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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는 검은 제복 소매 단추를 조심해서 달았다.
금으로 만들어져 섬세한 세공이 새겨진 단추가 얼마나 비싼 건지는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금액을 말하는 모틸라의 모습은 ‘비싸니까 조심해라.’가 아니라 ‘비싸고 예쁘니까 좋아!’였겠지만, 평생 기사로 살아온 발터에게는 햇볕에 탄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 정도의 금액이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몇 번 매만지던 그는 혹시 단추에 손때가 타 빛이 바랠까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고 혹시 구겨진 곳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에 꼭 맞춘 남색빛 제복은 단정하고 깔끔한 그대로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식전에 간단한 다과라도 하며 체력을 비축하시라는 시종의 말에 옷에 주름지지 않도록 조심히 의자에 앉아 새까만 쇼콜라 케이크를 목 뒤로 넘겼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긴장해서 그런 걸까? 지금만은 단것이 더 끌렸다.
로나가 발터를 배려한 건지, 쇼콜라 케이크는 저번에 먹었던 것보다 조금 더 쓴맛이 강해 그가 부담스럽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발터는 그 따뜻한 배려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거울을 보고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제 얼굴을 발견해 혼자 멋쩍어하며 볼을 쓰다듬었다.
거울 안에서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과 무감한 눈동자로 마주치던 자신이 언제부턴가 아주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연스러운 웃음을 넘어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며 혼자서 피식거리는 바보가 하나 존재했다.
발터는 그 웃음을 멈춰 보려 장갑 낀 손으로 올라간 볼을 문지르다가 모나한이 간식을 가져다주며 했던 말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자신도 상당히 바보 같았으니, 당신은 아주 바보 같을 거라는 말.
조금의 짓궂은 장난기와 상당한 진심이 들어 있던 말.
발터는 그 말을 떠올리고 결국 웃음을 멈추는 것을 그만두고 그냥 바보처럼 웃다가 습관처럼 앞머리를 만지려 손을 올렸다.
그리고 흠칫 떨고는 곱게 손을 내렸다.
곧 식이 시작하는데, 깔끔히 넘긴 앞머리를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오늘은 모틸라와 발터의 결혼식이었다.
발터가 인디고 영지의 영주이자 기사 작위를 가진 귀족이기에, 식은 로나와 모나한의 결혼식에 비해 훨씬 화려하고 허례허식도 많았으며, 주위 영지의 귀족들도 참가하게 되었다.
발터는 은인보다 더 큰 결혼식이라는 점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으나, 로나와 모나한은 손을 붕붕 저으며 오히려 이런 식으로 결혼했다면 도망갔을 거라고 질린 얼굴로 말했다.
모틸라야 파티를 더 크게 할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그녀는 결혼식뿐만 아니라 후에 파티도 신나서 준비했다.
사실 모나한과 로나의 결혼식은 작게 치러서 아쉬웠다며.
이젠 영지도 안정되다 못해 이렇게 발전했으니, 원 없이 파티를 계획해 보겠다고 말했다.
처음에 모나한이 조금 질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원래 모틸라의 모든 행동에 그런 표정을 하곤 했으니 그냥 넘어갔었다.
그리고 모틸라는 정말로 원이 없을 정도로 계획을 세웠지.
귀족들의 파티에 들어가는 돈이 어마무시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발터는 책상 위에 올라온 결재 서류에 손이 덜덜 떨리다 못해 온몸에 지진이 나는 줄 알았다.
도장을 찍는 손이 마구잡이로 떨려서 양손으로 찍어야 할 정도였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수도권에 비해서는 작은 파티이며, 모틸라가 아주 합리적으로 절약할 곳을 팍팍 절약하고 나서 만들어진 금액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떨리는 건 그의 손이요, 바들거리는 건 한번 망했던 영주의 소심한 마음이니…….
발터는 숫자에 무서움을 느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수의 뱀파이어들이 참석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와 하객 수가 엄청나게 늘기까지 했다.
분명히 로나의 빵이 목적일 거라고 모틸라가 씩씩거렸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축하받고 얼굴도 보고 싶었는지 허락의 편지를 보냈다.
생각보다 많은 주위 영주나 기사 작위의 귀족들도 참석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었지.
망한 영지가 1년 만에 완벽히 고쳐진 것도 모자라, 특이한 음식으로 인해 먹거리 관광으로 유명한 영지가 되기도 했다.
원래 오렌지꽃이 만발하는 초여름이나 과육이 열리는 계절에는 꽤 많은 이들이 관광차 들르곤 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로나가 영지에 머물면서 비 오는 날 파전이란 게 영지민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곰탕과 불고기, 감자탕이 차례대로 유행을 타 모든 영지민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특히 곰탕과 감자탕은 계속 끓이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그릇에 담아 내놓으면 된다는 편리함 덕분에 여관이나 선술집에서 내놓기 시작했고, 영지에 들렀던 외부인이 한두 명씩 먹어 보게 되면서 영지 특산 식품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자신이 먹었을 때도 맛있었고, 곰탕과 감자탕은 겨우내 추운 몸을 달랬던 음식으로 뜻깊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더 나서서 전파하고는 했다.
