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 (129/154)

129

모틸라는 이제 발터가 해 주는 일에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이후가 어찌 되었든, 이 관계가 어떻게 되든 발터를 자신의 인생에서 잊어버리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얼마 안 남은 삶이었고, 이제 잊어버리려고 어딘가 어두운 곳에 숨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모틸라는 그냥 죽는 순간까지 잊어버리지 못할 인연이 또 하나 생겼다는 것을 인정했다.

발터도 그 점을 눈치챘는지, 겨우살이 다발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고, 모틸라는 자신의 방에 한가득 겨우살이만 가득한 것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생명력이 강한 식물의 대표라서 그런지 방 안에 가득한 겨우살이들은 새로 들어오는 것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싱싱하기만 했다.

그날도 일과가 끝나고 저택에 들어왔을 때, 발터가 등 뒤에 숨겨 놓았던 겨우살이 다발을 꺼냈다.

포장도 없고, 리본도 없지만 그래서 손으로 하나하나 만든 게 분명한.

겨우살이라면 분명히 저 높은 가지 위에 자랐을 텐데, 그걸 꺾고, 하나하나 모양을 만들고, 손수 끈을 묶었을 게 분명한.

이미 들켰음에도 등 뒤에 숨겨서 언덕을 오르고 따뜻한 곳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에게 내미는.

예쁜 꽃도 없고, 향기도 없는 겨우살이 다발.

모틸라는 그 겨우살이 다발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고, 여리기보다는 단단해 보이는 잎이었음에도 부드러운 손길로 잎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겨우살이만 가져다주는 거야?”

“……겨울이라 꽃이 없어서요. 온실에 키웠던 꽃은 모두 죽은 지 오래라서.”

“거긴 로나가 키우는 허브들만 가득하더라. 요즘 들어가면 코가 매캐할 정도야.”

“허브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모틸라 님도 허브를 좋아하시면-”

“난 별로 안 좋아해!”

“……뭘 좋아하십니까?”

“먹을 것?”

“……로나 님에게 가서 제빵이라도 배워 보겠습니다.”

“너 지옥에서 올라온 손재주를 가지고 있잖아. 검은 섬세하게 잘 휘두르지만, 계란은 못 깨잖아.”

발터는 모틸라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계란 껍질이 안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고 말하기에는 한동안 요리를 안 해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기에도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계란 프라이에 계란 껍질이 들어 있기도 했고……. 발터는 스스로를 잘 알았기에 모틸라의 말에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모틸라는 그런 발터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는 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됐어. 너도나도 못하는 건데. 그냥 로나 옆에 꼭 붙어 있을래.”

“……다른 걸로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포기가 빠르구나?”

“요리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서요.”

“그렇긴 하지.”

모틸라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발터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제 손을 한번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 이제 도망은 그만두신 겁니까?”

“으응? 봄이 되면 떠날 건데?”

발터는 모틸라의 말에 ‘자신을 떠나는 것을 이젠 도망이라고 생각하시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럼 피하는 것을 그만두시는 겁니까? 전 모틸라 님께 여러 가지 해 드리고 싶은데, 해도 괜찮을까요?”

“……어떤 거?”

“간식을 양보해 드린다든가.”

“좋아!”

발터는 반사적으로 좋다고 소리치는 모틸라의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나 씨가 ‘우리 종족은 식욕의 노예들이니 먹을 걸로 꼬셔요’라고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가, 자신의 저주받은 요리 솜씨에 조용히 그 방법을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해 드릴 수 있는 것을 입에 담았다.

“……겨우살이가 싫으시다면 다른 것들로 꽃다발을 만들어 드린다든가.”

“겨우살이도 좋지만 다른 것들도 받을게.”

모틸라는 그런 발터의 생각도 모른 체 발터가 선물한 겨우살이 다발을 얼굴 옆에서 살랑살랑 흔들면서 대답했다.

연두색 겨우살이 잎과 하얀 열매가 같이 흔들리고, 그 위에서 모틸라가 기쁘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얼굴을 하는 것도 모르는지, 반짝거리는 감정이 온통 드러난 채였다.

발터는 그 웃음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참 전부터 원하던 것을 툭 내뱉었다.

“손을 잡는다든가.”

“……좋아.”

발터는 자신이 말해 버린 것에 한 번, 싫다는 말이 나올 거라 수없이 상상한 부탁에 좋다는 말이 나온 것에 두 번 놀라서 그대로 굳은 채 모틸라를 바라보았다.

모틸라가 그런 발터의 시선을 피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볼을 붉혔다.

“손, 손 정도야. 내 손이 좀 잡고 싶을 만큼 예쁘긴 하지!”

“예.”

“……네가 날 많이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허락해 줄게!”

“예.”

“……예밖에 모르니?”

“예.”

발터는 기회를 놓칠까 봐 단호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까의 살짝 시무룩해져 보였던 눈꼬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틸라는 ‘뭐 이런 애가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발터를 바라보다가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살짝 흔들었다. 겨우살이 다발을 들고 있는 반대쪽 손도 똑같은 방향으로 흔들린 걸 보면, 모틸라도 긴장을 하는 모양이었다.

