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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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틸라는 자신의 옆에서 묵직한 발걸음으로 걷는 발터를 힐끗 바라보았다.

모나한에게 잡혀 이 영지로 다시 끌려온 지도 한참.

발터가 자신의 도망간 게 아니라는 변명에 넘어가 준 지도 한참.

로나 덕분에 인디고 영지는 활기가 넘쳤고, 복구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영지민들에게 명령하거나 일을 확인하고,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을 마법이라는 변명으로 처리하는 것은 이제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은 발터랑 일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돼서 아주 편했고.

일과가 모두 끝나고 어둠이 찾아온 저녁에도, 로나와 모나한이 있는 부엌 옆 작은 응접실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발터랑 단둘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발터도 자신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건지, 그는 가끔 이렇게 겨우살이 다발을 건네줄 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도망만 가지 마십시오.”

……다발을 건네줄 때마다 꼭 한마디씩 덧붙이고는 했지만.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모틸라는 발터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별거 아닌 평범한 날이었고, 오늘도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로나가 모나한이랑 놀 거라면서 방에 올라가 버리기 전까지는.

뭐랬더라. 연애하는 데 방해된다고 했던가.

……매정한 로나.

단호한 표정의 로나 뒤에서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비웃는 표정을 하던 모나한이 떠올랐다.

……재수 없는 모나한!

모틸라는 로나와 모나한이 닫고 나간 응접실 문만 빤히 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옆에서 조용히 서류를 처리하는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랑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은지 막힘없이 서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모틸라는 자기 혼자만 불편해하는 거냐고 투덜거리다가 마시던 코코아가 다 떨어진 것에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발터가 쓱 밀어 준 코코아 담긴 그의 컵이 아니었다면.

“뭐야?”

“전 너무 달아서 다른 걸 마시고 싶습니다. 이것 드십시오.”

“……그냥 내가 가지러 가도 되는데.”

“의자에서 일어나기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모틸라는 그의 말에 입술을 몇 번 삐죽이고는 손만 슬쩍 뻗어 발터의 코코아를 가져갔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지 코코아는 거의 처음 따랐던 그대로였다.

모틸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코코아를 목 뒤로 넘기며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차를 가지러 가는 것을 힐끗 바라보았다.

발터가 가져온 진한 커피 향기가 응접실을 가득 채우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시간에 커피 마시면 잠 안 오지 않아?”

“처리할 서류가 많아서요. ……어차피 못 자기도 하고요.”

“지금도 못 자? 방을 좀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고 싶진 않아서요. 예전보다는 많이 잡니다.”

“……그래.”

모틸라는 뭐라고 한 소리 더 하려다가 그만두고 발터가 넘기는 서류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당으로 내려가서 벽에 붙여 놓았던 결혼 계획서를 가지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모틸라는 발터 옆의 의자에 앉자 펜을 돌리면서 더 추가할 계획이 없는지 고민했다.

“로나가 노란색을 좋아하니까 말이야, 노란색 꽃을 좀 구해 볼까 고민 중이야.”

“오렌지꽃은 하얀색이니 노란색 꽃으로 포인트를 줘도 좋겠네요.”

“맞아. 어떤 꽃이 좋을까나…….”

온실을 이용하면 다른 계절 꽃도 피워 낼 수 있을 테고…….

발터는 모틸라가 작게 중얼거리며 종이에 노란색 꽃들의 이름을 적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결혼 계획서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로나 님과 모나한 님이 결혼하는 것도 마음에 드는 일이었고, 자신의 마을에서 이런 기쁜 행사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드는 일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결혼식이 늦은 봄에 있을 거란 거였다.

늦은 봄이면 떠나시기로 한 봄보다는 훨씬 지난 시기일 테니까.

모틸라 님이 조금 더 오래 여기 머물 테니까.

“결혼식 여는 게 그렇게 좋아?”

모틸라가 발터의 흐뭇해하는 입꼬리를 보고는 물었다.

발터는 그 물음에 조금도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으며 답했다.

“모틸라 님이 좀 더 오래 여기 머무실 것 같아서요.”

“……결혼식 이후에는 가 버릴 건데.”

“그러시겠죠.”

“안 잡을 거야?”

모틸라는 조금 투덜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터는 그런 모틸라의 뾰로통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조그맣게 웃었다.

“쫓아갈 생각입니다.”

“……영지는 어떡하고?”

“글쎄요. 관리인이라도 정해 놓고 가면 되겠죠.”

“그러다가 영지 말아먹은 귀족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저도 몇 명 알고 있습니다.”

“그것 봐!”

“그래도 따라가고 싶으니까요.”

모틸라는 그 말에 입을 꾸욱 다물고 그게 할 말이냐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살짝 일어난 기쁨에 더더욱 눈초리를 찌푸리며 말했다.

“나 도망가면 못 찾을걸? 도망 엄청나게 잘하거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차피 못 찾을 거면 여기서 영지나 잘 가꾸는 게 어때? 혹시 알아? 내가 한 번쯤은 더 들를지.”

“글쎄요. 제가 당신을 찾으러 돌아다니면요.”

발터는 수십 번 상상해 봤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당신을 찾지 못하더라도, 모틸라 님은 꼭 한 번쯤은 보러 오실 것 같습니다.”

“뭐?”

“몇 번은 멀리서 보고만 가시다가, 한 번쯤은 얼굴도 보여 주실 거고, 또 그러다가 옆에서 같이 여행도 하실 것 같아서요.”

“안 그럴 거거든?”