요리사나 제빵사에게 레시피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고 있던 발터가 로나의 눈치를 보곤 했으나, 로나는 오히려 흐뭇한 얼굴로 영지민에게 한식 레시피를 자세히 알려 주곤 했다.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인디고 영지가 한식의 메카가 되어 한식을 널리 전파하고, 나아가 새로운 한식을 만들어 내기를 진지하게 빌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다 본의 아니게 한식의 맛도 회상한 발터가 입맛을 다시다가 긴장이 적당히 풀린 걸 깨닫고 한 번 더 거울 앞에 가 의상을 정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결혼식이 시작되었다고 알리며 방문을 열었다.
발터는 긴장된 마음에 발걸음을 빠르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방을 나섰다.
신기하게도 가장 기대되는 건 결혼식도 아니고 주위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을 식장도 아닌,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을 모틸라의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절대 보여 주지 않겠다며 비밀로 한 게 몇 개인지.
드레스와 머리 장식, 액세서리와 부케, 구두와 면사포.
발터는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이나 화려한 것에는 별 상상력이 없는 그였으나,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름다운 것들을 끌어모아 버진로드를 밟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모틸라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는 긴장된 마음으로 식 순서에 따라 로나와 모나한이 결혼했던 영지에서 가장 오래된 오렌지 나무 아래에서 모틸라를 기다렸다.
귀족들을 불러야 해 둘의 결혼식보다는 조금 늦어진 날짜 때문일까. 머리 위에서 수분을 마친 하얀 오렌지꽃이 한두 개씩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저 멀리 버진로드 너머에서 천막이 느리게 들어 올려졌고, 그 아래 모틸라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고.
눈이 마주치고 환하게 웃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화려한 레이스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면사포였고, 그 하늘거림 아래 드러난 붉은 입술이 휘어지는 모양새였고.
평소보다 혈기 있게 화장한 볼이, 새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우아하게 떨어지는 드레스의 허리선이.
남색과 흰색, 연두색으로 화려하게 반짝이고, 금색의 리본이 하늘거리는 부케가.
부케를 잡은 가는 선의 팔에 낀 반투명한 레이스 장갑과 마침내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그리고 결국 다시 위로 올라간 시선과 반투명한 면사포를 사이에 두고 마주친 선홍색 눈동자가.
발터는 그녀가 웃고 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온갖 화려한 보석과 레이스, 액세서리와 드레스를 휘감아도 가장 화려한 이는 그녀였으나, 발터의 눈에 가장 눈부셨던 건, 면사포 아래 흘렀던 웃음이었다.
발터는 자신이 분명 바보처럼 웃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처럼 굳어 버렸거나.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거나, 아니면 눈을 둘 곳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거나.
주위에 온갖 환호성과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지 모든 소리는 뭉개지고.
에스코트하는 모나한이 자신의 표정을 보며 웃었던 것이나.
덜덜 떨며 내밀었던 손에 올려지는 가는 손이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는 것과.
한껏 가까워진 선홍색 눈동자에 자신도 웃었던가? 아니면 굳은 채로 멍하니 그녀만 보았던가.
발터는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모든 부분이 이 순간, 눈앞의 이 사람, 그 표정을 기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굳어 버린 자신을 아는 건지, 아니면 이 순간이 얼마나 떨리는지 알아 배려해 주시는 건지.
주례를 서기 위해 단상에 서 있던 로나가 웃으며 하객들을 향해 농담한 것도 같았다.
신랑이 많이 긴장했다든가, 신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든가 하는 뻔한 농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다운 조금은 특이하고 웃긴 농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발터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농담이었으니.
“그렇게 내가 좋아?”
눈을 떼지를 못하네.
모틸라가 언젠가 봄이 가득한 숲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었다.
그때와는 달리 조금의 떨림도 없는 목소리가 완연히 장난기만을 담고 있었지만.
“……예.”
대답하는 발터의 목소리가 오히려 떨림이 가득해서.
깜짝 놀란 모틸라가 예전의 발터처럼 조금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환하게 웃고.
모두가 고혹적이고 우아하다고 말할 이에게 발터는 장난기와 선홍색 눈동자에 섞인 조금의 불안을 읽고.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이제는 완전히 자연스러워진 웃음을, 드디어 지었다.
“이제야 신랑의 긴장이 풀렸나 보네요.”
로나의 목소리가 그제야 들려서 발터는 모틸라를 바라보던 눈을 겨우 돌려 단상에 서 있는 로나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로나가 발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 특유의 낮고 단정한 목소리가 식장을 온통 뒤덮는 오전.
오가는 맹세와 다짐. 면사포를 넘기는 손과 드디어 선명해진 눈동자.
몇 번을 그랬듯이, 언제나 그랬듯이 살짝 들리는 턱 끝과 약간 높아진 코끝은 그녀가 들어 올린 발끝만큼.
참지 못하고 다가간 한 발자국만큼.
초여름의 바람이 불었고 조금 늦은 결혼식인 만큼, 가장 커다란 오렌지 나무 밑에서 치렀던 만큼.
바람에 하이얀 꽃들이 화려하게 떨어지고.
종소리가 울렸던가? 아니면 박수와 환호?
구별할 수 없이 뭉개진 밝은 소리들, 구별할 필요 없이 떨어지던 꽃 아래서.
그들은 영원히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