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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틸라는 발터가 내미는 꽃다발을 들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이걸 꽃다발이라고 해야 해? 꽃이 아니라 겨우살이니까 겨우살이 다발이야, 뭐야.
“너 숨길 마음 없지.”
“뭘 말입니까?”
네 마음. 날 좋아하는 거. 네가 나에게 품은 연정.
모틸라는 혀끝에 머무는 말들을 그냥 내뱉어 버리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뾰족한 눈초리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발터는 그 눈초리에 살짝 눈을 굴리다가 다시 모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당신께 가진 호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숨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 그래 보이더라.
모른 척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놓고 행동하더라.
“내가 안 받아 주면 어쩌려고 그래?”
“받아 주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너 진짜 이상하다. 안 받아 줄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대놓고 행동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모른 척하실 것 같아서요.”
“모른 척하거나 안 하거나 안 받아 주는 건 똑같은데?”
“글쎄요. 적어도 제 마음껏 행동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발터는 당신은 밀어붙이는 사람에게 약해 보인다는 말은 숨긴 채 당당하게 마음껏 행동하겠다고 대답했다.
“도대체 내 어떤 점이 그렇게 좋니? 아, 말 안 해도 돼. 알 것 같다. 내가 참 예쁘고 아름답고 착하기까지 하지.”
“……딱히 그런 점 때문은 아닙니다만.”
발터는 모틸라가 턱을 치켜세우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럼 어떤 점인데?”
“……당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요.”
“……뭐?”
발터는 당신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사랑을 말했을 때, 그런 눈이라 와닿았다고 말하는 대신 조금 돌려 이야기했다.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깊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와닿았습니다.”
“……후회와 슬픔만이 가득하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래서요.”
아득할 정도로 슬퍼 보여서 와닿았습니다. 선홍색 눈동자가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을 정도로 후회하고 계셔서 오히려 호감이 생겼습니다.
모틸라는 발터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기, 사랑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 너 사랑 한 번도 안 해 봤니?”
“예.”
“오, 음. 안 해 봤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지! 안 해 보면 오히려 더 꿈결같이 생각하지 않아? 환상적으로 말이지.”
“글쎄요. 저는 딱히 그런 성격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해도 말이야……. 있지. 사랑은 그런 거라고. 달콤하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색감이 갑자기 진해지는 그런 거지.”
“네. 그래 보였습니다.”
“응?”
“당신이 하는 사랑이 그래 보였다는 뜻입니다.”
모틸라는 그렇게 말하는 발터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모틸라는 사랑이란 것은 달콤하고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색감이 갑자기 진해지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도 그렇다고 믿고 있지 않았다.
아니, 사랑이 그런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사랑은 말이야, 내가 한 사랑들은.
달콤한 색은 아니었다.
분홍색이나 옅은 하늘색, 파스텔 계열의 몽실몽실한 색감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설탕을 듬뿍 넣은 디저트 같지도 않았고, 달콤한 크림 같지도 않았으며, 하다못해 씁쓸함이 섞인 초콜릿 같은 것들도 아니었다.
그냥, 잠깐의 달콤함으로 왔다가 지독히도 길게, 아주 길게 슬픔만이 남은, 그런 거였다.
이제는 그 달콤했던 순간조차 잊어버렸는데, 슬픔만은 아직도 남아서 자신을 붙들고 있는.
“나 울지 않았어?”
“눈물 한 방울 흘리셨죠.”
“그게 어디가 달콤해 보였어? 완전 엉망진창인 표정이었을 뿐이잖아.”
“그럴 만큼, 그만큼 후회하고 슬퍼할 만큼 달콤했겠구나 싶어서요.”
“…….”
“그래서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걸?”
“사랑하는 방법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더 나아가서 이 땅을 사랑하는 방법.”
“난 내 삶에 후회만이 가득하다고 생각하는데.”
모틸라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나에게 배울 건 없어. 내가 하는 사랑도, 삶도, 어쩌면 죽음으로 향하는 이 순간까지도.
“글쎄요. 가끔 그래 보이긴 하십니다만. 저는 그렇게 후회하시는 만큼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삶에 진심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요.”
발터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게 흐릿하게 다가오고 그저 지나가는 나날들만 계속되었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어떻게든 흘러가기만 하면, 그래서-”
끝나기만 한다면.
모틸라는 발터가 덤덤하게 흘러나오다가 끝내는 뚝 떨어져 버린 목소리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난 도망가기만 했어.”
“그만큼 모든 것에 진심이셨나 봅니다.”
“다 버려 두고 가 버리기만 했지.”
“많이 버거우실 정도로 와닿으셨고.”
“……나는, 나는 그냥-”
상처받기 싫어서 도망가기만 하는 나날들. 그것뿐이었어. 여긴 겁쟁이밖에 없어.
모틸라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쏟아 내듯이 말했다.
발터는 그런 모틸라를 보며 담담한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이 그랬다고 해도, 저는 그냥 알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모든 것에 진심인 듯 행동할 수 있는지, 지독히 후회할 정도로 사랑할 수 있는지.