“그럼 그 모든 게 제 상상이겠죠.”

“……뭐라는 거야?”

절대 안 그럴 거야.

모틸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터를 노려보던 눈은 저 멀리 치워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고개는 다른 쪽으로 돌아가고, 입술은 삐죽거리면서도 목소리만은 단호했다.

그러면 마치 진실이 될 거라는 듯이.

발터는 모틸라의 그 표정을 모두 보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저를 보러 오실 걸 상상하며 평생을 떠돌아다닐 생각입니다.”

“그런 걸 미련하고 바보 같다고 하는 거야.”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뭐?! 누구한테!”

모틸라는 발터의 말에 다른 곳을 보던 것도 그만두고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눈에 분노가 가득한 게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발터는 그 표정에 조금 올라갔던 입꼬리를 더욱 올리고, 눈 끝을 부드럽게 내리며 웃었다.

“기사 교육원의 동기들에게요. 그리고…… 아버지?”

“왜 그런 말을 해서 애의 기를 죽이고 그런대! 너 하나도 안 미련해! 오히려 직진만 하고 있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그러십니까?”

“그래! 휘말릴 것 같아서 얼마나 정신없는 줄 알아!?”

발터는 모틸라의 그 말에 ‘더 휘말려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말을 해 버리면 모틸라 님이 싫다고 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그는 그냥 모틸라를 보며 웃었다.

“너 웃으면 눈꼬리가 완전히 내려가는구나?”

“그렇습니까?”

“응. 무슨 강아지처럼 웃는다. 시골에 있는 강아지 같아. 눈꼬리가 추욱 내려가서 순해 보여.”

그리고 어딘가 조금 어설퍼 보이고.

웃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모틸라는 그 순해 보이는 눈꼬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 언저리를 보며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한 번은 보러 가 줄게.”

“제가 떠돌아다닐 때 말씀이십니까?”

“그래! ……한 번 즈음은 그래도 되겠지.”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내가 무슨 주정뱅이니? 한 잔이 석 잔이 되고, 석 잔이 한 병이 되게!”

모틸라의 그 말에 발터가 웃었다.

그녀가 말했던 딱 그대로.

입꼬리는 아주 조금 올리고, 눈꼬리는 축 내려가서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과는 다르게.

어설프고, 어색하게.

모틸라는 웃음 끝자락을 바라보며 저 얼굴은 그 애와 전혀 다른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는 웃음이 어색한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시원하게, 턱 끝을 올리고 온 눈을 접으며 웃는 사람이었지.

남색 머리카락이 온통 떨리도록 크게 웃는 사람이었고.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색은, 입꼬리는 웃는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조금.

눈꼬리는 우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추욱.

짧은 남색 머리카락은 조금도 떨리지도 않았고, 웃음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모틸라는 처음으로 그 애와 발터를 겹쳐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애가 해가 뜨기 전 새벽의 남색이었다면 말이야, 너는…….

해가 진 후에, 아직 남은 빛이 물든, 새까만 밤이 오기 전의 남색일지도 모르겠다.

햇빛 조금, 달빛 살짝. 별들은 아롱지기보다는 흐릿하기만 한.

아주 잠깐, 찰나. 어스름한 시간대의 남색.

나는 언제나 그런 색에 사랑에 빠지곤 했지.

언제나 그랬어.

너흰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와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헷갈리게만 하고, 사랑한다고 온통 말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내가 물러나면 그냥 바라보기만 해서.

다가갈까 고민하며 눈을 마주치면, 그 눈빛은 언제나 똑바르기만 했지.

그렇게 조용히,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모틸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발터의 눈을 피했다가 보고, 또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그에게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저 남색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새벽의 처음에 있는 남색도, 저녁의 끝에 있는 남색도.

그러다가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류나 마저 보라며 그에게 손짓했다.

부드러운 눈빛이 자신을 지나 서류에 다다르고 나서야, 모틸라는 피하지 않고 발터를 바라보았다.

짧은 남색 머리카락, 그 아래 동그란 귀와 굵은 선의 턱, 목과 어깨선.

그러다가 다시 올라가 언제나처럼 꾹 다문 입술과 코, 남색 눈동자.

모틸라는 이제 새벽의 처음에 있는 남색과 저녁의 끝에 있는 남색을 구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겹쳐 볼 수 없었다.

그게 얼마나 비슷하면서도 다른지,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모틸라는 발터의 옆 의자에서 다리를 올려 꼭 끌어안고, 부러 발끝을 몇 번 꼼지락거렸다가 그만두고 로나의 결혼 계획서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은 늦은 봄일 테니, 발터와 이야기한 봄보다는 좀 더 머물게 되겠지.

모나한 때문이라도, 로나 때문이라도 나는 이곳에서 도망갈 수 없을 테고.

그럼 조금 더 널 볼 테고, 네 색을 볼 테고, 널 기억할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이곳을 떠나면.

너는 정말로 나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닐까?

그러면 나는 또 도망갔다가 널 보러 가고, 멀리 떠났다가 투덜거리며 널 보러 가고.

이 길었던 시간이 점점 끝나 가면, 내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하고, 얼굴에 주름은 점점 많아질 적 어느 순간에는.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린 같이 여행하고 있을까.

모틸라는 자신이 삶의 끝에 와서야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제 와서, 드디어 시간이 한정되었을 때가 와서야.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그게 싫지 않았다.

남색에서 시작된 삶이 남색에서 끝날 것만 같아서, 모틸라는 조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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