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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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틸라는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겨울을 꽤 좋아했다.

주름이 생기기 전에 가장 많이 뒤집어쓰는 신분은 귀족이었고, 귀족은 겨울에 온갖 파티를 열곤 했다.

다른 계절에도 열고는 했지만, 겨울엔 수확기에 걷은 세금으로 열어 더 화려하곤 했다.

신선한 재료가 떨어져서 음식의 질은 좀 떨어졌지만, 음식 대신 디저트의 질이 올라가곤 했다.

그리고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모틸라는 온갖 디저트를 먹을 수 있는 겨울 파티가 정말 좋았다.

지금은 화려한 파티장도 아니고, 온갖 보석과 레이스로 치장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달콤한 것들을 먹고 있는 것도 괜찮았다.

특히 파티장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는 로나의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최고였고.

모틸라는 흡족함에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숨길 생각 없이 흥얼거리며 박자에 맞춰 의자를 흔들었다.

간식을 만들어 달라는 자신의 말에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마들렌을 구워 주겠다는 로나의 말에 의자가 흔들리는 박자가 좀 더 빨라졌다.

그녀의 신난 기분을 보여 주는 듯했다.

쾅! 쾅! 쾅!

“계십니까?”

그리고 로나가 응접실을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저택 정문을 두드렸고 생각지 못한 방문객에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틸라는 그대로 응접실에서 기다리려다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피 냄새에 흔들던 의자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된 얼굴로 움직이는 그녀에게 모나한이 ‘당신을 보러 온 게 아니냐’고 물었고, 모틸라는 제 눈가의 주름을 한 번 손끝으로 만지면서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틸라는 정문에서 아주 익숙한 이를 만날 수 있었다.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한 색을 좋아하는 사람.

입은 옷은 두툼한 황토색.

언제나 당당하게 서서 앞을 바라보는 사람.

허리를 쭉 펴고 후드 사이에는 올곧은 시선이.

모틸라가 그 올곧은 시선에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빛바랜 금발은 언제나 그랬듯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그가 언제나 바랐던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모틸라는 아주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자신이 가장 처음 피를 나눠 주었던 사람, 그때 했던 게 사랑인지 존경인지 아직도 구별할 수 없었던 감정.

그래서 후회와 그리움이 남은 이름.

“……안제.”

자신의 부름에 조심스레 웃는 얼굴 뒤로 거센 바람과 함께 눈이 휘몰아쳤다.

* * *

모틸라는 안제를 응접실의 의자에 앉히고 벽난로에 불을 피우려다가 말았다.

둘 다 인간은 아니고 추위도 타지 않으니 필요 없겠다 싶어 그냥 따뜻한 차 한잔이나 만들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차를 만들려다가 안제의 취향을 떠올리고는 고소한 맛이 나는 차를 따라 그의 앞에 내려 주었다.

안제가 그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모틸라는 그 웃음을 보다가 조용히 안제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원래는 시원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 웃음이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남색의 그 애와 닮았었다.

그래서 눈여겨봤었고, 그러다가 머물게 되었었다.

“오랜만이야, 모틸라.”

“……그러네. 오랜만이야, 안제.”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볼 때마다 저렇게 조심스러운 웃음을 짓곤 했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제 감정을 건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웃음.

“소식을 들어서……. 찾아왔어.”

“금방 찾았네?”

“그러게.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모틸라는 입술 안쪽을 조금 깨물었다가 자신의 말이 너무 날카롭게 나가지 않았는지 점검했다.

안제와 이야기하면 비꼬는 듯이 말이 나가게 된 지 오래되어서, 언제나 조심해야 했다.

“주름이……. 주름이 생겼다고 들었어.”

“응. 여기.”

모틸라는 눈가를 가리던 검은 옆머리를 넘겨 주름을 보여 주며 답했다.

모나한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아니, 어쩌면 발터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주름을 보여 주는 것을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주름을 보여 주는 행위에 어떠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모틸라는 문득 자신이 늙어 간다는 것을, 이제 살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이네.”

“응. 생겨 버렸지.”

“……모틸라.”

“왜?”

“내 집에 오지 않을래?”

모틸라는 제 눈가의 주름을 손끝으로 쓰다듬다가 안제의 말에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제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가 떠나고 나서 많이 후회했어.”

“그래?”

“……널 우선시 해 주지 못했지. 나는……. 그때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했어.”

“그랬지.”

“우리에게는 아주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 그래서……. 그래서 조금 널 뒤로 두었지.”

모틸라는 안제의 말을 들으면서도 생각보다도 더 자신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며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옛날에는 그가 저렇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기쁨이나 만족감, 하다못해 작은 카타르시스라도 느껴질 줄 알았는데, 지금 자신에게 느껴지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이 어서 지나가서 로나의 마들렌이나 먹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매우 지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틸라는 안제의 사과를 들으면서 그의 찻잔을 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저 손이 엉망진창이던 시절이 있었다.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지고, 상처 가득히 피를 흘리던 시절이.

