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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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는 무슨 말이라도 더 하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가 굳게 닫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모틸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밀어 버린 찻잔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응접실은 차가웠고 차는 빠르게 식었다.

이 방에는 온기 하나 없었다.

모틸라와 안제의 지나가 버린 시간에도, 그들의 사이에도.

안제는 그렇게 굳은 얼굴로 한참을 그녀가 밀어 버린 찻잔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서 모틸라가 따라 준, 이제는 차가워져 버린 차를 한 번에 마셔 버리고는 찻잔을 조용히 놓았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적막을 깨 버리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반대편에 앉아 있던 모틸라를 지나쳐 걸어가 마침내 응접실을 나갔다.

아주 예전 모틸라를 떠났을 때처럼, 그때도 지금도 그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고, 대화도 없었다.

모틸라는 그가 자신을 지나 등 뒤의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저 앞만을 바라보았다.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따라가지도 않았고, 매달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그때와 다르게 앞만 바라보며 꼿꼿이 등을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나랑 안 맞았을 뿐이지.

너의 우선순위와 나의 욕심이 맞지 않았을 뿐이다.

너는 멀리 바라보는 사람이었고, 나는 한없이 좁은 곳을 지키려고 애썼을 뿐이다.

너는 고민한 만큼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행동하는 만큼 후회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안제가 저택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또렷했던 선홍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가라앉고, 떨어지고, 아무런 초점도 없이 일그러졌다.

안제에게 울며 애원하고, 그가 떠나고, 그리고 자신도 그를 떠났던 날.

텅 비어 버린 집이 견딜 수 없어져 아무것도 들지 않고 나왔던 날.

눈물을 미친 듯이 흘리고 갈 곳이 없으면서도 걷기만 했던 그날.

그때부터였다.

불현듯이 머리에 그런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내 피를 나눠 준다면, 내 시간을 나눠 준다면.

나처럼 아무런 쓸모도 없이 낭비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게 쓰이지 않을까.

나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미래는 상상할 수도 없고, 눈을 뜨면 끔찍하기만 하고, 과거만 계속 돌아보며 미련에 끌려다니고만 있는데.

하루하루 멍하니 술과 보석, 음식과 저열한 농담 사이에서 누워 있기만 하는데.

저렇게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을, 저렇게 커다란 걸 생각하는 사람을.

그런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주면.

그때의 모틸라는 그게 정말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헛되이 보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그들에게 줘 버리자고.

그리고 안제 다음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그다음? 결혼하지 않은 그사이의 사람?

모나한이 화내면서 소리쳤지. 얼굴을 온통 빨갛게 붉히면서, 눈가도 새빨갛고, 귀 끝도 새빨갛고.

눈물이 맺혔던가, 말았던가.

“자살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그랬지.”

그 말이 맞아, 모나한. 너의 말이 맞아.

그냥 아주 긴 자살이었을 뿐이지.

모틸라는 인제 와서야 그것을 인정하는 자신에게 비웃음을 지었다가, 무기력하게 그만두었다.

그렇게 자살하듯이 수명을 나눠 줘 놓고, 또 그들에게 사랑해 달라 매달렸던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어서.

인제 와서 자살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때는 인정하지 못하고 날 위해 달라 소리쳤던 자신이 모순으로 가득해서.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 주면 조금이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런 사람들이 그 시간들을 온전히 자신에게 쏟아 주면 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 애에게서 도망가 버린 날부터 안제에게서 떠났던 날들도, 한없이 떠돌아다니던 날들과 주름이 생겼던 날 모나한에게 소리쳤던 것까지.

모순이 아닌 게 하나도 없고, 한심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하지 말자고 수없이 소리쳐 놓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시간을 그렇게 살았다.

그녀는 차가운 응접실 안에서, 차갑게 식은 차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에게 비웃음도 짓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안제의 발걸음이 마침내 모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들었다.

어릴 적 어느 시절에는 따라가 화도 내 보고, 애원도 해 봤고, 죽을 것같이 울어도 보고, 결국엔 닫힌 문 안에서 멍하니 서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너무 지쳤다.

그런 갈등에도 감정에도, 그런 관계와 사랑에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지쳐 버린 지 아주 오래였다.

그녀는 그대로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일어나지를 못했다.

배웅해야 한다든가,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머리 한구석에서 속삭였지만,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많이 보았고,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 인사는 너무나도 많이 했고, 한 번도 슬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겹다는 말은 이런 순간을 외면하기에 딱 알맞은 말이었다.

그래서 모틸라는 중얼거렸다.

“……지겨워.”

지독하게도 지친 목소리였다.