“당신의 삶이 궁금하고, 보고 싶고, 할 수 있다면 닮고 싶습니다.”
도망가는 행위라도 좋으니. 나는 그것도 못 했으니.
모틸라는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발터의 덤덤한 눈을 바라보았다.
모틸라는 그녀 스스로가 가장 싫었다. 특히 스스로가 하는 사랑이, 삶이, 삶의 방식이.
그리고 그 후회들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난 그 순간 그녀는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도망가 버리고만 싶어졌다.
가볍게,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래서 아무런 상처도 없도록.
손안에서 발터가 선물한 겨우살이가 연약한 소리를 내며 바스라졌다.
* * *
모틸라는 딱히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가지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실행하는 성격.
그래서 그녀는 또 그렇게 했다.
나중에 후회한 적이 수없이 많더라도 지금은 그것을 원했으니.
차가운 겨울밤.
해는 지고, 달은 옅은 초승달이었다.
땔감이 부족해 나무조차 아끼고 있는 마을은 조용했고, 도망가기는 아주 쉬웠다.
그래서 모틸라는 그렇게 했다.
봄까지 있겠다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먹을 게 없으니까, 이웃 마을에 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야겠어.”
하얀 입김이 검은 허공에 흩날려 거짓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여긴 너무 먹을 게 없어. 발터도 너무 걱정되고 나도 너무 힘든걸.”
입김이 아무 무게 없이 흩어지는 것처럼, 모틸라의 말에도 아무런 무게가 없었다.
“봄까지 그렇게 먹을 것들을 옮기면, 그러고나서 봄에 떠나면.”
발터의 얼굴을 보지 않더라고, 인디고 영지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더라도.
내가 계속 다니면서 들르면, 먹을 것들을 가져다주면, 도와주면.
그러면 거짓말한 게 아니니까. 봄까지 있는 거니까.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서, 스스로도 믿지 않을 거라서, 그래서 그 말들에는 아무런 무게가 없었다.
모틸라는 한참을 그렇게, 무게 없는 말들을 뱉어 내고, 뱉어 내면서 언덕을 내려가고, 무너진 담을 지나고, 타 버린 나무들 사이를 흘러, 멀리멀리 도망갔다.
그녀는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이 그런 식으로 후회하여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모틸라는,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무게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도망갔다.
* * *
모틸라는 코끝에서 맡아지는 달콤한 냄새에 생각 없이 옮기던 발걸음을 멈췄다.
배가 고팠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모틸라는 자신이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터의 저택에서 나올 때 들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에는 멍하니 돌아다니느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냥 자신에게 변명한 대로 멍하니 다른 영지로 먹을 것을 사러 움직일 뿐이었다.
모틸라는 코끝에서 맡아지는 달콤한 냄새와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에서 저 멀리 모나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아마, 뱀파이어로 변했을 로나도.
그녀는 순간 그 자리에 서서 망설였다.
이대로 가 버릴까. 굳이 알은척할 필요 없잖아.
“하지만 배고픈데.”
가면 분명 붙잡힐 거야. 또 무슨 사고 안 쳤냐고 물어볼걸? 어쩌면 나를 또 고향으로 끌고 갈지도 몰라. 모나한은 맨날 내가 뭐 하면 수습해야 한다고 난리니까.
“하지만 로나의 빵이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났는데, 그때 먹어 보지도 못했고.”
모틸라는 우물쭈물, 발끝을 굽혔다 폈다 하며 망설이다가 느리게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모나한의 얼굴에 축제 등이 환하게 비추고, 그가 그보다 더 환하게 웃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느리게 앞으로 나갔던 발걸음에 조금 더 속도가 붙었다.
모나한이 말했던 평화와 평온, 사랑 같은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느린 걸음이 좀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바뀌어 거의 뛰는 것에 가까워졌다.
따뜻한 분위기의 빵집에서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로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그래.”
모틸라는 자신도 믿지 않는 변명을 내뱉었다.
“너무 배고파서, 그런 거야.”
변명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때.
내 인생은 전부 도망과 변명만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도망가기만 하는 날 좀 잡아 줘. 잡아서 화내고 소리치고 혼내도 좋아.
내 발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나 좀 데려다줘.
모든 걸 버려 버리려고, 상처받기 싫어서 비겁한 짓만 하는 날, 나를 좀.
“모나한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하니까.”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전부 변명뿐이고, 거짓뿐인 나를 좀 잡아 줘.
도망가고 싶어, 도망가고 싶지 않아.
난 혼자가 좋아. 날 혼자 두지 말아 줘.
사랑받기 싫어. 제발 날 좀 사랑해 줘.
“또 뭐라고 할 것 같으니까 변명을 준비해야겠다. 그런 거 말이야, 다이어트 같은 거.”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것들. 거짓인 게 쉽게 들키는 하찮은 변명들.
그런 것들을 준비하자.
전부 들켜 버리게.
나의 모순, 나의 변명, 나의 거짓. 전부 알아 버리게.
그래서 제발, 제발. 부탁이건대, 날 좀 솔직하게 만들어 줘.
다시는 도망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