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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틸라는 발터의 남색 머리카락과 남색 눈을 돌아보고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뭐, 그 후에도 지금이랑 비슷해. 신경 쓰여서 옆에서 투덜거리고, 고향에 데려가서 같이 이것저것 하고.”
“그럼 저한테서 그분을 보고 계시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때 좀 후회했거든.”
사실은 아주 많이 후회했지.
그 애를 동족으로 만들지 않은 걸.
늙지 않는 나를 의심하던 눈을 보고 그냥 도망가 버린 걸.
이 높은 언덕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도 그냥 떠나 버렸던 그날을.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사랑이 아니라고 중얼거렸던 순간들을.
“여자애였거든.”
“네?”
“그 애 말이야. 여자였어. 그래서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어.”
발걸음을 맞춰서 걷는 기쁨의 이유를. 날 보며 웃는 얼굴에 행복해졌던 순간을.
나눴던 대화들과 작은 농담들에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던 것을.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떻게 휘날리는지, 그 애의 속눈썹이 얼마나 예쁘고, 그 아래 남색은 얼마나 반짝이는지.
나는 그 애가 웃어 버리면 그렇게 눈을 떼지 못했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 쉽게 눈을 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하루 종일 목소리를 듣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것과 헤어지는 순간이 너무나도 아쉽고, 다시 만나던 순간이 그렇게 기쁘던 이유를.
온통 이해할 수 없고, 이름도 붙일 수 없었던 감정들.
“그땐 그랬거든. 동성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못 하던 시대였었지. 그런 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하던. 그런 감정에 감히 우정이라는 이름만이 붙을 수 있었던.”
그래서 아주 늦게 깨달아 버린.
그래서 눈물과 후회만 남아 버린.
“이젠 말이야. 내가 사랑했던 웃음이, 표정이나 목소리 말투 같은 건……. 하나도 기억 안 나.”
그냥 이랬었다, 저랬었다. 기억보다는 활자로 남아 버렸다.
정확하지도 않아 수없이 덧씌워 버린 흐릿한 것들 뿐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게 남은 것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라서.
이렇게까지 오래, 짙게 남아 버린 감정들이라서.
“많이 사랑하셨나 봅니다.”
“……그랬나 봐.”
모틸라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볍게 바꾸며 대답했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도 함께였다.
후회만 남은 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지금도 그 애를 생각하면 웃음보다는 슬픔이 먼저 일었다.
수없이 떠올리려 하는 얼굴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되어 조각들만 남았다.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많이 티 났나 봐? 네 머리카락이랑 눈 색이 똑같아서 그 애랑 좀 겹쳐 봤거든. 얼굴이 잘 기억 안 나니까……. 멋대로 네 얼굴에 덧씌워서. 기분 나빴겠다, 미안해.”
“괜찮습니다.”
“으응?”
발터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모틸라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표정에도 발터는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계속 덧씌워 보셔서 봄 이후에도 있어 주셨으면 하고요.”
“……뭐?”
“제가 완전히 모틸라 님에게 빚만 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하군요.”
모틸라의 감정을 위로라도 하려는 건지 그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였다.
모틸라는 발터의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짧게 웃었다.
이 녀석은 뻔뻔하진 않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는 이상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걸 감추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말해 더 이상했고.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애?”
“네.”
모틸라는 발터의 물음에 입을 조금 우물거리며 망설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잊어버리지 않은 건, 어느 계절이었는지도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덥지는 않았던 그런 계절에-”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이 떠졌었다.
나는 아직, 새벽하늘과 네가 같은 색이라는 생각도 못 하던 어린아이였음에도, 창밖의 색을 보고 네가 떠올라 방을 나섰다.
바뀐 몸으로 조용하게 걷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이라서, 나는 발걸음 소리도 없이 너에게 가서 너의 방문을 열고 너의 침대 옆에 앉아 네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리도 없이 갔는데,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고 날 보며 웃었다.
나였는지 너였는지 모를 누군가가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러 가자고 했고, 우리는 정원으로 나갔다.
그때도 우리가 살던 곳은 평야의 유일한 언덕 위라서 해는 느리고, 길게 떴다.
네가 떠오르는 해를 보다가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남색을 보며 아쉬워했다.
해가 떠올라서 너의 색이 사라진 것이 그렇게 아쉬웠다.
그게 내가 새벽이 너의 색이라고 생각한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만은 지독히도 기억하고 되뇐다.
새벽의 남색은 너의 색이야. 그 짧고 흐릿한 색이 바로 너의 색이다.