모틸라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질릴 지경이라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다가 그만두어 버렸다.

몇 번을 그만둔지도 모르겠다는 게, 한심한 자신에게 딱 맞았다.

이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전부 다 끝났는데.

이제 드디어 죽음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는 주문이라도 되는 듯이 지쳐 버린 목소리로 아득히 중얼거렸다.

“지겨워.”

죽음이여, 어서 오라.

아니라고 소리치고 비명 질러도 결국엔 그렇게 원했던 죽음아.

빨리 와서 나를 좀 데려가다오.

“아주, 정말로, 끔찍이도- 지겨워.”

이 시간이 지겨운지, 자신의 기나긴 삶이 지겨운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지겨운 건지.

그녀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게 지겨운 걸지도 몰랐다.

지겹다는 말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싫은 걸지도 몰랐다.

모틸라는 끔찍한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시야를 덮었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무대 위의 커튼이라도 되는 듯이 흘러내린 길고 긴 머리카락.

그 안을 채우는 어둠.

아아, 드디어 공연이 끝났나 봐.

나는 어떠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고, 이야기는 희망보단 절망을, 기쁨보단 슬픔을 많이 담았나 봐.

그래서 나는 그렇게 구르고, 기어 다니고, 애원하고, 비명 지르고.

무대 위에서 미친 듯이 연기하다가, 연기하다가.

드디어 막이 끝나면 새까만 커튼을 보고 멍하니 서 있고.

끝난 것에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그러나 지독히도 안심하면서.

드디어 무대 아래로 끌려갈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모틸라는 제 손에 얼굴을 파묻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 채 고개 숙인 그대로 굳어만 있었다.

그리고 새까만 커튼 뒤 공연장 어딘가, 관객석 어딘가, 아니면 저 아래 저택 어딘가에서 남색이 소리쳤다.

“어렸을 때부터 끈질기다고, 독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럼 그것만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끝까지- 모틸라 님 옆에 있을 겁니다.”

모틸라는 그 말에 축 처져 있던 몸을 딱딱히 굳혔다. 자신이 움직였는지, 아니면 그냥 멈춰 버렸는지, 멍한 눈으로 보고 있던 찻잔에 파동이 한번, 강하게 넘실거렸다.

모틸라는 발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언제나 무겁고 진중하던 발걸음이 뭐 그리 급하다고 빠르기 그지없다.

그는 자신이 있는 응접실의 문밖에 섰다.

발터가 망설이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었고, 이내 손을 문고리에 올린다.

모틸라는 어느새 자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황해 온 방 안을 둘러본다.

어디에도 거울이 없다.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어떤 얼굴일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보이고 있는지, 숨기지도 못하고- 전부 보여 줘 버리고 있는지도.

그러나 그녀는 차마 숨지 못했다.

미치도록 저 자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미치도록 그가 보고 싶어서.

모틸라는 본다.

발터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진중한 얼굴이 조금 더 굳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얼굴과는 다르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나 씨가 디저트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맛있었어요.”

그러나 내미는 손은 느리고, 손끝은 단단하고, 표정은, 표정은-.

“같이, 드시러 가시겠습니까.”

아아, 나의 인디고, 나의 남색아.

노을이 막 끝난 하늘의 빛.

온 인생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부드러웠던 색감.

모틸라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걸었다가, 멈춰 서고.

어쩔 줄 몰라 망설이다가 다시 한 발짝 걷고.

그리고 결국은 걷고, 걷고, 걸어서.

남색의 끝자락을 거머쥐었다.

발터가 모틸라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차갑고 황망하고, 아무것도 없었던 방에서 끌어내어 방을 나선다.

먼저 걸어가는 뒷모습에 보이는 건 흔들리는 남색 머리카락.

단단한 등, 자신을 꼭 잡은 손, 망설임 없는 발걸음.

모틸라는 어느새 제 머리카락이 전부 뒤로 물러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까만 커튼이 물러나고 깨끗한 시야에 담기는 것은 오로지 남색뿐이었다.

주인공은 무대에서 끌어내려지지 않았다.

그냥 다시 올라간 커튼 밖, 무대 밖으로 나갔을 뿐이다.

모틸라는 자신과 발터의 발소리가 마치 박수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커튼콜이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끌려 나가지 않고, 올라간 커튼 밖에서 온전히 인사하며.

정해진 막에서 벗어나는.

울지도 않고, 기어 다니지도, 애원하지도, 비명 지르지도 않고.

한껏 웃는 얼굴로 치마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기울이고- 인사하고.

그러니까 마침내, 커튼콜이었다.

이제는 오로지 그녀를 위한 시간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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