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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가 도적들이 모틸라의 마법에 죽어 가고 도망치는 것에 안심하면서, 그럼에도 다가가 자신을 보는 눈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은 것을 참으려 움찔거리면서 모틸라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커다란 생명체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수에게 한 입 거리밖에 안 되는 인간의 본성일까.
그 소리에 담장 주위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엔 커다란 날개를 펼친 괴수가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오고 있었다.
영지민은 그게 어떤 괴수인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피하려고 했고, 기사 학원에서 배워 그것의 이름을 아는 발터만이 군중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와이번……!”
도적조차 상관하지 않고 담장을 넘어가려 하거나, 공황에 빠져 아무 방향으로나 도망가려 하는 영지민을 보고 정신을 차린 발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는 모틸라 님일 거라는 생각이 뇌를 스쳤다.
발터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급하게 빼며 주위에 매어져 있던 말에 올라탔다.
말에 올라타는 건 와이번의 눈에 띄는 자살행위라고 배웠던 지식 같은 건, 저 멀리 붉은빛에 휩싸여 있는 모틸라를 보면 사그라들었다.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말을 타고 있는 자신에게 와이번의 관심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발터는 말의 배를 차 저 너머 붉은빛을 향해 달렸다.
* * *
발터는 모틸라와 거의 가까워졌을 때, 말을 멈추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방금까지 급하게 달려온 게 조금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말을 급하게 달리느라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면서 발터는 하늘 멀리 숲 저편으로 날아가는 와이번의 뒤를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 사람은 더 강한 것 같았다.
갑자기 방향을 꺾어 날아가는 와이번의 뒷모습이 아무리 봐도 도망가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굳게 다물어져 있던 붉은 입술을 보며 했던 생각도, 지금 와이번이 날아가는 걸 바라보는 모틸라의 살짝 벌려진 붉은 입술을 보니 괜한 생각이었던 것만 같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자신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아 발터는 안도와 부끄러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모틸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짧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다.
“모틸라- 모틸라 님!?”
발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틸라의 이름을 불렀을 때, 모틸라가 갑자기 담장 너머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발터가 반사적으로 말의 배를 차 그 뒤를 쫓아갔다.
말에 바짝 몸을 붙이고 담장을 뛰어넘었지만, 이미 모틸라는 저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발터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모틸라를 따라갔다.
스쳐 지나간 모나한의 표정에 어이없음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발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수풀을 몇 개를 헤치고, 나무 기둥을 몇 개를 지난 걸까.
모틸라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찌나 빠른지 발터는 이미 그녀를 놓쳐 버린 지 오래였다.
흔적 하나조차 남지 않은 숲속을 모틸라가 오로지 직선으로 뛰어갔다는 것을 믿고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마침 앞에서 무언가 커다란 게 떨어지며 나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터가 마지막으로 눈 앞을 가리는 나뭇가지를 검으로 날려 버리고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생긴 공터에 쓰러진 와이번. 그리고 와이번의 목덜미에 머리를 박은 채로 흡혈을 하는 모틸라였다.
모틸라가 말이 수풀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뒤도 생각 안 하고 달려왔던 걸 후회하기도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발터의 모습에 모틸라가 몸을 딱딱히 굳혔다.
달리면서 로브가 뒤로 넘어가 버렸는지, 창백한 얼굴뿐만 아니라 그 아래 피범벅이 된 모습까지 전부 드러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날려 붕 떠 있는 머리카락과 그 아래 흡혈로 인한 흥분이 서려 있는 선홍색 눈동자.
창백한 피부는 흥분으로 살짝 붉어져 있었고, 붉은 입술 주위에는 온통 새빨간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마침 입가를 넘어 턱선을 타고 흐르던 새빨간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모틸라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앞섶이 이미 피로 흠뻑 젖어 공터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남색 눈과 마주친 모틸라가 깜짝 놀라 입가를 훔쳤지만, 진득히 묻어 있던 피는 창백한 볼까지 번져 붉은색을 낙인처럼 남길 뿐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엉망진창인 공간과 피비린내 나는 시체, 그리고 그 가운데 흡혈을 숨기려 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얼마나 역겹고 무섭게 보이는지 모틸라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제 모습을 정리해 보려고 손을 치마에 문질렀지만, 피는 더욱 번져 붉은색만 더할 뿐이었다.
그러나 발터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로브에 가려지지 않은 모틸라가.
흡혈로 인한 흥분으로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다 해도 당황을 가득 담은 선홍색 눈동자가.
피에 젖어 있다 해도 어쩔 줄 몰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는 입술이.
당황해 이리저리 흔드는 손 같은 게.
치마에 번져 가는 손자국 같은 건.
“모틸라 님.”
“바, 발터- 이, 이건.”
발터는 말에서 내려 손수건을 꺼내며 당황해 말을 더듬고 있는 모틸라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앞섶이 피에 다 젖으셨습니다.”
“……응?”
“아무리 배가 고프시다고 해도 조심히 드셔야죠.”
“어, 응. 그, 그렇지.”
모틸라가 당황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발터가 차분히 바라보았다.
“와이번이 그렇게 맛있는 피를 가졌습니까?”
“으응. 음……. 너한텐 피비린내가 좀 심하겠다. 미안……?”
“괜찮습니다. 기사가 피 냄새를 참지 못하면 안 되죠. 혹시 다른 이들이 쫓아올 수 있으니 제가 망을 보고 있겠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불러 주세요.”
“어, 응.”