“내게 남은 기억은 그 정도야. ……그것밖에 안 남았지.”
모틸라는 이야기하는 내내,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와 느리게 말하는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눈은 울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이것밖에 기억이 안 난 지 너무 오래됐어.”
모틸라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잃어버린 것은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말했던가? 있지. 잊어버리려면, 완전히 잊어버려야 해.”
안 그러면 잊어버리지 못한 조각들이 쌓여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기만 하거든.
그녀는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그럼에도 너무나 오래 기억해서 지독히도 후회하고 아파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모틸라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모닥불을 휘젓던 나뭇가지를 놓고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발터는 위로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손을 들었다가 어디를 토닥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움츠려 있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제나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펴져 있던 어깨가 자신의 손 하나로 전부 가려졌다.
발터가 보이는 것보다 더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두어 번 정도 토닥였을 때, 모틸라가 고개를 들어 발터를 바라보았다. 선홍색 눈동자와 남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모틸라는 울고 있지는 않았다.
눈물이 아직 속눈썹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 있으니, 아직은 울지 않은 거였다.
그녀는 이 기억으로 너무 많이 울었다는 듯이, 혹은 이젠 우는 것조차 지쳐 버렸다는 듯이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순간 발터는 그 눈물이 아롱져 반짝이는 선홍색이,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붙잡은 눈이, 그녀가 했던 말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모틸라의 ‘그 애’가 했던, 그리고 자신이 했던, 이제는 그녀가 하는.
색만 다를 뿐인,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
발터는 순간 그런 눈을 할 만큼 사랑했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던,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눈을 할 정도로 사랑했냐고.
그리고 모틸라의 눈동자에서 결국엔 눈물이 떨어졌고, 그 눈물이 모틸라의 볼을 훑고, 턱 끝에서 흘러 자신의 손목에 차갑게 떨어졌을 때.
발터는 대답을 들은 기분이 되었다.
발터는 그 눈물이 흐르는 것에, 그리고 그 눈물이 남긴 자국에 눈을 떼지 못했다.
까만 속눈썹에 남아 반짝거리는 조그만 물기에서도.
모틸라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짓는 표정에서, 모틸라의 눈물이 떨어져 자신에 손목에 닿았던 그 순간에서 발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지고, 무심하게 지나갔던 것들이 지독히도 와닿아 마음을 술렁거리게 했다.
이제 발터는 모틸라의 어깨에 닿은 제 손에 힘이 실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저를 보며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이를 흔들지 않기 위해서.
그 흐릿하고 낮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했던 말을 취소했다.
아무런 마음이 없다는 말, 떠나도 괜찮다는 말 같은 것들을.
그저 지나갈 것으로 여겼던 사람이, 그래서 아무런 욕심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그저 가지고만 싶어졌다.
저렇게 지독한 걸, 온 삶을 틀어쥐는 걸, 저런 눈을 할 만큼 끔찍한 것이 그는 이제 욕심이 났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가지지 않았던 욕심이, 생겨났더라도 조용히 포기해 버렸던 것들이.
발터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피어났다.
사람은 때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사랑에 빠진다.
발터는 사랑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귓가에서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뛰었다.
세상의 모든 색이 한 톤 옅어지고, 오직 한 사람만이 지독히도 진해지는 순간을 본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속눈썹.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물기 어린 선홍색 눈동자와 붉은 입술.
그 모든 게 지독히도 선명해지고 날카롭다.
눈을 깜박거리는 모양새,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움직임, 얕은 숨에 움직이는 어깨까지.
어디 하나 눈을 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따라 떨어졌던 시선이 올라와 마주치면, 그런 색감들조차 전부 사라져 버린다.
시선만이 남아 자신을 사로잡고, 엮어 버리고,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발터는 그런 감각을 난생처음 겪었다.
이런 건 배운 적도 없었고, 들은 것과도 달랐다.
이렇게 거세다는 것을, 이렇게 욕심이 난다는 것을, 이렇게 이를 악물게 된다는 것을.
어느 누구 하나 가르쳐 주지 않았다.
발터는 선홍색 눈동자에 선명하게도 보이는 제 표정을 갈무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무서워서 도망가는 사람이다, 불안해서 회피하는 분이셨다.
알리지 않으면, 분명하지 않으면, 모른 척해 버리고 가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발터는 행동하기로 했다.
그건 자신이 아주 잘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숨기는 것에 재능은 없었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는 아주 큰 재능이 있었으므로.
사랑이 온 만큼, 보여 주면 되는 것이었다.