발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틸라의 손을 잡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여자의 손을 잡았다는 것치고는 너무 강한 힘이라 모틸라는 조금 웃었다.

창백하고 하얀 데다가 차가운 손을 잡은 손은 햇볕에 탄 어두운색에다가 뜨겁기까지 했다.

더 웃긴 건 서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손을 잡았다기에는 악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모틸라는 그 모양새를 보고 한 번 더 피식 웃고는 발터를 놀리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했다. 긴장한 발터가 그대로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여자랑 손 처음 잡아 봐? 엄청 긴장했네.”

“예.”

“……진짜로 처음이야?”

“예.”

나 지금 어린애랑 손잡은 거니?

모틸라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한 소리 들을 것 같기도 하고. 쇠고랑 철컹철컹하고, 모나한이 감옥 밖에서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양심이 콕콕 찔리는 듯한 느낌에 모틸라가 은근슬쩍 손을 빼려 하자, 발터가 그대로 주욱 따라오며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모습에 모틸라는 다시 한번 악수하는 듯이 손을 흔들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힘을 빼 버렸다.

그래. 어린애는 아니잖아. 성인이지, 성인.

“너무 세게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됐어. 나는 튼튼해서 안 아파. 인간도 아니잖아.”

“…….”

“오히려 잡은 느낌 딱 나서 좋아.”

“알겠습니다.”

모틸라는 다시 손에 힘을 주는 발터를 보고 웃었다.

손등 위에 핏줄이 톡 솟아오르는 게 얼마나 힘을 많이 주고 있는 건지 자신이 악력기라도 된 기분이었다.

힘이 세기도 하지. 내가 뱀파이어가 아니면 어쩔 뻔했어.

모틸라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잡은 채로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나와 모나한이 있는 응접실은 저택 문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손을 잡을 시간이 길 것 같았다.

손을 악수하듯이 잡은 그대로라 걸어가는 내내 모양새가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발터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모틸라는 그대로 이상한 모양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발터는 모틸라의 이상한 팔 모양과 그럼에도 놓지 않는 손과 즐거움에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발걸음을 보았다.

왠지 뭐든지 말하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발터는 혀끝에서 모틸라의 발걸음만큼 살랑거리던 말을 꺼냈다.

“그럼 저희 사귀는 겁니까?”

“뭐?”

모틸라가 이상한 모습으로 걸어가다가 발터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손잡으면 사귀는 거니?”

“예.”

“……어이가 없어서.”

당당한 얼굴로 긍정하는 발터의 말에 모틸라가 혼이 나간 얼굴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어린애, 어린애 했더니. 방금 정말로 어린애랑 연애하는 기분이었어.

“아니, 정말로 손잡으면 사귀는 거로 생각하는 거야?”

“기사는 함부로 여인의 손을 잡지 않습니다.”

“뭐라니.”

“모틸라 님은 관계를 정확하게 해 놔야 도망을 안 가실 듯해서요.”

“너 지금 엄청 뻔뻔한 얼굴이다! 모나한 닮았어!”

“모나한 님께 배웠습니다. 밀어붙이라고 하시더군요.”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모틸라는 그새 모나한에게 가서 물어본 발터가 어이없고, 이때다 싶어 자신의 공략법을 말해 준 모나한이 괘씸한 데다가, 자신이 정말 밀어붙이는 타입에 약해서 더 큰 소리로 어이없다고 말했다.

“저랑 사귀어 주시겠습니까?”

“너 로맨스는 어디다 버려 놨어?”

“전 그것에 재능이 없는 편입니다.”

“재능 없다고 포기하게?”

“다만 밀어붙이는 것에는 재능이 있습니다. 인내심과 끈기에도요.”

“인내심과 끈기로 우직하게 밀어붙이려고?”

“예.”

모틸라는 또다시 ‘뭐 이런 애가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발터를 바라보았지만, 발터는 특유의 덤덤한 표정으로 모틸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여전히 악수하듯 이상하게 잡은 손과 함께.

모틸라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두근거리지도 않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으며, 투덜거리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 올라왔다.

그래서 그녀는 투덜거림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게 다 내가 잘나서 받아 주는 거야! 알았어?”

“예. 모틸라 님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심성도 고우십니다.”

“……맞아! 내가 좀 잘났어!”

“예.”

“흐흥, 너 다음에 이런 식으로 고백하면 뺨 맞는다? 나니까 받아 주는 거지.”

“모틸라 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고백할 생각은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모틸라 님만 받아 주신다면.”

“뭐어어- 그래? 흠, 하긴. 나같이 완벽한 사람이랑 연애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눈에도 안 들어오겠다.”

“예. 그렇습니다. ……로맨스에 재능은 없지만 모나한 님께 좀 배워 보도록-”

“아니, 그건 그만둬.”

“……예.”

“모나한 따라 하면 손 놓아 버릴 거야.”

“절대 따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모틸라는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올려 발터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발터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모틸라가 머리를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덕분에 모틸라 님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콧바람이 가득 담긴 웃음이 들린 걸 보니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다.

발터는 고개를 숙인 채로, 모틸라에게 한껏 쓰다듬을 받으며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