발터는 아직 당황이 가득한 모틸라의 눈과 마주치고 살짝 웃었다.
그리고 말을 데리고 공터에서 물러나 다른 사람이 오지 않도록 경계했다.
등 뒤에서 모틸라가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마시는 소리와 유리병 같은 곳에 피를 담는 소리가 들렸다.
발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숲을 질주하느라 흥분한 말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작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불안해 쫓아가던 제 모습이.
이곳을 집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다짐을 했으면서도, 달려 나가는 모습이 도망일까 의심하던 생각이.
아직 마음 한구석에 모틸라 님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거라는 불안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가 담장을 넘는 순간 참지 못하고 뒤쫓아 갔다는 걸.
차라리 와이번을 정신없이 흡혈하고 있는 모습에 안도했다는 걸.
로브가 걷히자 마주친 선홍색 눈동자가 전혀 차갑지 않다는 것에 가슴이 떨렸다는 걸.
발터는 아직도 올라간 입꼬리를 매만지다가 우물쭈물하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공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 마시셨습니까?”
“으응……. 너 오기 전부터 마시고 있었으니까.”
“아직 피가 남아 있는 것 같던데.”
“로나랑 모나한 주려고. 음……. 괜찮아?”
“뭐가 말이십니까?”
모틸라는 붉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새빨갛게 젖은 셔츠를 만지작거리고 말을 이었다.
“그냥. 이런 거 본 거.”
“원래 뱀파이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으음……. 그렇지?”
“예.”
“그럼 집에 갈까?”
발터는 모틸라가 자신의 저택을 집이라고 표현한 것에 눈을 크게 떴다가 겨우 내렸던 입꼬리를 다시 올리고 말았다.
그러다 마주친 선홍색 눈동자에 아직 불안이 서려 있는 걸 발견한다.
자신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시선을 발견한다.
그게 저 멀리서 붉은빛을 바라보던 자신과 닮았다는 것도.
붉은 마법 진 위에서 검은 머리카락과 로브를 휘날리던 고아한 사람은 어디 가고, 겁을 잔뜩 먹은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발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모틸라가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잡지 못해 한 발자국 다가온다.
그 얼굴에 당황과 불안이 서린다.
당신도 나만큼 무서울까?
발터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아직 내밀어 있는 떨리는 창백한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당긴다.
분명 그보다 힘도 세고, 강한 사람인데도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온다.
무성한 수풀이 두 사람을 감싸 모틸라의 등 뒤의 무너진 공터도 와이번의 시체도 보이지 않는다.
연두색이 가득한 봄의 숲 한가운데 보이는 건 서로뿐이었다.
발터는 모틸라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 있는 여린 잎 한 장을 보며 웃었다.
온통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연약한 연둣빛이 아주 살짝, 묻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떼어 주려 모틸라의 머리카락을 만졌다가,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손에 머리를 문지르는 것에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모틸라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전염된 듯이 웃는다.
선홍색 눈가가 환하게 휘고, 붉은 입가가 조금은 부끄러운 듯이 올라가고, 발그레한 볼이, 하늘거리는 속눈썹이, 온통 새까맣게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발터는 문뜩, 이 사람이 참 봄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봄의 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겨울에 가까울 정도로 진하고 차가워 보이는 외모를 가진 사람인데.
그러나 무거운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연한 잎처럼.
겨우내 언 나뭇가지를 물들이며 피어오르는 새잎 같은.
온통 강한 모습 뒤에 여리게 피어나는.
발터는 물러났던 한 걸음이 아쉽다는 듯이, 불안하다는 듯이 더 다가오려는 모틸라에게 크게 한 걸음. 먼저 다가간다.
발걸음이 함께였는지, 두 사람이 하염없이 가깝다.
모틸라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터를 올려다본다.
발터가 그 눈동자를 보며 웃다가, 자신이 계속 웃고만 있는 거 같아서 입가를 매만졌다.
모틸라가 그 커다란 손을 잡아 내려 발터의 웃는 입꼬리를 본다.
어색하게 떨리지도 않고, 굳지도 않고.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부드럽기만 했다.
“뭐야. 계속 웃기만 하네.”
“그렇습니까?”
“내가 그렇게 좋아?”
좋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한껏 떨리게 나오고 말아서 모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터가 하얀 이빨에 뭉개져 평소보다 살짝 더 붉어진 모틸라의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틸라는 망설임 없이 나온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 뭐라고 핀잔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조금도 싫지 않았으니까. 또 그런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까.
“나 엄청난 거 사냥했어.”
“깜짝 놀랐습니다.”
“저거 비쌀걸?”
“마을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려 두도록 하겠습니다.”
발터는 무덤덤하게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추는 줄 알고 눈을 꾹 감았던 모틸라의 이마에 발터의 이마가 닿았다.
그냥 닿고 싶어서 다가갔던 발터는 눈을 감는 모틸라의 모습에 낮게 웃었다.
모틸라가 발터의 손이 닿았던 때처럼 이마를 비비적거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턱을 살짝 든다.
좀 더 가까워 보이는 걸 보면, 발끝도 들었을지도 모르겠고.
발터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고개를 조금 틀고, 입을 맞췄다.
조금 피 냄새가 나서 또 낮게 웃다가, 그 웃음에 눈을 뜬 모틸라의 선홍색 눈동자와 마주쳤다가 눈을 휘고.
온갖 여린 잎에 가득한 봄의 숲에서, 여린 색감에 가득 싸여서.
가장 여리지 않은 색으로 가득한 둘이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