 내는 거잖아요. 그런데 뭘 그리 뻔뻔하게 나오는 건지.”

“그 말이 제 말입니다. 영지 망하니까 바로 도망간 신전에 돈 줄 생각 없다고 큰소리치고 있죠. 거기서도 그 말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변명만 하더군요. 다만…….”

발터가 결국 커다란 한숨을 내쉬다가, 밀터가 뒤척이자 아이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로나 님과 모나한 님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마을에 내려갔다 왔습니다.”

모나한이 발터의 말에 입을 열었다.

“시종 중 한 분이 말씀해 주시더군요. 요즘 마을에 저희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시종을 뽑고 있는데…….”

“예. 그도 저희를 의심하기보다는 걱정해서 알려 주더군요.”

“……제가 두 분 귀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소문이 잠재워지지 않더군요. 꼭 누군가 소문을 억지로 퍼트리고 있는 것처럼.”

“저도 이상해서 요 며칠 마을을 돌아보다 발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전과 연관된 이들이더군요.”

“하……. 역시 그렇습니까.”

발터가 인상을 찌푸린 체 고개를 숙이자 결국 주위에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모틸라가 짜증 난다는 듯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시자 불이 잠깐 커다랗게 타오르다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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