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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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영지의 영주는 다행히 가져간 것들의 값을 비싸게 쳐 주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조의금과 자신이 영주가 된 것에 대한 축하금이 들어간 값이었다.

구매하려던 가축 또한 영주 직할 목장에서 싼값에 받기로 했으므로 시골의 가난한 영주로서 할 도리를 다해 준 거였다.

“동정에 대한 값이라도 치러 주셨으니 다행이죠.”

발터는 로나의 걱정 어린 눈빛에 담담하게 말했다. 예상한 것보다 더 치러 주었기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자신의 영지는 겨울 동안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니.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건물에 모여 살고 있었고, 이제야 풀린 땅에 새로운 묘목을 심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옆 마을 영주가 모른 척하고 망하길 기다리다가 남은 땅을 삼키려 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래도 겨울 동안 다들 잘 먹었으니, 다시 일어날 힘은 충분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로나의 걱정 어린 눈과 마주한 발터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말수가 적고 말재주도 없는 자신의 감사함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전해진 것 같기도 했다.

모틸라의 마법으로 가축들은 건강히 인디고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즈음 연두색 물을 먹었던 가지 끝은 봄 잎들이 피어 여린 색감으로 온 숲을 채우고 있었다.

봄은 바쁜 계절이었다.

1년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해야 했다.

새로 묘목을 심어야 했고, 겨우내 대충 만들어 놓은 담장도 손봐야 했으며, 날이 풀렸으니 건물을 지어서 큰 건물에 모여 사는 영지민들이 각자 집을 가질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바쁘게 해치우고 나면 초여름. 오렌지꽃이 화려하게 피고 은인의 결혼식이 있게 될 것이다.

“결혼식이 있으니 오렌지꽃이 피기 전에 웬만한 일을 끝내 놓으려 합니다.”

“아.”

로나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오히려 그런 로나보다 옆에 있는 모틸라가 신나 계획한 것을 떠들었다. 누가 보면 신부가 바뀐 줄 알겠다고 생각한 발터가 조금 웃었다.

봄이 된 영지가 빠르게 바뀌는 동안 모틸라는 온갖 카탈로그를 만들어 로나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어찌나 행동력이 좋은지, 로나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틸라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고, 그 모습은 발터에게 꽤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응접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발터가 옆에 앉아 있던 모나한의 그림 실력에 놀란 적도 있었다.

모나한이 로나의 머리카락을 만질 때나 볼을 쓰다듬을 때마다 그의 손끝이 매우 섬세하다고 생각하던 발터는 모나한이 그리는 정밀화를 보고 매우 감탄했다.

그리고 옆에서 신나서 정밀화로 온갖 머리 모양을 그리는 모틸라의 실력도 그를 감탄하게 했다.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다가와 그림을 보여 주는 모습에……. 발터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과 같이 온다고 했던가. 아니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새로 만든 마을 광장을 둘러보던 발터는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사내가 달려와 한 말에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초겨울에 영지를 약탈하고 왔던 도적들이 다시 몰려왔다고.

이번엔 수가 더 많아졌다고.

다행히 겨우내 고치고 봄 내내 보수한 담장을 넘어오진 않은 상태였지만, 그들이 담을 넘어 다시 마을에 쳐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일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자경단을 훈련시켰다지만 겨울에 할 수 있는 것은 적었고, 젊은 사내들의 수도 적었으므로 도적들을 상대하기엔 부족하기만 했다.

발터는 바로 옆에 있던 말을 타고 저택으로 달렸다.

평화로운 영지이기에 허리에서 검을 떼어 버린 자신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급하게 달려가는 발터는 시야 뒤로 빠르게 흘러가는, 겨우 복구한 영지를 바라보며 모틸라를 떠올렸다.

불안하기 때문인가,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인가.

그가 달려가며 떠올리는 건 요즈음 보았던 어리광과 부드러운 웃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틸라 님.

자신보다 높은 곳에 서서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보던 선홍색 눈동자.

재와 불씨가 가득한 곳에서 휘날리던 로브와 검은 머리카락.

발터는 그때 순간적으로 드디어 자신에게 사신이라도 찾아온 건가 했었다.

죽음이 자신을 거두러 왔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빌어먹을 삶을 끝내러 왔다고.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었고, 질책했고, 어둠 속에서 끌어 내리고, 투덜거려서 마침내 희망이 되었었다.

낡은 눈이었다. 늙은 사람이었지.

고혹적이고 고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려다보는 눈만은 아주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 같았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모습은 그런 이의 여린 모습이었으나. 지금 떠오르는 건 그 낡은 눈이라서.

발터는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틸라 님을 만나고 자신의 손으로 영지를 이끌어 나가면서.

이젠 다 자란 거라고. 어른, 기사, 영주. 그런 단단한 단어들을 자신에게 붙여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달려가는 발걸음에는 조급함이, 문고리를 잡는 손에는 불안만이.

“도적들이 몰려와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담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입니다.”

발터는 모틸라에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떨림이 가득하다는 걸 느꼈다.

“……모틸라 님, 도와주시겠습니까?”

도와 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지독히도 한심했고.

당연하다며 로브를 꺼내는 모틸라와 자신을 도와주겠다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나한의 등을 따라가기만 하는 자신은 지난겨울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재와 불, 먼지 구덩이에 휩싸여 영지민을 구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온통 자살한 아버지에 관한 생각밖에 없었던.