그러면서도 잡고 있던 검을, 깃발을, 횃불을 놓지 않던 시절이.

고향에서 도망쳐 이리저리 떠돌다가 모나한과 다른 뱀파이어들을 만나고, 그들 사이에서 한창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던 시절을 지나 각자 흩어져 인간 사이로 숨어들었을 때.

화려한 드레스와 화려한 구두를 신고 파티장에서 온갖 디저트들을 먹고 있었을 때.

그 사이에서 빛바랜 금발을 한 안제를 발견했었지. 산해진미와 보석들로 가득한 공간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 사내를 더러운 뒷골목에서 보았을 때.

파티장에 있던 것과 다르게 환한 얼굴을 하고 뒷골목의 사람들과 웃고 있었을 때.

그리고 그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세상을 바꿀 계획을 읊조렸을 때.

시끄러운 길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고, 온갖 마차들과 수레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호객 행위를 하는 목소리가 섞여 시끄럽기 그지없는 길.

아름다운 드레스와 어깨를 덮는 짧은 망토, 예쁜 모자와 레이스가 가득한 양산을 들고, 화려한 장신구들에 웃으며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 양산 그림자 아래에서 그를 보았다.

더러운 골목에서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말도 안 되는 계획을 하려는 이를.

수많은 사람이 시야 밖에서 흘러가는데, 그 길 한가운데의 나와, 골목 그림자 아래에서 그만이 가만히 멈춰 있는 듯했다.

그다음부터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지.

그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고, 그를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산해진미와 보석들은 전부 엄청난 세금과 부당한 뒷거래,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쌓아 올렸던 시대였으니까.

그리고 안제는 그걸 부숴 버리려는 사람이었으니까.

전쟁통에 얼기설기 기운 치마를 입고 덜덜 떨었던 나날들과 피난길에 결국은 돌아가신 부모님과 그 후 보호자 없는 자신을 팔아 버리려던 사람들에게서 도망 다니던 나날.

몸만은 팔지 말자고 중얼거렸던 어린 시절과 결국엔 어느 날 노예로 팔렸던 시절.

차라리 몸을 파는 게 나았겠다고 중얼거리던 실험실.

피와 내장으로 더럽혀졌던 손과 입. 그럼에도 다음 희생자를 찾아 옮겨야 했던 발걸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로, 바닥에 기어 다니던 나날을 보상받고자 보석과 비단, 레이스와 향수, 온갖 음식들 사이에 섞여 웃던 나날들.

그런 자신에게 그런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안제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은 허무맹랑한 말이지. 다만……. 네가 마지막을 평온하게 지내도록 돕고 싶어.”

사랑을 했었다. 존경과 동경이 함께였지만, 사랑도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 더 많아졌을 때는, 욕심이 같이 생겼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 줘.

힘든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나와 함께 걸어 줘.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부당한 일을 해결하기보다는 나와 같이 웃어 줘.

“그때 네가 날 뱀파이어로 만들면서 나에게도 시간이 많아졌잖아.”

그래. 널 뱀파이어로 만들면 나랑 같이 있을 시간이 생길 줄 알았어.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의 시간은 무한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하지만 넌 나를 두고 가 버렸지. 나의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나를 뒤로하고 가 버렸어.

“……후회하고 있어. 모틸라, 남은 시간만이라도 같이 보내지 않을래?”

“거절 받을 거 알고 물어봤지?”

모틸라는 안제의 물음에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나 남자 너만 있었던 거 아니야. 널 떠난 후에 몇 명 더 있었다고.”

“……알아.”

“웃긴 건 다 너랑 비슷하더라.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가 버렸지.”

“…….”

“그때 말야, 널 떠나면서 그래도 너는 내 시간을 의미 있게 쓸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후에 만난 사람들도 전부.”

“모틸라.”

“내가 가지고 있으면 그냥 낭비해 버릴 시간들이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가면 잘 쓰이겠다고 생각했지.”

모틸라는 고소한 차가 담긴 찻잔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네가 날 떠나갈 때 말이야.”

지금 가 버리면 다시는 받아 주지 않을 거야. 돌아오면 나는 없을 거야. 나도 가 버릴 거야.

나를 제일 소중히 여겨 줘. 그럴 수 없다면 너에게 날 주지 않을 거야.

나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해 줘. 그럴 수 없다면 내 시간도 가질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넌 떠나갔고, 나도 널 떠났지.”

“…….”

“우린 그때 끝난 거야.”

만약 내가 준 시간을 빚이라 생각한다면, 네가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그러니까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들 있잖아.

더 이롭게 만들고, 더 살기 좋게 만들고. 그런 것들.

“그런 걸 계속해. 그게 네가 내 시간을 가진 이유니까.”

모틸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직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멀리 밀어 버렸다.

안제가 좋아하는 고소한 차를 같이 마셔 주는 일 같은 건, 그를 떠날 때 이미 그만둬 버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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