그를 향한 슬픔이나 애도보다 샹들리에 아래 흔들리는 차가운 몸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만 생각하고 있는.

발터는 가라앉으려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채찍질하며, 겁쟁이같이 느려지려는 발을 억지로 빠르게 놀렸다.

아버지의 돌아보지 않는 등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도 모른 채 검을 휘둘렀던 순간들보다, 불타오르던 마을을 언덕 위에서 바라보던 순간보다.

지금 자신의 한심함이 가장 아팠다.

모틸라의 유치해 보이거나 어려 보이는 행동을 볼 때는 모든 험한 것에게서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녀가 두 발로 단단히 서 있으면.

고혹적인 얼굴의 선홍색 눈동자를 싸늘하게 빛내고 있으면.

사실은 자신이 보호받고 있음을, 이 영지를 넘어 자신조차 그녀의 보호 아래 자라고 있음을 깨달아 버리고 만다.

도와 달라는 말밖에 꺼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버린다.

작은 영지라도, 제대로 된 곳이 아니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그녀의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아예 버려 두고 그녀를 따라갈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발터는 조용히 모틸라와 모나한의 뒤를 따라가면서, 겨우 고쳐진 영지를 돌아보면서, 몇 개의 날붙이를 겨우 들고 모인 영지민을 바라보면서.

허리춤에 매단 검의 손잡이를 꾹 쥐고 생각했다.

이곳을 어떻게든 일으키리라고, 모틸라 님에게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아버지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가진 것이어서가 아니라, 모틸라 님을 위해서라도.

뱀파이어로서 짧은 시간이 남았다고 하셨지. 60년 후면 죽음에 이르신다고.

그렇다면 그 남은 60년 동안 이곳을 정말로 집처럼 만들어 드리자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한 번도 하지 못 하게 해 드리겠다고.

발터는 언덕 위에서 내려오는 내내 생각하고, 다짐하고.

마침내 담장에 도착했을 때, 그 너머에 있는 도적들을 보는 발터의 눈은 충분히 단단해져 있었다.

발터는 모틸라와 모나한이 장난치듯이 하는 대화를 들으며 도적들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그때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린 발터의 눈에 이상한 점이 들어왔다.

초겨울에 영지를 습격했던 것보다 도적 수가 많았다.

그들이 쳐들어와 영지를 약탈하는 것을 언덕 위에서 한눈에 보았으므로 틀릴 리가 없었다.

이곳은 한번 눈이 오면 끊이지 않고 계속 오는 지역이었고, 그러니 그 기간엔 영지민도 도적도 수가 줄기 마련이었다.

1년 내내 겨울을 준비한 일반 농민들도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데. 도적의 머릿수가 느는 것은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저거 그 용병 대장 아닙니까?”

“그렇지? 저기 로널드인가 로날드인가 하는 놈도 있다.”

발터가 옆 영지에 가는 길에 만났던 사내를 떠올리며 말하자, 모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 대장 옆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금발의 사내를 가리켰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모나한이 온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로날드라는 자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발터는 용병들이 도적들에 합류해 수가 늘었다는 것에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문질렀다.

옆 영지로 가던 날 용병들을 보며 들었던 의아함이 거짓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도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니.

저 정도 인원수라면 이 마을뿐만 아니라 몇 개의 마을을 털 수 있는 수였다.

저들도 그것을 노리고 합류했는지, 도적들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는 앞으로 있을 살육과 약탈에 대한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우리가 있으니까 딱히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두 분 어느 정도로 강하신 건지……?”

발터가 이마를 문지르던 손을 떼며 묻자 모나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몰살을 원하는지, 그냥 쫓아내길 원하는지 물어볼 정도로?”

“……몰살이 좋겠습니다. 여기서 쫓아내면 다른 마을에 가서 도적질하겠죠.”

“뭐 그렇지. 저런 놈들이 행동하는 건 다 똑같으니까.”

발터는 그 말에 안심하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발터를 향해 모틸라가 자신감 있는 웃음을 짓고는 바닥에 마법 진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법사라는 변명하에 이상한 일을 많이 하는 그녀였으나,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안에 차 있던 영지민의 시선이 모틸라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발터는 그 모습에 멀리 있는 영지민에게도 마법사가 돕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나한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는 등을 돌렸다.

모틸라가 같이 싸운다는 말에 안심한 영지민들의 표정을 발터가 몇 번이나 보았을까.

한 영지민이 내는 감탄사에 발터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저 멀리 모틸라 님이 서 있는 마법진에서 붉은빛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발터는 주위 영지민과 같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로브와 치맛자락, 붉은빛까지 흡수해 버릴 것 같은 검고 긴 머리카락.

신비로워 보이다 못해 위대해 보이는 그 모습에 모두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발터는 이상하게도 모틸라가 푹 눌러쓴 로브 아래가 신경 쓰였다.

보이는 것은 차가운 표정과 붉은 입술, 창백하고 날카로운 턱선뿐이라.

이런 순간임에도 다가가 로브를 걷고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저 로브 아래 있는 것이 차가운 표정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눈동자에 온기가 가득하기를, 조금의 불안이 담겼지만,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부드럽게 웃던 눈이기를.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손이지만, 닿는 순간 망설임 없던 순간들이기를.

조금은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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